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향후 수복해야 할 영토로 한반도 전체

2020.08.09 21:31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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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에 발간된 중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중국이 향후 수복해야 할 영토로 한반도 전체가 포함 …….. ]

[기자의 눈] 자유통일로 ‘천년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자!

통일 후 북한 재건 방법, 박정희 새마을 운동에 있다

김필재 기자 2008-10-10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터전으로 1천년 동안 민족의 주체성을 지켜왔다. 이제는 남북한의 자유통일로 앞으로 1천 년 간 우리 민족의 경제활동권역을 만주와 몽골까지 넓히는 ‘제2의 민족 대(大)부흥의 전환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im.pwr.wroc.pl

1950년대에 발간된 중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중국이 향후 수복해야 할 영토로 한반도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국내 학자들과 고위급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이 같은 패권적 속성을 외면한 채 북한에 대한 중국식 개혁·개방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등소평이 주도한 중국식 개혁·개방의 원형이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을 운동의 복사판이었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중국식 개혁·개방의 원형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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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9567

[ …… 中国の中学校歴史教科書には、かつて朝貢貿易を行っていた地域(シンガポールからインドシナ半島全域、タイ、ネパール、朝鮮半島、琉球など広大な地域)は、「清の版図でありながら列強に奪われた中国固有の領土である」と明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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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の中学校歴史教科書には、かつて朝貢貿易を行っていた地域(シンガポールからインドシナ半島全域、タイ、ネパール、朝鮮半島、琉球など広大な地域)は、「清の版図でありながら列強に奪われた中国固有の領土である」と明記されており[3]、中国では、これらの地域を本来の国境とは別の「戦略的辺疆」と呼んでいる。中国政府が東シナ海ガス田問題等の国際問題で発言する「争いのない中国近海」とは、「戦略的辺疆」の内側海域を指しており、中国固有の領土であるこの地域の安全保障・海洋権益は、中国の手により保全すべきというのが、中国の考えである。第一列島線とは、まさに「戦略的辺疆」のラインである。

しかし中国海軍の艦艇建造状況の遅延もあり、第一列島線を2010年までに完成させ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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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손문

[ …… 중국이 상실한 영토는 ….. 한국(高麗)과 대만 …… 버마와 베트남이 있고…더 이전의 것으로는 흑룡강지역과 우수리가 있다 ……. ]

“쑨원은 중화주의적 팽창주의자”-배경한 교수

1999.02.25.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중국이 상실한 영토는 가장 최근의 것부터 말하자면 위해위(威海衛)와 여순(旅順),대련(大連),청도(靑島),홍콩,그리고 광주만 등지가 있고….그 이전의 것으로는 한국(高麗)과 대만,팽호(澎湖)열도가 있으며 그전에 잃어버린 것으로는 버마와 베트남이 있고…더 이전의 것으로는 흑룡강지역과 우수리가 있다”.

왕조국가 시절 한국을 포함해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주변 국가들을 `우리네 잃어버린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중국 중화주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이 말은 현대 중국의 아버지라는 쑨원(孫文.1866∼1925)의 입에서 나왔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왕조를 무너뜨린 쑨원은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겸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을 만난 직후인 1921년 12월에 행한 한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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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428388

[ …… 쑨원(孫文)이나 …. 장제스(蔣介石) 모두 코리아를 중국의 종주권(宗主權)을 되찾아야 할 나라로 인식 ……

……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 중국이 잃어버린, 따라서 앞으로 되찾아야 할 식민지 명단에 포함시켰다.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②조선민족 자치능력 없었나

200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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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 술 더 떴다. 오늘날 중국과 대만 양쪽에서 존경받는 쑨원(孫文)이나 국민당 정부의 총통이던 장제스(蔣介石) 모두 코리아를 중국의 종주권(宗主權)을 되찾아야 할 나라로 인식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1936년 미국의 신문기자 에드거 스노와 회견하면서 코리아를 중국이 잃어버린, 따라서 앞으로 되찾아야 할 식민지 명단에 포함시켰다. 중국은 그때도 코리아를 자기네 속방(屬邦) 정도로 여겼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조선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한 레닌

소련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이 레닌은 모스크바를 찾아온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들이 요구한 액수 이상의 큰 돈을 금괴로 주면서 격려하기도 했으나 그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싸움을 문제 삼아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운동기구)의 ‘코리아국(局)’을 없앴다. 그뿐만 아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반제(反帝)운동에 봉사해야지 자국의 민족주의적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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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822/8097797/1

2012

[ ……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청의 복속국에서 중·일 양국의 공동 보호국이 되었다 …….. ]

중·일 교과서 보니… 한국이 물렁해?

 허은선 기자

 호수 240
 2012.04.25

중국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의 비중은 적다. 중국은 한국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중국과 관련된 사건만 소개하거나 아예 중국사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가령 동학농민운동을 서술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야욕만 강조하는 식이다. 일본의 교과서는 유럽 중심주의적 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시아보다 서구 문명의 비중이 크다.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일제 시대인 1914년 만들어진 세계사 교과서의 틀을 광복 뒤에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마 안 되는 한국 관련 기술에 오류가 많다는 점이다. 무지에 의한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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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 한국사를 왜곡한다. 한국은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청의 복속국에서 중·일 양국의 공동 보호국이 되었다’ 같은 기술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난 2010년 외교통상부는 티베트 관련 기술을 중국에 유리하도록 바꿔달라는 중국의 요구를 여과 없이 수용한 바 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68

2015

[ …… ‘6·25’가 남침임은 …. 북한 국민은 모르고 중국 국민도 거의 모르며 ……..

…… 남침전쟁의 선봉부대로 참여했다가 제대한 조선족 군인은 알지만 …. 이런 말을 공석에서 할 수 없었다. …….. ]

6·25 내전이라니…중국의 또다른 동북공정

정인갑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이사장

2015.07.20

필자는 전번에 쓴 ‘6·25’와 필자 고향마을을 연계시킨 글에 ‘6·25 남침전쟁’이라 표현했다. 얼핏 보기에는 남침이라는 두 글자가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중 양국의 실정을 감안하면 남침 두 글자를 추가하는 시정은 매우 필요하다.

‘6·25’가 남침임은 온 세상이 다 안다. 그러나 북한 국민은 모르고 중국 국민도 거의 모르며 한국 국민도 매우 명석한 것은 아니다. 본문은 중국인의 인식을 중심으로 왜 ‘6·25남침전쟁’이라는 용어를 써야 하는가를 말하련다.

1950년 10월 중국이 북한으로 파병할 때 이렇게 선전했다:

“미제국주의가 남조선 괴뢰 이승만을 사주하여 북침전쟁을 도발하였다. 남조선군이 패배하자 16개국의 침략군을 조선반도에 투입시켰다. 조선반도를 삼킨 후에는 중국을 침략하게 된다. 중국 인민은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여 삶의 터전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抗美援朝保家衛國).”

