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

2020.11.19 17:35

백년죽창반역타도구국

조회 수6

1946.4. 동아일보 『삼팔선』 이북 답파기 평양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 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 …….. ]

[ …….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

……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 『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 ……. ]

국경 아닌 국경 『삼팔선』 이북 답파기 (3)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 있을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 『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 『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 『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 『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 『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 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 『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 『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

D-storyⅡ 60 : 이북답파기(1)-평안반

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 『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

D-storyⅡ 61 : 이북답파기(2)-함경도반

[ …… 사과 빨갱이는 비밀을 철저히 지켰고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마음을 주지 않았다. ……..

…… 입을 다물고 구호를 외치지 아니하면 옆에 선 학생이 학교에 밀고하고 ……. ]

평생 잊을 수 없는 의 감격 (1)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

그 쏘련 군이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서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는가? 바로 야만인 그대로의 추태였다. 너무도 쏘련군의 행패가 심하여 동리 집집마다 방울을 준비하여 서로 끈으로 연결하여 이웃집에 쏘련 병사가 들어오면 줄을 잡아 담겨 이웃에 신호를 보내어 도피하도록 했다.

해방이 된 이후 북에서는 당분간 라디오의 다이알이 고정되지 않아 남한의 방송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이 그러했다. 당시 라디오는 “earth” 줄이 붙어 있어서 라디오에 붙어 있는 그 철사를 땅에 가볍게 묻어주어야 수신이 가능했다. 아니면 손으로 그 쇠줄을 들고 있어야 방송이 들렸고 쇠줄을 놓으면 소리가 멎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원시 시대 같지만 그때는 그러했다. 북에는 해방직후 공산당이 활개를 치고 다녔고 돈 있는 사람, 유식한 사람, 종교인, 지주, 소시민 등은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지만 그 때만해도 대부분의 식자들은 몰래 남한의 서울방송을 듣고는 그 다음날 남몰래 눈치를 보면서 마음을 통하는 친구들과 앉아서 남한에서 돌아가는 형세를 서로 이야기 했다. 이런 사람을 “사과빨갱이” 라고 하고 반면에 이런 사람들을 잡으려 다니는 진짜 속과 밖이 모두 빨간 진짜 공산주의자를 “도마도 빨갱이” 이라고 했다. 사과 빨갱이는 비밀을 철저히 지켰고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남은 형사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의 북한은 라디오의 다이알이 평양방송이나 중앙방송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북한에서 조립한 라디오로는 세계 방송이나 남한의 방송을 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전쟁이 나기까지는 몰래 외국 방송을 듣는 일이 위험은 해도 가능했다.

낮에는 평양에서 방송되는 평양방송을 들으며 북한의 선전을 듣는 척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몰래 요로 라디오를 감싸고 다이얼을 서울 HLKA 방송국으로 돌려 그 “earth line” 을 손에 쥐고 열심히 남한 방송을 들었다.

……………………………………………………………………….

그러는 동안 북한에서는 남한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주민들과 학생들 동원해서 시위하는 “군중대회” 가 이전보다 자주 열렸는데 군중대회가 있는 날엔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그 “군중대회” 에 동원했다. “군중대회” 란 학교 운동장에 동리 주민들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동리 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남조선과 미군을 비난하는 연설을 한 바탕 늘어놓은 다음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고 해산하는 방식이다. 그때 구호는 “미군 물러가라”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 등의 구호였다. 입을 다물고 구호를 외치지 아니하면 옆에 선 학생이 학교에 밀고하고 밀고당한 학생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다. 일정시대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우리들은 좋든 싫든 남이 하는대로 구호를 따라 외쳐야 했다.

1947년에 “좌우합작운동” 을 펴나가던 남한의 김규식씨와 김구씨 등이 평양에 들어왔다. 동리 벽보판에서 하루 밤 사이에 “김구” 의 이름이 들어있는 벽보는 모두 제거되고 “이승만 타도” 벽보로 대체되었다. 평양방송은 이들의 방북을 환영하는 아양을 떨었다. 이들이 방북할 때 남조선의 사회 정당 대표 몇 분도 따라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이들의 연설 요지는 모두 “북조선의 눈부신 발전” 을 찬양하는 목소리였다. 나중에 김구가 암살당한 것도 북에서 그가 한 발언내용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구선생은 북에 다녀와서 얼마 후 육국 포병 소위 안두희 에게 서울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은 남한의 을 반대했고 남과 북이 합하여 통일된 정부를 세우려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발상이었던가? 공산주의자와의 대화에서 그런 일이 성사될 것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얼마나 순진했던가? 북한은 항상 “남반부 해방” 의 꿈을 버리지 않고 “적화통일” 을 원하는데 어떻게 통일정부가 가능하겠는가? 결국 김구 김규식 등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북이 대치하는 38선은 더욱 경비가 강화되어 점점 “철의 장막” 의 철조망은 넘기 어려워져 북한 주민들의 월남 가능성은 멀어졌고 항아리에 들어있는 물고기처럼 그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철의 장막” 에 갇히게 되어 고난의 나날이 오늘까지 장장 63년간 계속되고 있다.

1949년부터는 이북의 모든 학교에서 영어를 페지하고 쏘련어만 가르쳤다.

……………………………………………………………………………………..

[ …… 공산주의 사회는 “밀고” 하는 사회이다. ….. 사람 살맛이 나지 않았다. ……

….. 고발당하는 사람은 고초를 겪고 …… 고발하는 사람은 진급하여 학교에서는 점수를 따게 되고 직장에 나가는 사람이면 ”성분“ 이 격상되어 식량배급을 받을 때도 더 ……. ]

평생 잊을 수 없는 의 감격 (2)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

해방 직후 남한에는 우후죽순처럼 불어난 공산분자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그 치밀한 조직으로 공장에 들어가 직공들의 파업을 주도하고 시회 혼란을 일으키고 테러를 자행하며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극히 불안한 사회상이 되어 버렸다. 북한에도 해방직후 공산당이 등장했지만 북한에서는 공산당의 통제가 아주 철통같아서 민주세력은 힘을 쓸 수 없었고 1946년의 “신의주 학생 사건” 같은 민주운동은 즉시 진압 되었는데 남한은 민주주의를 하는 미 군정청이 들어섰는데도 공산당의 행패가 대단했다. 미 군정청은 “자유” 라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활동을 묵인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북에서 쏘련군이 민주 세력에게 그런 자유를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북에는 오로지 공산당 활동만 허용되어 백성을 통제했고 민주주의 활동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

은 1948년 2월 26일에 서울에 들어와서 활동하면서 국민 총선거를 준비했고 북의 김일성에게도 북한에 들어가서 총선거를 주관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주문했으니 북의 김일성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평양 입경을 거절당한 은 할 수 없이 남한에서만 이라도 총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치렀는데 이 무렵, 남한의 을 반대하는 남로당 박헌영의 지시로 제주도에서 남로당 김달삼이 주도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의 책임은 남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의 김일성에게 있다. 유엔 감시 위원단은 분명히 남과 북이 동시에 총선을 하도록 하기 워해서 북의 김일성에서 평양 입경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런데 왜 남로당은 남한에 책임을 물어 야만적인 방법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폭동을 일으켰는가?
…………………………………………………………………………..

어려운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고 이북 5도을 위해서 국회 의원 100석을 공석으로 놓아두고 나라가 통일되어 그 자리가 채워지기를 바랐다. 남한에서 국회 의원 200 명이 선춮되었고 1948년 5월 31일에는 가 개원되어 189 대 8표로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 의장으로 일을 맡게 되었는데 고려대학교의 유진오 총장 같은 석학들을 초청하여 새 나라의 헌법을 제정하고 제정되어가는 헌법은 낱낱이 서울 방송을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는데 매일 저녁 6시 북한에서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제정을 마친 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 으로 정하고 1948년 7월 20일 200명 재적 의원중 180표를 얻어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부통령에 이시영 옹을 세웠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청 건물 (구 조선 총독부 청사)에서 세계 우방 여러 나라 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나는 그때 북에 있었지만 그날 중계방송을 통해서 그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윽고 새로운 나라 탄생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조선 반도 13 도의 각도를 상징하여 13번 울렸다. 정부가 수립되자 유엔에서는 대한민국이 라고 인정했고 세계 여러 나라가 앞을 다투어 대한민국을 recognition (승인) 했다는 보도가 연일 뉴스시간에 서울방송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러므로 북한은 불법으로 김일성 집단이 강점한 땅이며 회복해야 할 “실지 즉 잃어버린 땅” 이다. 북한은 유앤 감시 위원단의 입국을 불허한 땅이다. 제멋대로 세운 집단이다. 오늘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사회는 “밀고” 하는 사회이다.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는 탓에 사람 살맛이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학생들 서로가 밀정이니 누구를 믿까? 서로 서로 고발한다. 고발하면 고발당하는 사람은 고초를 겪고 그 때부터는 “요시찰 인물“ 로 전락하여 매장되지만, 고발하는 사람은 진급하여 학교에서는 점수를 따게 되고 직장에 나가는 사람이면 ”성분“ 이 격상되어 식량배급을 받을 때도 더 혜택을 누리고 무엇을 해도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니 누구인들 밀고를 마다하겠는가? 북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식자들과 재산가들, 소시민들, 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

1950

[ …… 밤에는 죽창을 내주며 「반동분자」를 색출하도록 했다. …….. ]

……………………………………………………………………………………………………………………….

나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총소리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6·25당시 나와 내친구들의 밀고로 처형당한 우리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박히던 총소리였다.

전쟁중이던 50년 가을, 내가 살았던 산골마을(함경북도 종성군 남산면 산성리)은 텅 비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모두 끌려갔고 노약자와 부녀자만 남아 있었다. 마을은 민청원들이 경계했다. 당시 내나이 10살, 동광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민청원들은 아침이면 마을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미제를 때려잡기 위한 곤봉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밤에는 죽창을 내주며 「반동분자」를 색출하도록 했다.

밤이 되면 조무래기들은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는 우쭐한 기분으로 이마을 저마을을 설치고 다녔다. 그리고 남의 집 토방밑에 몸을 숨기고 호롱불이 켜진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증골(절이 있는 산골)로 가는 길목 숲속에 숨어 불공드리러 가는 사람들을 알아내 그 이름을 일일이 고해바쳤다.

그러던 어느날 밤, 무장한 내무서원과 인민군등 20여명이 민청원들을 앞세우고 우리마을에 들이닥쳤다. 내무서원들은 마을인민들을 전원 집합시켰다. 그리고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어른들 틈에서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사람 한사람씩 불려나가 포승에 묶이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반동분자」라고 밀고했던 동네어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무서원들은 부녀자를 제외한 남자 20명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갔다.

잠시후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그날밤 나는 죄책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총소리의 기억은 일생동안 나를 괴롭혔다.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95090&ctg=

사선을 넘어서 | 청진서 서울까지 동토탈출기(김만철) | “나는 골수공산주의자였다”

[중앙일보] 입력 1987.04.15

1955.5.