100만의 중국군은 전쟁 발발 3개월 후에 파병되었기 때문에 남침인지 모른다. 다만 남침전쟁의 선봉부대로 참여했다가 제대한 조선족 군인은 알지만 나라의 공식 입장과 반대되므로 이런 말을 공석에서 할 수 없었다. 또한 친북 성향이므로 사석에서도 이런 말을 아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일관되게 ‘6·25’를 북침전쟁으로 확신하고 있다.

1990년대 중국 학자 선쯔화(沈志華)는 소련 비밀자료를 열독하고 새삼스럽게 6·25가 남침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이내 라는 책을 펴내 남침 내막을 밝혔다(1995). 그 후 ‘6·25’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또 을 펴냈으며(2014), 도 곧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남침 진실의 공개를 되도록 막는 태도이다. 앞의 선쯔화의 책도 중국에서 출판할 수 없어 겨우 홍콩에서 출판됐다. 그의 논문도 영향이 크지 못한 학술지에 발표했을 따름이다. 2000년경 중공당사학회(中共黨史學會)의 잡지 에 ‘6·25’는 남침이라는 문장을 실었다가 당국의 문책을 받았으며 발행금지를 당했다.

지금까지 ‘6·25’에 대한 중국정부의 공식 입장은 1993년 랴우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에 세워진 항미원조 기념탑의 벽에 새겨놓은 글에 표현되어 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 내전이 폭발했다. 전화가 압록강변까지 다가오므로 중국 인민은 지원군을 파병하였다….”

그러므로 남침 내막을 아는 중국인은 일부 정치학자에게 국한돼 있다.

사실 중국이 ‘6·25’에 파병한 결정은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착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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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6·25’를 북침이라고 거짓말한데는 여러 가지 미묘한 이유가 있다. 북한과의 혈맹관계가 깨질까봐, 참전국으로서의 명분 때문에, ‘6·25’참전 100만 중국군인 및 희생자의 정서가 걱정되어서….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였다. ‘6·25’는 냉전시대에 발생한 역사에 불과하다. 중국이 언급한 모든 염려를 감내하고, 뿌리치고 역사의 본래 면모를 회복시킬 때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내전’이란 표현은 아마 중국정부가 고심한 끝에 고안해낸 단어일 것이다. ‘북침’이라면 너무 노골적인 거짓말이고, 그렇다고 하여 ‘남침’이라 할 수는 없고…. 내전은 북침과 남침을 다 어우르는 말이니 틀린 표현이 아니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한국에서 일컫는 ‘6·25전쟁’도 ‘남침’ 또는 ‘북침’의 두 가지를 다 어우르는 표현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6·25’를 한국은 반드시 ‘6·25 남침전쟁’이라 고쳐 불러야 한다. 중국 당국은 자기의 착오를 감추려고 말장난의 용어 ‘내전’을 썼지만 한국은 왜 ‘내전’과 같은 뜻인 ‘6·25전쟁’이란 용어를 쓰는가? 만약 중국더러 남침의 실상을 승인하고 ‘내전’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하면 중국은 이내 “당신네 한국도 ‘내전’ 뜻의 용어를 쓰지 않는가?”라고 반박하면 한국은 말문이 막힌다.

이 명칭의 시정은 한국 국내정치에도 십분 필요하다. 한때 남침이지만 한국군이 3·8선에서 남침을 유인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며 지금도 그 여독이 남아 있다. 한국 역사교육에 문제가 많으며 남침인지, 북침인지 모호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북침을 믿는 자도 있다. 종북자들은 당연 지금도 북한군의 남침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며 걸핏하면 남조선을 초토화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실로 북한의 남침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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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20/20150720006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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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쟁시기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은 선봉부대로 개성을 공략하고 강화도, 금포를 점령한후 계속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의 목포, 광주, 순천을 공략하고 남해안을 에돌아 경상남도의 하동, 진주까지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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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제5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164사단은 조선인민군 12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독립15사단과 협동작전을 벌리며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 7월말, 포항을 점령하였으며 한국군의 최정예부대인 수도사단을 부산지역에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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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직전 조선족들은 조선인민군 제4, 5, 6, 7(12)에 편입되어 38도선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남진을 시작하여 전선의 최전방에서 공격형 전투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대남공격의 제1진 병력에서 조선의용군 사단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

중국에서 건너간 병사들은 대부분 중국내전을 통하여 전쟁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과정에서는 남한군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어려움 없이 남진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제일 뒤늦게 입북하여 중국식 군대의 정체성으로 갈등을 빚어왔던 4사18연대는 서울에 제일 먼저 입성하고 미군부대를 연파하면서 ‘근위연대’ 칭호를 받을 만큼 화려한 전투경력을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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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그후 50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동수의 흑백사진과 비극의 주인공들

04.06.02

조호진(mindl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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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도(77) “1946년 4월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했다. 1949년 7월 북한인민군 6사단 3연대에 편입됐고 1950년 9월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됐다. 1956년 9월 중국으로 귀국했으나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유로 모든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보냈다.”

장수학(81) “독립운동에 가담한 아버님이 친일파의 신고로 1930년 4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1945년 복수를 결심하고 일본 패망 후 잔존해 있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했으나 3개월 후 동생이 찾아와 장남이니 어머니를 모시라고 지휘관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왕청으로 전출되어 정찰병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남한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참전했으나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원군 통역관 반장 임무를 수행했다.”

원용걸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한 뒤 북한 인민군에 편입됐다. 북한 인민군 정예부대요원으로 발탁돼 한국전쟁에 참전, 전쟁 후 북한지역 복구사업에 동원되기까지 8년 정도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서야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부모님과 아들을 위해 헌신한 아내가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민족끼리 총을 겨누며 전쟁을 한 것이 매우 안타깝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기억들로 인해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남북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최기성(73) “연길사범에 다니던 1946년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동북인민연군에 자원입대, 1950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참전해 대구-부산간 철도폭파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매복 국군에 기습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파간첩 교관으로 복무하다 195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 전쟁 당시 싸웠던 곳을 찾아다니면서 말문이 막혔다. 적국이었던 남한은 잘사는 반면, 젊은 날 목숨을 바쳐 싸웠던 북한은 오늘날 굶주림과 가난으로 중국으로의 탈북자들이 늘고 있으니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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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하 “참전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갔다. 1951년 연길에서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 인민지원군에 입대했으며 이때 함께 참전한 마을동료 13명 중 12명이 전사했다. 강원도 금성에서 조선족 동료들과 함께 미군 3명을 생포해 3급 훈장을 받고 1954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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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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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정치지도자 지지도

[ ….. 이승만 32%, 김구 22%….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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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두 차례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우파 정당은 43%·40%였던 데 비해, 좌파 정당은 33%·31%에 그쳤다.

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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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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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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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

(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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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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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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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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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2.

[ ……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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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또는 미 과거의 업적이나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蘇측이 비판하는 바 많은 남조선미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주저치 않는 바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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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언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12월 28일

조선파견 UN위원 중국대표 劉馭萬(유어만) 환영회는 26일 하오 6시부터 국제외교연구소 주최로 天香園에서 성대히 열리었는데 석상 劉씨는 UN위원단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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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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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18. 평양

[ …….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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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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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6. 함경남도 북청

[ …..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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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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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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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

가작 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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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3881&C_CC=AZ

광복 70주년 현대사 체험수기 심사 後記

[ …….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상의껏 경제재건을 위하야 노력하야 주십시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 ……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 ]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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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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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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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호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⑤-人民軍 참전자들의 證言

『환영 인파를 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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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軍의 시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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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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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199908100024

1950.6.28. 서울

[ ……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 ]

2008.06.01 통권 585호(p550~567)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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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8일 수요일, 서울 함락

새벽 3시경쯤,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이며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침에 들으니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근심 어린 쑤군거림이 들린다.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이 다리가 끊어져 물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600여 명과 차량 50여 대가 강으로 떨어져 대부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리가 난 것 같다. 서대문에 있는 조흥은행에 갔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오전 중에 서울 시내가 거의 다 함락됐다고 한다. 앉아서 날벼락 맞은 격이다.

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전예용 부시장 집은 인민군 정보원인 듯한 남녀 5~6명이 서성대며 주위를 살피고 뭔가 정리하는 것 같다. 그 집을 빼앗아 본부로 쓰는 듯하다. 호신용 권총만 찬 채 아래 위를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우리집 뒷산으로부터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죄수 10여 명이 떼지어 오고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폭파되면서 탈출해 뒷산을 넘어 북아현동으로 온 것 같다. 그들은 거칠게 주민들은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다 같이 김일성 장군 만세와 인민공화국 만세를 힘차게 부릅시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한다. 주민이 우물우물하고 망설이자 소리를 지르며 “이 간나새끼들 왜 안 따라 부르느냐.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뭐가 불만인가!” 하면서 죽일 것 같은 몸짓으로 만세를 강요하고 인공기를 흔들어댄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가늘게 만세를 외치고 인공기를 흔들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자치대원이란 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쌀 있느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하겠다. 숨기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니 정직하게 신고하길 바란다”라고 위협한다. 조사해 가더니 저녁에 와서 그 쌀을 다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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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

…..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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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연산 황룡재를 넘어 진산 경유 남진하는 북한군 탱크 부대였다. 아마도 부락민 전부가 대환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으나 누구 하나 반기는 기색 없이 특히 젊은이는 없고 대부분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있자 한 병사가 탱크위에서 “여러분 여기 국방군 간나새끼 없이요? 우리는 여러분 해방시키러 왔시오”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어왔다. “없어요”.하고 대답하자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하며 노래를 부르고 만세를 불렀다. 섬뜻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탱크가 20여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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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yhtv.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

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1950.7월-8월 중순 중공군, 제4야전군 18개사단 25만 여명으로 동북 변방군 편성, 만주일대 배치

1950.10.1. 국군, 38선 돌파 북진개시

1950.10.7. 인민해방군 4만여 티베트 침공

1950.10.19. 유엔군 평양 점령. 이날 밤 중공군 압록강 건너기 시작

1950.10.25. 중공군 공세 시작
1950.10.26. 6사단 7연대 압록강 초산 도달

1950.12.4. 평양철수
1950.12.7. 흥남철수작전 시작.

1950.12.20.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 ……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 …….. ]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0년 12월 21일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있다. 조국은 지금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만주벌판에서 꿈틀거리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이 돼지의 무리가 삼천리 강토를 짓밟고 3천만 민족의 앞가슴에 청룡도를 내밀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당 태종과 수 양제의 백만 침략군을 무찌른 선조의 영광과 5천년 불패의 역사가 연면히 계승되어 우리의 혈관을 줄기차게 흐르는 조국애로 총단결 총궐기하여 손에 손에 정의의 총칼을 들자!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민족의 기백은 이제 전 민족을 궐기시켰으니 일찍이 민주주의 생활의 자유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온 우리 한국의 전 언론인도 위기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하여 전선에 궐기할 때는 왔다.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공산당 전제하에서는 늘 헐벗음과 굶주림과 노예화의 길 밖에 없으니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서도 이 空前絶後의 위기를 극복하여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의 전 언론인은 궐기하였으니 어제 20일 시공관에서 열린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자유옹호의 굳은 결의 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유엔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유엔군총사령관 및 일선 장병에게 각각 별항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었다. 이날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계획된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회순을 원만히 진행시켰다.

▵개회 ▵주악(서울시 음악대) ▵묵념(전몰 장병에게) ▵개회사:서울신문 吳宗權 ▵격려사:국방장관(張차관 대독), 공보처장(李차장 대독) ▵선언 及 메시지:1. 선언(동아일보, 金三奎), 1. 유엔총회에(조선일보, 成仁基), 2. 미 대통령에(연합신문, 林元圭), 3. 맥원수에(경향신문, 민재정), 4. 일선장병에(승리일보, 具常) ▵기념강연(정훈국장 이선근) ▵격려사(시경국장 李益興), 동(유엔 공보관 메레델) ▵주악 ▵만세삼창

▹선언문

이 나라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고 확립하는 것을 유일한 사명으로 하는 우리 언론인 일동은 6·25사변을 계기로 이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더욱 통감하였고 중공의 도발적인 참전에 의하여 전 인류가 막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 때에 인류의 운명을 살육과 공포와 노예의 함정으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단연코 사수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지난 10월 하순경 중공이 월경 침입하려 할 때에 유엔과 미국은 국경지대에 있는 중공의 권익을 존중하겠다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한 침입으로 허다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한국전쟁을 국지화하려는 유엔의 기본방침에 의하여 한국정전안이 52대 2의 절대다수로 유엔 총회를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강부회의 요구조건을 고집할 뿐 하등의 반성도 보이지 않음은 적색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괴뢰성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는 바이며 동시에 이러한 평화교란자를 지구상에서 말살해 버리기를 전세계의 민주여론에 호소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세계 민주우방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경민이 뜨거운 동족애에 입각하여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불타는 애국심을 12분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먼저 전 언론인이 사소한 이해와 구구한 소아에 국척함이 없이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총 단결을 垂範함으로써 衝天의 火柱가 되어야 할 것을 엄숙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언론계 자체의 권위를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민주국가의 권위를 위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성실성과 권위 없이 3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중대한 시국을 돌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

동지 제군!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할 때는 왔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동포를 기아와 결핍에서 구출하는 자유를 위하여,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한 보도와 비판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총 궐기할 때는 왔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노력과 성의와 정열을 경도하는 것만이 조국과 인류를 현재의 위기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기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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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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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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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악리에 개막되어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강(강창희)씨의 사회사에 이어 조(조광섭)씨가 국제정세보고를 하였고 유(유??)씨가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여 팽배하게 일어나는 북진통일의 국민적 기개를 다시 한번 고창하였다.