자백운동

닉네임 : NK조선 2013-10-30

자백운동은 1955년 5월부터 북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본인을 포함한 주변사람들이 범한 작은 과오를 비롯한 범죄사실 등을 밝히고 사상적인 개혁을 기도한다는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자백운동은 1955년 4월 당중앙위원회 4월 전원회의에서 결정되었다(김일성,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 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김일성저작집9」). 전원회의에서는 “경제절약과 재정규율을 강화하기 위하여 탐오랑비한 자들을 교화소에 넣는 것을 위주로 하지 말고 자백운동을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 또 “자백운동을 위주로 하면서 엄중한 탐오랑비분자들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을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라고 자백운동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4월 전원회의의 결정이 있은 후 1955년 5월부터는 북한전역에 걸쳐 자백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원들은 소속 당 조직에서 비당원들은 소속 직업동맹에서 매일 2시간씩 회의를 열어 이 운동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회의에서 취급된 문제 중 비행이 큰 것은 이른바 ‘반탐오, 반낭비 투쟁위원회’에 회부되어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다.

북한의 대중매체들은 자백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지면을 채웠다. 당시 국가검열상이었던 이효순은 1955년 12월 11일자 노동신문에서 “자백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자”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자기의 개인적 출세와 탐욕적 행위를 엄폐하기 위해 대중들의 자각성과 적극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의 대상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자백운동은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는 심각한 사상투쟁으로서 단순히 탐오·랑비한 자들의 죄행을 고백시키는 사업이 아니다. 지난 기간 죄과를 범한 자들이 자기 자신을 허심하게 검토하고 그를 대담하게 당과 국가 앞에 자백하여 다시는 그런 길을 걷지 않고 옳은 길로 나아가도록 그의 사상을 개조하는데 자백운동의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자백운동의 목적을 밝혔다. 이효순은 이어 인민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바로잡기 위한 중대한 정치투쟁의 일환인 자백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반탐오, 반낭비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사회적으로 전개되었던 자백운동을 통해 처벌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는 출당, 철직, 강직, 강제노동 또는 투옥과 공개재판 등의 처벌이 내려졌다. 특히 탐오낭비분자 색출이라는 명분 하에 노동자, 농민 등 기본성분 출신은 관대하게 처리되었으나 상공업자 또는 도시 소시민은 처벌을 받았다. 또, 이 과정에서 남로당계, 월북 문인을 비롯한 남한 출신인사가 대거 숙청되었다.

이후에도 북한에서는 1958년 당에 대한 해독행위는 물론 사소한 불평·불만행위까지도 자백·자수하도록 하는 중앙당집중지도사업(링크)을 시행했다. 또, 1994년 2월에 남한으로 귀순한 북송재일교포 정기해씨는 1982년 김일성 칠순 때도 전국적으로 자백사업이 벌어졌다고 증언 한바 있다.

*

………………………………………………………………………………………

김일성 시대는 북한의 인민들이 늘 반성문을 써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북한에서 50세를 넘긴 주민들은 김일성시대를 주생활총화, 분기동맹총화, 사상투쟁회, 대논쟁 등 빠짐없이 반성문을 써야했던 고달픈 나날들로 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1958.12. ‘중앙당 집중지도사업’

[ ….. 반혁명분자 색출을 위해 상호밀고와 군중집회를 권장 ……..

….. 이후 북한사회는 반대파라는 마찰이 없는 …….. ]

………………………………………………………………………………………

전후 북한의 정치는 김일성의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특징지워진다. 김일성은 먼저 자기의 권력에 도전했던 박헌영의 남로당 일파를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제거한다. 이어서 이른바 ‘주체’의 시대가 시작된다. 아직도 주체사상이 인류를 구원할 철학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김일성의 1인독재를 구축하는 데에 사용된 이데올로기적 수단에 불과하다. ‘주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강대국의 입김에 놀아나지 않고 민족주체성을 확립한다는 표면의미와 함께, 1956년 김일성 1인독재의 구축과 함께 시작된 소련파, 연안파의 숙청이라는 심층의미를 갖는다. 원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표면의미와 심층의미의 교묘한 놀이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권력의 심층부에 대한 숙청의 완료는 일반주민에 대한 숙청의 시작을 의미한다. 1958년 12월에 시작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중세의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사회적 패닉을 불러일으킨다. 반혁명분자 색출을 위해 상호밀고와 군중집회를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1년 동안 진행된 이 색출운동의 결과 주민들의 성분분석표가 만들어지고, 이 성분분석표는 북한 주민의 3분의 1을 반혁명분자로 분류해놓고 있었다. 이 표에 따라 반혁명분자들은 당이나 공직에서 겨나거나 한촌으로 추방되거나 강제수용소(노동교화소)에 보내지거나 때로는 처형을 당해야 했다. 이후 북한사회는 반대파라는 마찰이 없는 평면 위를 미끄러지며 김일성의 개인우상화로 치닫게 된다.

………………………………………………………………………………….

……………………………………………………………………………………..

그런데 나는 본래 술을 먹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몸이 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술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체질적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사실 북조선의 상황이 술을 멀리하게 했다. 북조선에는 금기가 많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북조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자아 투쟁을 한다. , 하는 끊임없는 불안감에 말을 절제하게 되고 자기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술을 먹으면 자연히 말이 많아지게 되고 자아 투쟁이 약화되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이 새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술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을 숱하게 보아 왔던 나는 자연히 술과 더욱 멀어졌던 것이다.

……………………………………………………………………………………..

[ ….. “그럼 아무리 지도자 동지가 위대하다 해도 수령님과 비교할 수 없지” ……..

…… 정치범수용소로 끌려 갔다. ……. ]

…………………………………………………………………………………….

북한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이 입이다.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일에 관련한 말은 토씨 하나까지 신경써야 한다.

충직한 노동당원이던 필자의 삼촌은 김정일과 관련된 말 한마디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고, 가족은 산골오지로 추방돼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고 있다. 여기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

작업반원이 “지도자 동지(김정일)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아버지인 김일성보다는 못하지 않은가?”라고 말하자, 삼촌은 “그럼 아무리 지도자 동지가 위대하다 해도 수령님과 비교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

‘당중앙’ 권위훼손, 정치범수용소 ‘닫긴 구역’으로 끌려가

삼촌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 10조 5항에 어긋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몰려 재판도 없이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로동자구에 있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 갔다.