이어 윤(윤재욱)씨와 남(남송학)씨가 열렬한 궐기사를 하여 대회회중을 격려하자 회중은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어 이대통령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그리고 유엔총회의장 피어슨씨 및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멧세-지 낭독이 있었고 ‘속지 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등 열렬한 구호를 부르짖은 다음 국회 국방위원장 임(임흥순)의원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북진통일 만세로 대회는 일단 끝을 막고 참집하였던 회중은 ‘휴전반대’ ‘북진통일’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일대 데모로 들어 갔다.

선언서

8년전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3천만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강토는 양단되어 드디어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한 민족의 수란과 희유의 참화를 당하고 있으며 1951년 소련대표 마리크의 휴전회담 제안은 침략자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고귀한 젊은 피들을 헛되게 하고 있다. 최근 적색제국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의 독아를 닦으면서 가장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국제정국을 현혹케 하고 있으며 이에 수반하여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 총회를 비롯하여 우방제국지도자가 또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됨은 심히 유감된 사실이다. 오늘 소위 판문점회담이 재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 우리는 언제 까지나 외세의 농락에 유린될 수 없고 외세의 과오로 기인한 비극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 정히 중대 간두에 선 이 순간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북진통일하는데 총궐기할 것을 신명 앞에 엄숙히 맹세할 뿐이다. 우리 천손 만대의 경복과 조국의 영예와 자유를 위하여 한사코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우리 대한민국주권을 무시하는 여하한 국제협상도 절대반대하며 UN제국은 우리 민족의 절호에 귀를 기우려 정의를 살리기를 정중히 선언한다.

4286년 4월 26일

북진통일 서울시민궐기대회

구호

1 속지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2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3 청년들아 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하자

4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5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53.4.30

[ …….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 …….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 ……. ]

경찰, 휴전반대 궐기대회 참가 연인원 통계 발표

평화신문 1953년 5월 4일

[부산] 통일 없는 휴전은 우리겨레에 주검을 갖다 주는 것이라고 절규하여 방금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궐기대회가 개회되고 있거니와 30일 현재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동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각사회 단체 및 각지구의 대회에서의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에 달하고 있다.

1953.5.29. 경향신문

북진통일에 접대부들 궐기

긴급 국무회의로 북진의 소리도 드높은 27일 파고다공원에서는 종로구 요식업자 접대부 들의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가 벌어졌다.

통일이 아니면 죽엄을 달라! 통일 없는 휴전은 6.25의 재판이다! 고 외치는 구호도 씩씩하게 대회끝에 시가행진에 들어가 이마에 수건을 힘있게 싸맨 1천여 접대부들

종로로부터 세종로등 시내 중심가로를 일주하였는데 이날만은 이들도 이나라 여성의 ?된 가치를 시민들 앞에 남김없이 발휘하였다.(사진은 시가행진하는 접대부들)

1953.6.9. 진명여중고

[ ……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

….. 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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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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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1. 부산 60만 시민궐기

[ ……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 ]

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 상가점포 및 다방 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 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남녀학도 10여 만명 ……

…..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 …. 데모행진 ……

…..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 ]

1953.6.12. 동아일보

10만 학생도 일대시위

상이병은 도청에서 대좌

또한 이날 전시내의 67개교 고등학교 학생과 10여 대학교의 남녀학도 10여 만명은 하오 1시 대신동을 비롯하여 영도 초량 충무로 서면 동래 등 6개 지구로 나누어 각기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를 개최하고 동 1시 40분경 부터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데모행진을 감행하였다. 전기 10만명 이상의 데모 행진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순정한 기개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남음이 있었고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한편 수천명의 상이군인들은 행진끝에 임시 중앙청내에 몰려들어 정부 및 입법부의 책임자를 만나 재기봉공의 각오를 표명하는 멧세-지 전달과 명확한 정부의 태도의 천명을 듣고저 하오 2시반 현재까지 광장에 주저 앉고 있다.

1953.6.11. 홍성군 이재명

[ …..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 …..

…..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 ……. ]

1953.6.20. 경향신문

휴전반대의 불꽃

홍성 이씨는 통분 끝에 자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한 휴전은 결사반대한다고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은 방방곡곡에서 들려오고 있다.

지난 13일 이리 시민들은 역전광장에 시민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성대히 거행하는 한편 야간에 횃불 행진도 하였다.

(안중) 당지 평태군내 현덕 포승 청북의 3개면에서는 지난 11일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군청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남양) 남양면민들은 지난 13일 남양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성대히 거행하고 시위 행진을 행하였다.

(춘천) 춘천시 춘성군민들은 지난 13일 춘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고 이대통령을 비롯한 각요로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였다.

(예산) 당지 시민들은 지난 13일 덕산에 주둔한 유엔군 통신부대 근방에 모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홍성) 당지군내 11개면에서는 지난 11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과 포로강제송환에 울분한 홍성군 장곡면(홍성군 장곡면 산성리53)에 거주하는 이(이재명=27)씨는 궐기대회 선두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라고 통탄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하여 통일을 애원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기 이씨는 청양 경찰서에 근무 당시 보?한 미제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이다.

1953.6.18.

[ ……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 ……..

……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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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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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8.

반공포로 석방

발생원인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의제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협상은 「휴정협정」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기로 일찍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포로 송환에 관한 협상은 1953년 6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송환원칙을 두고 유엔군측과 공산측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던 포로송환 문제는 귀한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했다.

내용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때 소련 정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상이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강제적 송환원칙’에 반대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서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17

1953.6.19.

[ ….. 중학생 1만여명은 ……

…..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
….. 열광적인 시위를 …….. ]

1953.6.21. 동아일보

반공포로석방 지지

서울서 수만 남녀중학생 시위

[ 서울분실발 ] 19일도 반공포로의 석방을 지지하는 일대 시위행렬이 수만명의 서울시민과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날 상오 9시 서대문 일대 중학생 1만여명은 동지구 배재중학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앞을 비롯한 시내 중심지 일대에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등의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열광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신 숙명 수도 창덕 계성 동성 보성 등 7개 남녀중학생들이 궐기하여 애국포로석방지지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5시간에 걸쳐 시내일대에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53.7.8. 경향신문

비장한 우중시위

6일 2만여 학생, 시민들 단행

전국적으로 홍수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폭우 속에도 불구하고 6일 2만5천여 명의 서울 시민 학생들은 시내 수개처에서 봉기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 데모의 비장한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상오 9시부터 성북구민 8천7백명 마포구민 1만명과 용산구민 3천명 성동 10개동회 5천5백여명이 궐기하여 비장한 우중시위를 단행하였다.