10대원칙 10조 5항은 “당중앙(김정일)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

수용소

………………………………………………………………………………….

수감자들 가운데는 보위원의 밀정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이 있기 때문에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고 한다. 누가 밀정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감자 상호간에 의심과 불신·반목이 일반적 현상이다. 함부로 자신의 인적사항을 밝히거나 대화를 나누면 즉시 밀고되어 심한 추궁을 당할 정도다. 수감자 셋 이상이 모여 대화를 하면 모의 대상, 쿠데타 대상으로 간주하여 가혹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수감자들끼리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제가 보기엔 수감자 세 명 중 한 명은 밀고자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밀고와 감시가 성행하는 이유는 수감자가 은밀히 도주 모의를 하는 내용을 밀고할 경우 탄광보다 조건이 나은 작업장으로 옮겨주기 때문입니다. 목장 같은 곳으로 배치되면 그래도 돼지나 소에게 주는 사료를 몰래 훔쳐먹을 기회가 있고, 또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탄광보다는 작업환경이 좋습니다. 그러니 굶주림 때문에 목숨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수감자들은 옆사람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엿들었다가 밀고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

[ …… 대체적으로 3명 중의 1명은 보위원의 첩자라고 …….

….. 밀고자들은 …. 조금 편한 일을 시켜준다. ……..

….. 내부 첩보 시스템은 …. 보위원들 내에서도 존재 ……. ]

개가 사람 잡아먹어도 “잘 키웠다” 칭찬

[‘아! 정치범수용소’] ④ 짐승처럼 취급받는 사람들

2005-07-22

“우리 인민의 계급적인 원쑤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 김일성

“도주한 놈을 무조건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 놈들이 도주하면 수령님의 대외적 권위가 심히 훼손됨으로 동무들은 초소를 철벽으로 지킴으로써 한 놈의 도주자도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김정일

계급투쟁의 현장

정치범수용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느냐”며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보위원들이나 경비대원들도 같은 사람들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정치범들을 다루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있다 탈출한 안명철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김일성, 김정일의 지시이기 때문이다. 안명철씨는 신병으로 처음 정치범수용소에 배치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13호 관리소는 당을 배반하고 수령을 배반한 악질적인 종파분자들과 그 자녀들이 있는 것만큼 신랄한 계급투쟁의 현장입니다. (중략)

이놈들은 악질들이기 때문에 동무들이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생각하면 그 놈들은 앞에서 웃음 짓고 뒤에서는 칼을 빼 드는 놈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중략)

동무들에게는 오직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의무와 도망치지 못하게 경계선을 철벽같이 지키며 한 놈이라도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무자비하게 사살할 의무밖에 없습니다.”

………………………………………………………………………

내부 밀고자는 편한 곳으로 보내줘

북한 사회 전체가 이중 삼중의 감시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역시 정치범수용소의 그것보다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의 폭동 이후, 그리고 김정일의 집권과정에서 대거 정적들이 수용된 이후 수용소의 내부 감시 시스템은 더욱 정교해졌다. 대체적으로 3명 중의 1명은 보위원의 첩자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수인들이 불만사항이 있는지를 염탐을 한다. 그래서 사소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더라도 보위원에게 신고한다.

…………………………………………………………………….

밀고자들은 탄광이나 건설공사장에서 토끼 사육장 같은 곳으로 보내주는 등 조금 편한 일을 시켜준다.
……………………………………………………………………….

내부 첩보 시스템은 비단 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위원들 내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보위원들은 수인들에게 조금의 동정심을 표할 수가 없다.

………………………………………………………………………………………

http://www1.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500&num=8987

**

……………………………………………………………………………………….

89년 당중앙위원회는 「3명 이상이 어울려 술을 마시지 말라」고 지시했다.

……………………………………………………………………………………..

2015-08-06

……………………………………………………………………………………..

북한 당국이 체제에 대해 주민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3인 이상 모여 앉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

………………………………………………………………………………………..

노동당의 정책으로 해외언론은 접할 수 없고 남한방송을 몰래 청취했다가는 정치범수용소행이 십상이다. 외국을 다녀온 사람도 정치적 발언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산다. 그들 주변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항상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당사자의 실언을 기다린다. 이유는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면 승진과 배급이 있기 때문이다.

……………………………………………………………………………………

*

……………………………………………………………………………………………………………….

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곤 했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개가 쌀밥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

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

북한에서는 단속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이 놀던 사람들 중에 고발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뭔가 보위 지도원들 또 경찰 안전원들에게 잘 보이면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아는 보위 지도원이나 경찰이 있다면 누구누구랑 한국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잡히게 만드는 거죠

……………………………………………………………………………………….

………………………………………………………………………………………..

~그런데 그런 말씀을 잡지 같은데 내면 많은 사람들이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궁금한 것은 왜 그렇게 엄청나게 집단적으로 인권유린을 하고 사람을 막 죽이고 하는데도 저 정권이 어떻게 저렇게 버티며 버틸 수 있나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항상 의문이거든요.

▲김영순 : 왜 그러냐 하면 북한 정치는 체제유지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의 충신은 내일의 배신자로 처단함으로 해서 국민을 겁주고 각성시키는 방법으로 해요. 유치원 탁아소 시절부터 神造化 神格化(신조화 신격화)로 세뇌 시키는 거예요.

김일성이가 밥을 안주면 밥을 못 먹는다. 그리고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김일성 선집」「김일성 저작 선집」 그 외에 「주체사상 수령제일주의」가 헌법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 북한 체제거든요. 특히 수령제일주의가 말이지요. 그러니까 북한체제가 유지되는 거예요.

그리고 시스템이 얼마나 잘되어있는지 몰라요. 홍보체제에 의한 시스템 구축이거든요.

지금도 북한체제유지가 왜 되고 있느냐. 지금 북한체제는 하나도 변함없는 그대로에요. 생활고 때문에 경제 질서는 위반이 있고 마비상태이나 정치질서는 그대로에요.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제각각이고 수천만가지에요.

그러나 일단 유사시엔, 체제유지를 위협하는 사태라고 생각하면, 「비사회주의 구루빠」 「중앙당 구루빠」 「육사 구루빠」이런 것을 조직해 가지고 하부 세포 말단 인민반, 노동자들까지 들어갑니다.

그들이 오면 주민들이 모두 고자질을 합니다.

「아무개는 중국에 드나들며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주의가 많습니다.」 「당을 위해 헌신 안합니다.」 「조직생활에 참가 안합니다.」그렇게 통보를 해요. 그러면 취급을 하거든요. 불러다 비판을 시키고, 비판서를 쓰게 하고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또 사상투쟁회의를 하거든요. 그래가지고 「同志(동지) 재판」을 시켜요. 그래가지고 잘못된 것, 특히 북한에 대해 敵性(적성)을 띈 일, 특히 남한사람을 만났다든가, 남한의 성경책을 접했다든가, 외국대사관에 갔다가 상대 못할 사람을 만나가지고 밀담을 했다든가 하는 경우는 정치범 수용소 행 대상입니다.

그다음 나머지는 직결소라든가 구치소라든가 노동 「단련대」라든가 하는데 배치합니다. 이렇게 공포의 검거선풍을 일으킵니다. 그것도 일 년에 몇 차례씩 말이지요. 그것이 무섭지요.

………………………………………………………………………………………..

*

…………………………………………………………………………………………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제정된 사회주의노동법 제33조는 「국가는 근로자들의 노동생활조직에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학습하는 원칙을 철저히 관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인민이 짬을 가지면 딴 생각을 품게 되므로 인민에게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조다.

………………………………………………………………………………………..

2010

[ ….. 아무도 없는데 꼭 누가 감시하는 것처럼 말조심을 하는데. ……. ]

………………………………………………………………………………………….

김 씨와 고 씨는 60년 만에 만난 동생이 한없이 반가웠지만 시종일관 ‘장군님의 은덕’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들을 보며 이념의 장벽을 느꼈다고 한다.

고 씨는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감시요원이 있었어요. 동생과 조카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아요. 동생은 여러 차례 장군님 덕택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연발하더군요. 참 뭐라고 할 수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도 “‘오빠 나는 장군님 은혜로 잘 살아간다’는 동생의 말에 솔직히 이념의 장벽을 느꼈습니다. 호텔 방에서 개별 상봉을 하는데 동생과 조카는 이북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더군요. 아무도 없는데 꼭 누가 감시하는 것처럼 말조심을 하는데. 참 북한이라는 사회가…”라며 말끝을 흐렸다.

……………………………………………………………………………………….

*

2005

…………………………………………………………………………………

평양 관광 중 계속 감탄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호텔 방에 들어오면 낮에 쌓였던 비판적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자기네들은 최고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인민들은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나. XXX들 !”

혼자의 방이라 마음 놓고 비판하고 욕하면서 스스로 자위를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승강기와 방 안에서도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

*

[ ……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집에 도청장치를 했는가 ? …….. ]

[독점입수] 탈북 여기자 통한의 수기

“북한은 큰도둑과 좀도둑의 나라”

필자 김길선(44)은 97년 8월 남편·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중국에서 15개월 동안 피신생활을 거쳐 99년 1월 한국에 귀순한 북한의 여기자다. 그와 그의 가족은 5월부터 한국의 시민으로 정착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

김길선

내가 국가보위부에 연행된 것은 1995년 8월 28일이었다. 수개월간 나를 괴롭혀오던 불안이 드디어 발등에 떨어진 날이었다.

……………………………………………………………………………..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남들이 대체로 알고 있는 사실들과 쉬쉬하면서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말했을 뿐 내 자신이 생소리를 지어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스스로의 변명일 뿐,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발언에 대해서는 말한 사람은 물론 들은 사람까지도 다 잡아가두는 것이 국가보위부였다.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잡혀들어만 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보위부, 죄가 부족하면 만들어 씌워서라도 종신 감옥생활을 시키며 자손 대대로 그 죄를 계산하는 막강한 악권을 가진 국가보위부에 걸려들었으니….

………………………………………………………………………………

과묵한 일꾼들도 오류를 범하고 사상투쟁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잠자리에서 한 발언까지도 들추어내어 반당·반혁명·반국가적이라는, 온갖 덤터기를 다 씌워서 가족과 함께 추방해버리는 체제에서 나처럼 자유주의가 심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고려없이 탕탕 말하는 풋망아지에게 죄를 씌우기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런 일을 전업으로 하는 국가보위부에 걸려들었으니…. 내가 매장된다는 것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딸자식과 남편을,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정치범 가족수용소로 밀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

“아주 점잖게 썼는데? 솔직하지 못해… 교만하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했어. 들었거나 한 발언들을 덜지도 말고 보태지도 말고 표현한 그대로 쓰라고 했지! ‘그 새끼’라고 했으면 ‘그 새끼’, ‘부화했다’라고 했으면 ‘부화했다’라고, 말한 그대로 쓰란 말이야. 이렇게 썼다고 해서 네 죄가 덜어질 것 같애? 내 이제 네가 한 발언 가운데서 한 건을 읽어주겠으니 귓구멍을 후비고 똑똑히 들어!”

자료:1994년 10월 9일 김길선 집에서 김모·박모·추모가 주고받은 말.

추모:지도자 동지께서는 보천보 전자악단 배우 김광숙이를 매우 사랑하신다. 어딜 가나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지도자 동지의 부인인 줄로 알고 있었대. 그이께서는 광숙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기쁨을 드리면 선물도 아낌없이 주신다. 광숙이네 집에는 선물로 받은 피아노만도 3대나 된다고 한다.