한편 시내 경서 선린 용산 상명 계성 보성 동성 성동 덕수상업 한영 수도여중 등 12개교 남녀학생들도 비바다로 화한 장안 거리에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2017.12.15. 문재인

[ ……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 ]

[ …..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

…..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 ]

[전영기의 시시각각] 한국은 작은 나라? 누가 연설문 썼나

[중앙일보] 2017.12.18

전영기 기자

문 대통령의 국격비하 ‘베이징대 연설’
북한 군가 작곡한 정율성 추앙 발언도

. 대한민국 헌법 66조는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헌법은 전문(前文)과 4조 두 군데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나라라고 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한 것은 그가 한국의 국가원수,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자유와 민주가 숨 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즉 이념과 역사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한국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난 15일 베이징대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은 중국에 대한 자기 비하와 사대(事大)가 흘러넘쳤다. 이게 한국 대통령의 공식 발언인가 싶을 정도로 헌법정신이 망가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에 함께할 것”이라는 대목이다. 한국이 왜 중국의 꿈에 함께해야 하는지도 수긍할 수 없지만 ‘작은 나라’라는 표현은 치명상에 가깝다. 이 말은 “저는 시진핑 주석에게서 중국의 통 큰 꿈을 보았다” “법과 덕을 앞세우고 포용하는 것은 중국을 대국답게 하는 기초”라는 ‘중국 대국론’을 편 뒤 나왔다.

여기서 ‘작은 나라’는 인구나 면적이 아니다. 맥락상 ‘한국 소국론’이다. 국가의 꿈과 가치, 지도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비해 작다는 얘기다. 하지만 1인당 GDP와 경제 실력, 과학기술력,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이나 정신·문화·종교적으로 누리는 가치, 인권·법치·3권분립과 표현·양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수준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큰 나라다.

중국인들은 대국의 꿈에 한국 대통령이 책임 있는 자세로 동참하겠다는 다짐을 들으면서 가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대한민국 탄생 70년간 이번처럼 대통령이 소국이라 스스로 낮춰 부르고 상대를 대국으로 우러른 적은 없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슨 이런 사대가 있나. 자유민주의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문 대통령한테 무슨 근거로 공산주의 중국에 가서 조국을 ‘작은 나라’라고 비하해 5000만 국민에게 수치심을 안겼는지 헌법적 책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노영민 중국대사가 시 주석한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쓴 게 논란이 되고 있다. 만절필동은 황허의 강물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천자를 향한 제후의 깊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선조가 명나라에 숭배와 감사를 표현할 때 썼다고 한다.

다시 문 대통령의 연설로 가 보자. 그는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문의 작성자는 정율성이 북한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정율성은 1950년 북한의 6·25 남침 때 중국 팔로군에 섞여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과 싸우고 조선을 지원함)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네’ 같은 숱한 전쟁 노래를 만들어 김일성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율성이 사회주의자로서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대통령의 연설문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대신 대한민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적화(赤化)해 자유민주의 씨를 말리려 했던 김일성 측근을 영웅으로 드높였다. 이 끔찍한 국격의 추락과 정체성의 파괴, 누가 책임질 것인가.

*

2004.9.17. 전대협동우회

중국(20.85), 미국(6.9%)

[ ….. 350여 명의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

…… 전대협 출신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0.85), 미국(6.9%), …… ]

[ …. 金日成원전을 읽으며, 북한 주도 통일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 ]

추적) 盧정권 내 主思派 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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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출신들 청와대 등 대거 포진

주사파에 장악됐던 전대협 출신들은 現정권 실세로 부상했다. 열린당 내에는 12명의 국회의원(1기 이인영·우상호·김태년·이철우 前 의원. 2기 오영식·백원우·정청래·최재성. 3기 임종석·복기왕·이기우·한병도)이 배출됐다.

인터넷매체 데일리안은 2004년 11월18일 350여 명의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보도했었다. 기존 언론 등을 통해 확인된 대통령 측근의 전대협 출신들은 아래와 같다.

《김은경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 비서관, 서양호 대통령직속 동북아시대위 자문위원, 최인호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 김성환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 송인배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김만수 前 청와대 대변인, 여택수 前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한주형 前 청와대 국민제안비서관실 행정관, 유송화 前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실 행정관, 이승 前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강현우 국회의장 기획총괄비서관, 이재경 열린당 원내공보실장.》

최인호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은 국보법철폐-미군철수-연방제 등 북한의 대남노선을 주장해 온 전국연합 내 부산연합 조직국장(93~95)을 지냈으며, 김창수 통일부 사회문화교류본부 협력기획관(3급. 내정) 역시 전국연합 정책실장, 민화협 정책실장 등을 지냈다.

전대협 출신들은 과거의 이념적 세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2004년 9월17일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 의뢰해 전대협동우회 회원 202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대협 출신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0.85), 미국(6.9%), 러시아(4.5.%), 일본(1.0%)을 들었다. 일반 국민이 미국(38.3%), 중국(23.8%), 북한(10.6%). 일본(9.7%), 러시아(4.9%)를 들었던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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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4992&C_CC=BJ

200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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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0~21. 시진핑 북한 국빈방문

[ ….. 지난 70년간 우리는 한배를 타고 비바람을 헤치면서 꿋꿋이 전진해왔습니다. ……..

…… 중조친선이라는 큰 나무가 …. 영원히 푸르청청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 ]

시진핑주석 노동신문에 기고 … 중조친선계승강조

 송재호  2019.06.19

노동신문은 19일 중국 시진핑주석의 기고 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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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친선을 계승하여 시대의 새로운 장을 계속 아로새기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습근평

올해는 중조외교관계설정 70돐이 되는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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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두 당, 두 나라 로세대령도자들은 공동의 리상과 신념, 두터운 혁명적우의를 간직하고 손에 손을 잡고 전통적인 중조친선관계를 마련하여 우리에게 공동의 귀중한 재부로 물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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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0년간 우리는 한배를 타고 비바람을 헤치면서 꿋꿋이 전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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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중조 두 당의 굳건한 령도밑에 두 나라 인민들은 외세의 침략을 공동으로 반대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뿐아니라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사업에서도 호상 신뢰하고 지지하며 서로 도와주면서 깊고 두터운 우정을 맺었습니다.

이 우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굳건하며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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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위대한 친선이 있네

우리에게는 공동의 리상이 있네

우리의 단결은 더없이 굳건하여라》

《중조친선의 노래》가 전해주듯이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 두 당, 두 나라, 두 나라 인민들은 전통적인 중조친선을 훌륭히 계승하고 훌륭히 빛내여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조선동지들과 함께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새시대에 중조관계가 풍랑을 헤치고 힘차게 전진하도록 추동할 것입니다.

나는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은 중조친선이라는 큰 나무가 반드시 무성한 가지와 잎을 펼치고 영원히 푸르청청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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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중 두 나라의 대미 공동전선이 확인되었다’ ……. ]

조선신보 “북중 친선의 핵, 사회주의”

김영란 기자
2019-06-24

이번에 진행된 북중 정상회담으로 ‘북중 두 나라의 대미 공동전선이 확인되었다’고 조선신보가 주장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회 기관지인 가 23일 “세계에 과시된 조중 영도자들의 동지적 신뢰 유례없는 불변, 불패의 친선관계”라는 기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

매체는 이번 시진핑 주석의 북 방문을 통해 전 세계는 “반제자주와 사회주의를 위한 공동의 투쟁에서 뜻과 정으로 맺어진 두 나라 최고 영도자들의 유대”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매체는 시진핑 주석을 맞이한 북에서는 둘도 없는 광경들이 벌어졌는데 특히 금수산태양궁전 마당에서 진행된 환영 행사 의미를 강조했다.

금수산태양궁전 마당에서 환영행사가 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 수령들의 뜻을 받들어 역사의 온갖 돌풍 속에서도 자기의 본태를 지켜온 조중친선 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강화, 발전시키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매체는 강조했다.

매체는 김정은 위원장이 환영연회에서 사회주의가 북중 친선의 변함없는 핵이며 힘을 합쳐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빛내어가는 데 북중 친선의 특수성과 불패성이 있다고 언급한 것을 강조했다.

하기에 이번 시진핑 주석의 방문을 환영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의 제목이 ‘불패의 사회주의’로 진행되었다고 매체는 주장했다.

한편, 매체는 시진핑 주석이 이번 방북에 앞서 노동신문에 기고한 글 마지막 부분 “중조친선의 노래”를 언급한 것은 1950년대 공동의 적을 반대해 한 전호에서 싸운 ‘항미원조 보가위국’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북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매체는 이번 시진핑 주석의 북 방문을 계기로 현 정세에 북중 두 나라의 대미 공동전선이 확인되었다면서 “조중단결의 공고성을 과시한 평양에서의 수뇌상봉과 회담은 미국 대통령에게 3차 조미 수뇌 회담개최와 관련한 용단을 촉구하는 외교적 공세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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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jajusibo.com/a.html?uid=46072&sc=&sc2=

‘전쟁 자동개입’ 우호조약 강조하고 나선 북-중 속내는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2019-07-11

시진핑 방북 때 김정은에 “안보 우려 해결 돕겠다”
북한 인민보안성 차관급, 시진핑 측근 만나 탈북자 단속 협조 요청한 듯

북한과 중국이 전쟁 발발 시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 58주년을 맞아 당, 정부, 경찰 분야 고위급 교류를 가속화하고 있다.

1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세월은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조중(북-중) 두 나라 인민의 운명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도 평론에서 “조약의 원칙과 정신에 따라 북-중 양국이 서로 지지하고 밀접하게 협력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 조약은 조약 당사국이 다른 국가의 공격을 받아 전쟁이 발생하면 조약의 다른 당사국이 바로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내용의 ‘전쟁자동개입조항’을 담고 있다. 즉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받으면 중국이 바로 참전해 북한과 함께 미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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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전격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안보와 발전 우려를 해소하는 데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밝혔다. 북-중이 상호원조 조약을 다시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이 조약을 고리로 중국이 북한의 안보 보장에 기여하겠다는 점을 내세우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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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11/96435542/1

* ‘조·중 우호협력 및 호상원조 조약’

[ …..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 및 원조를 제공 ……..

….. 체약 쌍방이 수정 또는 폐기할 것에 관해 합의하지 않는 한 계속 유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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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61년 김일성이 직접 모스크바와 북경을 방문하여 7월6일에는 ‘조·소 우호협력 및 호상원조 조약’을, 7월 11일에는 ‘조·중 우호협력 및 호상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두 조약은 다같이 체약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거나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면 체약 상대국이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 및 원조를 제공하도록 규정함으로써 군사동맹조약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소 조약은 조약의 효력에 관해서 10년 유효의 시한적 조항을 두고 있으며 조약체결 일방이 시한만료 1년전에 해약 희망을 표시하지 않으면 5년간 효력이 지속되고 똑같은 절차로 유효기간을 계속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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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조·중 조약은 체약 쌍방이 수정 또는 폐기할 것에 관해 합의하지 않는 한 계속 유효하도록 무기한 효력 조항을 두고 있어 어느 일방이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여전히 군사동맹조약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유사시 북한에 대한 중국의 군사 개입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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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25일부터 7월 27일(휴전협정일)까지 ´미제 반대투쟁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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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미제가 일으킨 북침전쟁´

북한의 6.25 전쟁 교육은 철두철미 반제(反帝) 반미(反美) 계급교양이다.

북한 소학교 교과서에는 “6.25전쟁은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 괴뢰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못박고 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5시, 불의에 38선을 넘어 이제 막 태어난 공화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이날을 맞아 북한당국은 6월 25일부터 7월 27일(휴전협정일)까지 ´미제 반대투쟁의 날’을 제정하고, 당, 군, 주민들이 모여 복수모임을 다지도록 한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대표들이 차례로 나서 목이 쉬도록 외치는 ‘미제 타도’의 구호와 거리마다 반미를 선동하는 대형 포스터와 구호들이 내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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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기자] 나는 북한에서 6.25를 이렇게 배웠다

By DailyNK –
2006.06.23

2019.7.10.

민주연구원, 중국 공산당 당교와 교류 협약

2019.07.10.

(베이징=연합뉴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왼쪽)이 10일 베이징에서 리지 중국 당교 부교장과 교류 협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두 기관은 지속적인 정책 교류와 공동 연구로 양국 간 이해와 신뢰를 증진하고 양국관계 발전에 기여하기로 합의했다. 중국 공산당 유일의 공식 교육 연수기관이자 싱크탱크인 중앙당교가 한국의 정당 싱크탱크와 교류 협력 협약을 체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9.7.15

[ …… “전남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 ……..

…… 조국 민정수석도 동학 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소셜미디어에 …….. ]

[ ….. 8개월간 수수방관하면서 일을 키웠다. …….. ]

[사설] ‘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

조선일보

2019.07.15

한·일 간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차장이 귀국길에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뭉쳐서 이 상황(일본의 보복)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애초 기대했던 미국의 중재는 확답을 얻지 못하고 ‘국채보상운동’이란 110년 전 운동을 꺼냈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도청에서 “전남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했다. 한·일 충돌을 염두에 두고 420년 전 ‘이순신 장군’을 불러냈다. 조국 민정수석도 동학 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외교 갈등 해결 대신 반일 감정에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다.