박모:그이께서는 영화배우 오미란이도 좋아하신대. 그래서 쩍 하면 집무실로 부르시는데 그 혼자만 자꾸 부를 수가 없어서 아버지까지 함께 부르신대. 그리고 국가연회에도 빠짐없이 참가시킨대.

김:너희들 다 모르는 소리다. 지도자 동지께서 진짜로 사랑하신 건 배우 성혜림이다. 성혜림은 원래 작가 리기영의 며느리인데 그이께서 가로채서 살았대. 그는 나이도 지도자 동지보다 위래. 후에 수령님이랑 온 집안이 반대를 해서 뭉터기 달러를 주어 외국에 내보냈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집에 도청장치를 했는가? 너무도 무서웠다. 이 발언 내용이 보위부에 고발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받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소된 줄은 몰랐다. 속이 얼어들면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선생의 고함소리가 방안을 팍 때렸다.

“야, 네 생각에는 수령이 남의 유부녀나 가로채서 살 것 같애? 어디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모여들어서 개소리를 쳐! 너 같은 년들은 원래 비판서구 뭐구 다 총살해치워야 해. 개 간나새끼들…. 어디다 대고 수령을 함부로 헐뜯어? 이제부터 1994년 10월9일에 있었던 네 명의 대화를 네손으로 그대로 써라. 그리고 성혜림 이야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으며 누구누구에게 옮겨놓았는가도 똑똑히 밝혀라.”

………………………………………………………………………………

그때 나에게는 김정일에게 죄스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까지 ‘기쁨조’요 뭐요 하면서 김정일의 여성관계에 대해 내남없이 쉬쉬거리는 속에 나도 참여하곤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그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김정일의 뒷생활에 대한 말들은 뒷골목에서 많이도 돌았다.

‘그이께서 성혜림이와 부화하긴 한 모양이구나. 그이도 부처님이나 신이 아닌 이상 분명한 남자로서 마음에 드는 여자와 부화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임금은 무치’라는데 부화했으면 했지, 그 말을 했다고 이렇게 잡아가두고 못살게 굴어….’

………………………………………………………………………….

유치하고 염증나는 칭송곡들

별장에서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나는 가져온 아침식사에서 시래깃국만 쭉 들이키고 책상에 마주 앉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1994년 10월9일에 박·추와 내가 나눈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나갔다. 나는 성혜림 건을 전해들은 경위에 대해서도 그대로 진술했다. 성혜림 이야기를 얼마나 반복해서 썼는지…. 국가보위부 선생은 이 발언 하나를 놓고 거의 3일 동안이나 문초하고 비판서를 쓰게 했다. 그럴수록 나는 단순했다. 우연한 기회에 희귀하게 전해듣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동무들 사이의 대화가 그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나도 얻어들은 대로 말했다, 그러니 잘못했다.―이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김정일은 성혜림의 일로 해서 무척이나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것은 이 일이 한때 문화예술계를 들었다 놓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리라. 이 연애사를 알고 말로 번져놓은 사람들은 거의가 보위부에 연행돼 경중에 따라 매장되거나 지도자 동지의 권위를 목숨으로 담보하겠다는 손가락 지장을 찍고서야 풀려나왔다고 한다.

1970년대에 김정일에게서 과업을 받고 성혜림 사건을 수습하느라고 전력을 기울인 국가보위부로서는 90년대까지 이 입소문을 막지 못했으니 악이 날만도 했다. 내가 국가보위부의 신세를 진 것은 사실상 성혜림 사건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참회는 계속되었다.

자료:1994년 2월 집필실에서 김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지도하시는 보천보전자악단 창작가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작가들이 친애하는 그이를 칭송하는 노래를 어른용·아동용을 가려서 지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내가 가깝게 지내는 언니네 동네에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계시는데 인민학교 학생들이 아침마다 집단등교를 하면서 ‘자랑하자 김정일, 우리의 지도자’ 노래를 제멋대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김정일이가 누군지 재수가 없겠다. 애들까지 저렇게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 것을 보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령을 형상한 노래일수록 점잖고 품위있게 지어야지, 김광숙이가 부르는 노래 ‘그리워’는 꼭 애인을 그리는 노래 같은 게 듣기가 다 거북하다.”

선생은 하늘색 뚜껑의 자료철을 밀어놓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발언도 수령의 권위 훼손죄란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천보전자악단에서 김정일을 형상하는 새로운 노래를 내놓을 때마다 가끔 염증을 느끼곤 했다.

“그리워. 그리워 자애로운 그 품이…” “자애로운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 “따뜻한 그 미소 그립습니다…” “그품에 안기어 흐느낍니다…”

아첨도 별나게 한다 싶었다. 내가 보기에 그이의 미소는 부드럽고 자애롭기보다는 권력을 쥔 자만자족감, 남을 내리누르고 있다는 오만한 희열에 찬 방자호황한 미소였다. 아마도 김정일은 그런 유형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배우들이 자기의 코 앞에서 그런 노래를 부를 때 그의 감정이 어떠했을까? 흡족했을까, 쑥스러웠을까? 여하튼 나 개인의 견해로는 한 나라의 지도자를 칭송하는 노래 치고는 너무나 유치하다는 것이다. 나는 김정일을 헐뜯은 것도 아니요, 하도 듣기가 딱해서 수령 묘사 노래를 품위있고 점잖게, 그리고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따로 창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란 말 그대로 나는 선생의 방조하에 스스로를 회개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들으시고 좋다고 하신 것은 다 명곡·명작입니다. 내가 그렇게 발언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지도자동지의 하늘 같은 사랑과 배려를 가슴 뜨겁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효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