일본의 보복까지 부른 한·일 갈등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비롯된 외교 문제다. 정부가 미리 나서 일본 측과 대화하고 해법을 만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일이다.

‘삼권 분립’을 이유로 8개월간 수수방관하면서 일을 키웠다. 정부가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해 반도체 산업과 기업들에 큰 피해가 생기게 해놓고는 100년 전처럼 일본과 싸우자고 한다. 여당의 ‘일본 보복 대책특위’ 위원장은 “의병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라고도 했다. 지금이 외교 갈등을 ‘의병’과 ‘죽창’으로 푸는 시대인가. 2011년 중·일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충돌했을 때 중국이 공산당 조종 아래 일본 제품을 불태우는 등 감정 대응을 했다가 국제 사회의 지지만 잃었다.

민간 차원에서 일본 규탄 움직임은 일어날 수 있다. 일본이 근거 없이 ‘한국이 독가스 원료를 북에 넘겼다’고 하고 우리 협상단을 의도적으로 홀대한 것이 민심 악화를 불렀다. 일본산 맥주·의류 판매가 줄고 일본 여행 취소 문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국익을 따져야 할 정권이 도리어 감정 대응에 앞장서면 갈등을 격화시키고 일본에 빌미를 줄 수 있다. 정부 차원의 반일 공세로 일본에서 반한(反韓) 감정이 더욱 확산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일 청산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3·1절 기념사는 원로 진보 학자로부터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란 지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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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4/2019071402041.html

2020.7.

“미국과 싸워 이긴 전쟁”…中, 6·25 참전자에 70주년 메달 준다

조선비즈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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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영 신화사는 2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장(기념 메달)을 수여한다”고 보도했다.

참전 군인과 전쟁 중 의료·철도·운수·통역·휴전회담 참가·민병·민공·신문기자·작가·촬영 업무자, 1953년 7월 휴전 후 1958년 10월 지원군 전체 철수 때까지 북한 생산과 건설 회복을 도운 사람 중 생존자가 메달을 받는다. 올해 1월 1일 이후 세상을 떠난 사망자도 메달을 받을 수 있다. 실제 메달 발급은 10월부터 이뤄진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과 싸워 이긴 전쟁으로 묘사한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자원해서 참전해 북한을 도왔다는 의미로 ‘인민지원군’이란 표현도 쓴다. 승리만 알았던 미국이 항미원조 전쟁에서 중국에 밀려 처음 패배를 당했다는 게 중국의 주장이다. 중국 중학교 교과서엔 항미원조 전쟁 승리로 중국의 국제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항미원조 전쟁 참전자에 대한 기념 메달 수여는 미국의 공격에 맞서는 중국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미국이 무역, 첨단기술, 국가안보, 군사 등 전방위적으로 대중 견제 조치를 내놓는 상황에서 항미원조 승리 정신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며 “중국은 여전히 미국의 침략을 부숴버릴 자신과 결의가 있다”고 전했다.

07 2020 MAGAZINE

이슈분석

중국 교과서에 실린 ‘6·25전쟁’ 왜곡

“미국이 한반도 내정 간섭을 위해 出兵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 ‘6·25전쟁’을 한국 內戰으로 표현

⊙ 미국 침략자들의 정의에 타격을 준 사건
⊙ 중국 인민공화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졌다며 자화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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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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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으로부터 제공받은 《보통고등학교 표준 역사 교과서, 중국근현대사》와 《중국근현대사 개요》를 분석했다.

중국의 고등학생들 학습 교재인 《보통고등학교 표준 역사 교과서, 중국근현대사》는 과정교재연구소가 집필했고, 인민교육출판사가 출간했다. 교과서는 ‘6·25전쟁’(128페이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1950년 6월, 조선 내전(內戰)이 폭발했다. 미국은 조선 내정 간섭을 위해 출병했다. 미국군 위주로 구성된 소위 연합국군(聯合國軍)은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중국 압록강변까지 태워왔다. 미국의 전투기는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중국 동북 국경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고, (미국) 군함은 타이완 해협으로 왔다. 미국의 침략 활동은 중국의 안전을 엄중히 위협하는 것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지칭)은 중국 정부에 출병(出兵) 원조를 요청해왔다. 미국의 원조에 대항하기 위해 또 우리의 국가와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1950년 10월, 펑더화이(彭德怀) 중국 사령관이 조선을 넘어 조선 주민과 함께 미국 침략자들에게 공동으로 저항했다.

미국은 감히 중국이 출병, 참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연합국군의 맥아더 총사령관은 2주 내에 전쟁을 끝내고 미국에서 성탄절을 보내기 원했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오고, 적군에게 예상치 못한 타격을 주었다.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군은 함께 전쟁하여 미국군을 38선 부근까지 몰아 돌려보냈다. 이후 중조군민(중국·북한 군인과 민간인)과 미군은 전쟁 겨루기를 반복했다.

중국인민지원군들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고 항미원조 전쟁 중에 눈물과 노래로 기릴 만한 영웅들이 많이 솟아 나왔다. ‘죽음을 불사하고 사수하는 것을 명령으로 받드는 ‘강치롄(鋼七連)’ 연대는 자신의 몸으로 적군 기관총구를 막아냈다. 또 이들은 군율(軍律)을 엄격히 지켰는데 자신이 불에 탈지언정 적에게 목표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 예다.

중조군민의 용감한 전투로 인해서 1953년 7월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휴전협정에 사인했고, 중국인민지원군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항미 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군대가 가진 ‘미국 불패(不敗)’라는 승리의 신화를 깬 것과 더불어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 위상을 높여준 사건이며, 중국의 경제 발전과 사회 혁명을 부흥시키는 데, 안전한 발판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의 침략을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내전’이라는 해석

중국이 바라보는 큰 맥락은 “6·25전쟁은 한국에서 일어난 내전인데 미국이 이에 간섭하고자 전쟁에 개입했고, 중국은 북한이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첫 제목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문구까지 중국의 미국에 대한 반감,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으로 점철돼 있다. ‘팩트 왜곡’과 ‘자의적(恣意的) 해석’이 눈에 띈다.

중국 역사 교과서의 가장 큰 왜곡은 6·25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 부분이다. 내전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서로 다른 계급 또는 계급동맹군 간의 무력 투쟁이다. 피지배 계급이 무장반란을 통해 정치권력을 탈취하는 등의 행동이다. 또 하나는 동일 계급 내의 두 분파 간에 일어나는 무력 투쟁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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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 박사의 얘기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은 한 민족이 해방되지 않은 다른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이유는 아직 해방되지 못한 남한을 해방하고자 전쟁을 했다는 것, 곧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겁니다. 고로 전쟁이 침략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따라 강탈된 상태에 있는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남침이 불가피했으며, 6·25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는 시각입니다. 북한의 침략 전쟁을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는 것입니다.”