사형수를 기관단총 시험사격용으로

그 하늘색 뚜껑의 자료철에는 내가 연간에 한 엄중한 발언들이 거의 다 기록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자기 아들을 ‘김정일 동지’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일 50돌에는 ‘광명성 찬가’라는 송시까지 지어서 공화국의 밥술드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외우도록 한 것을 보고 김일성의 ‘노망’이라고 발언한 것.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동족상잔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도덕적 책임을 말할 수 없다”고 쓴 대목을 보고 ‘수령님의 참회’라고 한 것. 김정일이 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을 때 “전쟁판에 한번도 서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원수 칭호를 받는가? 아이 때에 군사놀이를 잘해서 주는 것인가?” 하고 야유한 것. 또 김정일이 “동무들은 두 가지를 하고 싶어도 내가 하나를 하라고 하면 하나를 해야 한다” “내가 검은 것도 희다고 하면 동무들도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한 지시를 놓고 “두 가지를 해서 더 좋게 되면 두 가지를 하는 것이고 검은 것은 엎어치나 둘러치나 검은 것이 진리인데 그이 한 분이 지시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멀쩡한 사람들이 검은 것을 희다고 하겠는가”라고 발언한 것….

………………………………………………………………………..

별장에서의 40일은 정열적이고 가벼웠던 김길선이라는 인간이 죽어없어지고 음흉하고 독하고 야심만만한 새 인간이 생겨나는 나날이었다. 내가 살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국가보위부의 전략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나는 95년 10월6일 머리가 허옇게 세고 체중이 7kg나 줄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옥살이에서 풀려났다. 다시는 당과 수령 앞에 죄를 짓지 않겠으며 친애하는 김정일을 옹호보위하는 길에서 맹수와 같이 앞장서 투쟁하겠다고 서약을 할 때 나는 살려주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나는 그 40일 동안에 나로서도 주체할 수 없는 뼛속 깊은 증오와 복수심을 키워가지고 사회에 나왔다. 나의 운명은 이때부터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을 부당하게 패배시키려는 것은 독재자의 유치한 복수심이다. 미국작가 헤밍웨이는 말했다. “그대가 그를 소멸할 수는 있지만 그를 패배시킬 수는 없다.”

30년 살던 평양으로부터 추방

…………………………………………………………………………….

나는 계단을 올라가서 초급당비서방을 찾았다. 기자들의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관계없이 손아래 동생처럼 하대하던 초급당비서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초급당비서가 입을 열었다.

“동무가 자기 비판을 잘하고 나왔으니 더 긴 말은 하지 않겠소. 이번 일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고 일을 잘하시오. 우리 당은 관대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울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고 일을 잘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로부터 40일 후 우리집은 불시에 추방령을 받았다. 어느새 공민증의 퇴거수속을 했고 고등중학교에 다니는 딸애의 전학증까지도 다 떼가지고 누워 앓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내일 당장 떠나가란다. 딸은 내가 또 심장발작을 일으킬까봐 내 손을 꼭 쥐고 눈물을 떨구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딸애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가만히 다독이면서 속시원하게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 속을 죄었는데 추방령을 받으니 한편으로는 ‘이제는 고통을 더이상 주지 않겠지!’하는 생각에 가쁜하였다.

………………………………………………………………………………

어느날 우리 윗집에서 살던 할머니가 먹지 못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소금을 얻으러 우리집에 왔다. 그 할머니는 역시 굶고서 맥없이 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눈물이 글썽해서 “기자선생, 이렇게 살 바엔 살아서 뭘 하겠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는 일제 때에도 살아보고 6·25전쟁도 겪어보았지만 지금처럼 굶어보기는 처음이요. 일본놈 때에는 그놈들만 이밥을 먹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좁쌀만 주는 것이 괘씸했지만 배를 곯지는 않았어. 일제 때만도 못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이 법들 중에서 가장 악법은 통행증 제도다. 평양은 물론 지방의 도와 도 사이도 이 통행증이 있어야 오갈 수 있다. 그런데 태반의 사람들이 식량구입을 위해 유동하니 통행증을 떼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안전부에서 통행증을 발급하는 부서(2부라고 한다)는 이것을 빌미로 통행증을 신청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다못해 담배 한갑이라도 받아먹고서야 통행증을 내어준다. 얼마나 더러운 것들인지 부모가 사망해서 당장 제사에 가야 할 대상까지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통행증을 제때에 떼주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3일장까지도 다 지난 다음에야 초상집에 들어선다고 한다.

……………………………………………………………………………………………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6/nd99060230.html

*

………………………………………………………………………………………

북한 주민들이 체제 감시기관의 공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어 체제에 반하는 행위는 거의 불가능함을 나타내고 있다.

“짧은 혀 잘못 놀려 긴 목 달아난다,” “입술은 생각을 덮어두는 덮개,” “네가 까불어서 세상이 바뀌나,”

북한 주민은 “자기 등짝도 못 믿는다”는 등의 말을 흔히 한다고 한다. 방에 혼자 앉아서도 김정일에 대한 불평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감시의 위협을 느낀다고 한다.

……………………………………………………………………………………….

[ …..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늘 “어디 가서 ‘말’조심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 ]

……………………………………………………………………………………..

북한에서 ‘보위부’란 저승사자 비슷한 공포의 대상이다. 그쪽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늘 “어디 가서 ‘말’조심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어디 가서 부모가 한 말을 전하다가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예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북 철산의 한 학생은 할아버지가 “남조선 태극기를 가지고 있다”고 떠들다가 선생의 신고로 보위부의 가택수색이 벌어졌고 결국 온 가족이 수용소로 압송됐다.

수용소에 끌려온 상당수의 죄수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남조선이 많이 발전했다는 말을 했는데 남조선 ‘도주’ 기도로 보고돼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김일성이 ‘쥐띠’니까 김정일보다는 인민에게 먹을 것을 잘 물어오겠다고 농담한 점쟁이 할머니도 수용소에 끌려와 있었다.