― 내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미국의 개입을 부적절하게 보는 것입니까.

“내전은 제3자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어떤 국가의 침략에 의해 보편가치, 자유, 민주, 인권이 다른 국가에 의해 유린당할 때 다른 국가가 그 나라를 지원하거나 도울 수 있는 것이 유엔(UN) 헌장입니다. 그런데 6·25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면, 유엔군이든 미국, 제3의 국가가 참전한 것은 내전 국가에 간섭한 것이 됩니다. 그 국가가 치르는 전쟁에 제3자가 개입한 것으로, 따라서 그 제3자의 침략 행위로 여깁니다. 북한의 남한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 등 유엔군의 참전을 침략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노무현·강정구·이재정·문재인은 같은 선상에서 6·25 바라봐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좌파 시각은 2000년 중반부터 논란거리였다.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前) 대통령은 지난 2006년에 캄보디아에서 열린 동포 간담회 자리에서 “우리가 옛날에는 식민 지배를 받고 내전도 치르고 시끄럽게 살아왔는데 대통령이 돼서 보니 여러 나라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6·25전쟁 전문가들은 이 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주로 북한과 일부 좌파 성향 학자의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청와대는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음 달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6·25를 ‘전면적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좌파들의 수위는 이즈음 더욱 높아졌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는 2005년 신문 기고문에서 “6·25전쟁은 내전이나 통일 전쟁이며, 전쟁 주범은 미국과 주한미군”이라고 표현했다.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6·25를 남침, 북침 중 하나로 규정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한술 더 떠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나는 전쟁 중에 피란처에서 태어났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내전인지, 북한의 침략전인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를 통해 사실로 입증된 상태다. 전통주의 시각에서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공격적,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과 김일성의 대남(對南) 적화 야욕이 불러일으킨 북한의 침략전이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이를 자세히 뒷받침한다.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며, 스탈린도 김일성이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9년 3월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군이 개입하기 3일 전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고, 남한 내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했고, 중국공산당으로부터 5만명의 조선의용군을 지원받은 것으로 적시돼 있다.

그럼에도 중국은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의 첫 문장에 버젓이 ‘조선 내전’이라고 적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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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어

중국 교과서에서 6·25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함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를 간섭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7함대가 타이완해협으로 온 것은 중국의 안전을 위협한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중국 교과서에는 6·25전쟁 참전국을 ‘미국군 위주로 구성된 연합국군’이라고 칭한다.

중국 교과서는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스스로 표현)이 6·25전쟁에 계획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도움을 청해 한반도로 출정했다”고 기술했다. 북한이 중국에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자신들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의 얘기다.

“1950년에 북한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중공군 3, 4사단 등 3개 이상의 사단이 이미 조직돼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세계 공산주의 확장 논리에 따라 1949년부터 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김일성은 빨치산 정찰 부대 출신으로 전차부대, 야크기, 사단 등 전투부대를 지휘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상 김일성이 아니라 중국이 주도한 전쟁으로 봐야 합니다. 한반도 점령의 주력 부대는 중공군이었습니다.

1945년을 전후해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패배한 이후에 공산주의적 전체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했습니다.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 전쟁이면서, 공산주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대한 제국주의적 확장 전쟁인데 이를 교과서에서 왜곡하고 있습니다.”

중국 교과서에서 기술한 ‘미국이 내전에 간섭하고자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드러난 유엔군과 중공군의 개입 시점만 봐도 허위라는 것이 명백하다. 김일성이 전쟁을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키로 한 것이 전쟁 이전이었던 반면, 미군 등 유엔군의 개입은 전쟁 발발 이후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한 것은 1950년 6월 27일이었고,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벌인 것은 1950년 9월 15일이었다. 김광동 박사는 “유엔군 참전이 확정되자마자 중국 전역에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 이동이 시작됐다. 미군 참전 이전부터 참전이 결정돼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생용 교재에는 역사 왜곡과 함께 자화자찬 가득

중국 대학생 인문교육용으로 사용하는 《중국근현대사 개요》(2018)의 내용도 비슷하다. 부제가 ‘마르크스 이론 연구와 건설공정 중점교재’라고 된 이 책은 고등교육출판사에서 펴냈다.

〈1950년 6월, 조선 전쟁이 폭발했다. 미국은 남조선에 무장 원조를 해줄 것을 선포했고, 그와 동시에 해군 7함대에 타이완해협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미국은 (중국의) 타이완으로의 어떤 진격도 저지했다. 이것은 공공연히 중국 내정에 간섭한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미국이 군대를 끌고 압록강변까지 포격하면서 도달했을 때, 미국의 원조에 대항하기 위해 결책을 발의했다. 펑더화이 중국 정치위원 겸 인민군 사령관이 1950년 10월에 조선을 넘어 전쟁했다. 미국 침략군은 38선 부근까지 후퇴했다. 그와 동시에 중국 내에서는 열렬한 항미원조운동이 발발했다. 나라를 위하고, 집을 지키자는 항미운동이었다.

그 후 중조(중국과 조선)는 아주 고생스런 전투와 투쟁 담판을 거쳤고 마침내 1953년 7월, 미국 대표가 휴전협정 사인을 하도록 압박했다. 클라크 미국 장군은 회고록에서 비탄해하며 “나는 부끄러운 명성을 얻었고, 승리를 하지 못하고 휴전협정에 사인을 하게 된 사령관이다”고 글을 남겼다.

항미원조전쟁은 미국 침략자들의 정의에 타격을 준 사건이었고, 신(新)중국의 국위와 인민군대의 군위를 격상시킨 전쟁이었다. 또 약자가 강자에게 승리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사례가 됐다. 중국 장군들은 상대의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준비해 죽음을 불사하는 전쟁을 했고, 양건쓰(楊根思), 황지광(黃繼光), 쥐사오윈(聚少云) 등 30만명의 영웅과 6000개가 넘는 공신집체(功臣集體)가 나왔다.

이 전쟁의 승리는 조선을 지원해줬던 것뿐 아니라, 중국 국가의 안전을 보위한 것이고, 더불어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보호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사건이었다. 또 이 승리는 힘있게 미국 군대의 불패 신화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서양 침략자들은 몇백 년 동안 동방 해안에서 몇 번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국가를 침략했는데, 그런 시대가 더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남겼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그들(침략자)과 33개월 동안 전쟁을 했고, 미국의 제국주의는 더는 겁낼 상대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일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대단한 경험을 얻은 것이다.

중국 인민들의 이 승리로 인해 민족 자신감과 자부심이 증대됐고, 일부 제국주의에 대해 공포심과 몽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깊은 교훈을 얻고 자각했다. 전 세계가 중국을 괄목상대하고, 신중국의 국제 위상이 재고됐다. 결과적으로 제국주의는 가볍게 중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제 건설과 사회 혁명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환경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한다는 ‘항미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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