……………………………………………………………………………………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02/2009040201688.html

[조선데스크] 보위부에 호출됐을 때

강철환 정치부 기자 nkch@chosun.com
2009.04.02

[ …… 대부분은 어린 시절 때부터 말조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한다.

정부에 대한 항의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 ]

김정일 대안세력·사상 마련돼야 혁명 꿈꿀수 있다

[란코프 칼럼下] 10∼20년 기다려야…억압적 조건 여전해

안드레이 란코프 2011-11-29

현대사에서 성공적인 혁명을 지도한 세력은 체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지식계층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흥미롭게 공산주의 혁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산당은 자신을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묘사했지만 공산당 고급지도자들은 거의 다 특권계층 출신들이었다.

레닌은 고위공무원 집의 아들이다.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재정러시아에서 유태인계 지주로 유명했다. 물론 반공민주화 운동 역사에서도 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 1989~90년에 동유럽에서 발생한 반공민주혁명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1960년대부터 공산 정권을 친소련 반민주, 반민족 정권으로 본 동유럽 지식인들은 소련의 국내 위기로 저항할 기회가 조성되자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포스트 스탈린 시대의 소련과 동유럽에서 실시된 부분적인 자유화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20여 년 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대안적 사상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반정권 민주 의식으로 굳어질 수 있었다.

현대 북한의 국내 사정을 보면 위에 언급한 시민 혁명의 조건이 아직 너무 무르익지 않아 보인다. 물론 북한 경제는 ‘고난의 행군’ 시대보다 호전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식량이 모자라지만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생활은 이제 아니다. 역설적으로 부분적인 경제 호전은 김정일 정권의 기반을 강화시키기보다 약화를 불러올 것이다. 주민들이 생존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 문제를 고려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단계에서 혁명이 발생할 조건은 보이지 않고 있다.

첫째, 북한 주민들은 아직 대안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물론 북한에서도 한류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남한에 대한 지식의 유입 및 확산이 세월이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확산은 아직 접경지역과 대도시, 특히 이 지역에 체류하는 청년층들에게 국한된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북한에 비해 잘 산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얼마나 잘 사는지 아직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남한 풍요를 초래한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남한과 해외에 대한 지식의 확산은 북한 정권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려면 10~20년 정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북한 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때부터 말조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한다. 정부에 대한 항의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들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지 않다.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 정권은 주민에 대한 진압을 어느 정도로 완화했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독재국가다.

………………………………………………………………………………

셋째로, 북한이라는 국가는 주민들의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사회 활동을 금지하거나 엄격하게 제한한다.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는 물론이고 시장경제의 권위주의 정권과 달리 북한은 학생 동아리라고 해도 문화 단체라고 해도 자발적으로 이뤄진 단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민 간 수평적 관계 및 네트워크의 형성, 성장을 억제하려고 많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에 자발적인 시장화 때문에 북한에서 장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수평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저항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는 아직 없다.

또한 북한에서 체제를 비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대안적 사상을 창조, 추구하려는 지식인들이나 그들의 단체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보위부를 비롯한 북한 국가 기관이 이러한 활동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서 혁명적인 사상과 세계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

[연말특집] 탈북자들이 전하는 북 실상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5-12-30

………………………………………………………………………………………

한 중년 남성 탈북자와 중년 여성 탈북자는 북한에서 살 때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느냐는 질문에 통행에 자유가 없고 통제 속에 사는 것이라고 들려줍니다.

이 모 : 내가 한 번 움직이자면 적어도 4명에게 승인을 받아야 해요. 첫째 내가 당원이면 세포 비서, 당조직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다음 행정조직의 승인을 받아야 되고, 담당 보위부의 승인 받아야 되고 그리고 경찰의 승인을 받아야 되고요. 적어도 4명 정도의 승인을 받아야 그래야 움직이거든요. 자기네 그 거짓 정체가 들어날까 봐, 사람들을 완전히 거미줄처럼 딱 단속하거든요. 거짓이니까 계속 통제했거든, 그러니까 한 인생을 완전 노예로 만들었거든, 얼마나 황당해요. 그 공포정치가 두려워서 거기서는 감옥 간다. 수용소에 간다. 죽음을 말해요. /

심 모 : 자유가 없다는 거죠. 말할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닐 수 있는 내 두 다리 가지고도 마음대로 다닐수 없는 그런 사회이니까?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한다는 거는 개인의 삶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다 똑같이 표현을 해야 하는 거고, 내가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갖든 상관없이 표현은 똑같이 해야되는 거지요. 한마디 말하면 거짓을 조장하는 거지요. 나의 본심과는 다르게 말해야 된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어느 순간에 내가 내 속에 말이 뚝 튀어나와서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내가 평생 다시 나오지 못할 곳에 정치범 수용소에 가야거나, 또는 내 자녀 내 후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정치적인 올가미를 준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기 삶이 아닌거지요. 그냥 하나의 허울만 있는 살아 있는 로보트 들이라고 해야되나

자신도 탈북자이지만 탈북동포들 돕는 이야기 들어봅니다. 중산층 탈북자가 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김 모: 요세 보니까, 정치적으로 북한을 탈출해서 좀 더 자유스런 곳에 가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중산층들 가운데 북한에서 돈을 가지고 있어도 언제 돈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할지 모르니까 탈북해 나와서 한국에 와서 자유스럽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거의 기획 탈북은 가족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 저희 쪽에 넘어 오다가 엄마가 군인들 쫓으니까? 아이 입을 틀어 막았는데 아이는 질식사로 죽고 두 살짜리 아이가요. 그 엄마가 저희 단체를 통해 구출되어서 태국으로 가고 있어요.

………………………………………………………………………………………..

댓글 쓰기

비회원 프로필 이미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