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가 있어야만 임금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2019.12.29 00:41

노조박멸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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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있어야만 임금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 …. 2000년~2009년 ..실질 임금 상승률이 연평균 14.6% …….

… 최근 3년 동안의 증가세는 연 16%를 넘어 …… ]

[ …. 지니계수도 2009년에 0.49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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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난 심각해져

작년(2009)까지만해도 일자리 찾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했는데 올들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직원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심지어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에는 약 200만 명 가량의 공인이 부족하다고 전했다. 구정연휴 후 청도시 각 인재시장이 오픈하면서 구인구직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올해 인재시장을 살펴보면 예전과 달리 구인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구직자에게 다가가야 했다. 모 샤브샤브 가게는 당장 오픈해야 되는데 직원이 없어 오픈날짜를 계속 미루고 있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구인난의 주요 원인을 살펴보면 농촌에서도 도시와 비슷한 수준의 소득 창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향이 르자오(日照)인 모 청년은 아래와 같이 계산했다. 청도에서 근무할 때, 급여가 1200원, 집세와 생활비 700원을 지출하고 나면 500원 정도의 저금이 가능했지만 고향에서 가게라도 하게 되면 월 수익 2,000원으로 생활비 300원을 지출하고도 1700원이 남아 집도 마련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농촌 창업환경이 좋아지고 있는 반면, 도시 급여는 큰 변화가 없고 소비 물가는 점점 높아져 가고만 있어 많은 구직자들이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울러 80후 젊은 세대들이 구직하면서 월급보다 취직 환경을 더욱 중히 여겨 돈만 많이 주면 직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한결 더 힘들어 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딱한 사정이다. 경제위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전보다 20% 인상된 급여를 지불해도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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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칭다오시 인력자원부가 발표한 ‘7월 채용 보고서’에 따르면 경비, 재무 등 직종에 취직난이 계속되고 있는 반면 봉제, 포장 등 직종에 구인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7월, 칭다오시는 총 107회에 거쳐 채용박람회를 개최했다.

채용 박람회에서는 총 1,375개 기업이 37,158개 일자리를 제공했고 구직자는 총 32,224명으로 각각 지난해 동기대비 13.76%, 13.95% 증가했다.

통계에 따르면 재무, 경비, 목공, 기사, 소방관, 판촉, 전공, 전력기계수리, 도금 등 직종의 취직난이 가중 된 반면 전체 채용분야의 65.74%를 차지하는 봉제, 기계열가공, 포장, 현장관리, 식당 종업원, 품질검사 등 직종이 구인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월, 시장 평균 급여는 1,810위안으로 전월 대비 2.37% 소폭 하락했다. 채용 직종 중에 급여가 높은 분야로는 건축설계, 기계조작, 관리직, 세공, 전기기사, 영업관리 등 직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축설계 분야의 평균급여가 3,414위안으로 가장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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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

자금난과 구인난으로 부도위기 몰린 중소기업 구하기

中 중소기업 지원 및 발전방안 9월 발표 시행 예정

베이징=홍찬선 특파원 입력 2011.08.31

중국 정부는 사상 최악의 자금난과 구인난으로 무더기 부도 위기에 몰리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및 육성대책을 9월에 마련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상하이증권보가 31일 보도했다.

정부 관계자는 지난 29일 청두(成都)에서 개막된 ‘APEC 중소기업 CEO회의’에서 “국무원은 중소기업발전 지도소조회의를 9월초에 열어 중소기업 지원 및 발전대책을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인 까오셩(睾勝) 민지앤중양(民建中央) 부주석은 이날 회의에서 “현재 중소기업의 60~70%가 심각한 생존위기에 몰려 있을 정도로 2011년은 중소기업 경영에서 최악의 해”라고 지적했다.

현재 중소기업 중 10% 정도만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저장(浙江)성의 중소기업중 80%는 최고금리가 연120%에 이르는 사채(私債)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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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t.co.kr/mtview.php?no=2011083108553882144

중국 동부연해지역 중소기업 구인난 가중

등록일 2011-09-21

중국의 최대 제조업 단지인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시의 업체에도 인력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성탄절 용품을 생산하는 많은 업체들은 수주량은 많으나 이윤은 낮아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업계에서는 주요한 원인은 인건비 상승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단순 일자리일수록 구인난 심화

“일반 근로자(普工) 구하기가 가장 어렵다.” 저장성 이우시의 성탄용품 업체 연합회의 천진린(陳金林) 회장은 최근의 구인난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주문량이 많은 시기에 숙련된 근로자를 채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성탄절 용품은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제품이 많아, 특히나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다. 한 업체 사장은 “1,000여 명의 근로자를 확보했다면 납품에 문제가 없지만, 최근 2~3년 동안의 근로자 수는 계속 700명 수준이다. 임금을 계속 올려도 필요한 인력을 모두 채용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주변의 다른 업체 역시 임금 수준도 작년보다 큰 폭으로 인상하고, 넉넉한 휴가를 보장해도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용직 근로자는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같은 구인난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업무의 내용 외에도 신세대 농민공의 취향, 일부 사회적 원인도 해당된다. 천진린 회장은 “성탄용품 생산은 단조롭다. 80~90년대에 태어난 신세대 농민공들은 이런 단순 반복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1세대 농민공 역시 오랫동안 이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재 노동시장의 주력은 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인 점을 감안하면, 기업들은 앞으로도 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전 세대보다 학력과 직업에 대한 바람이 높아진 신세대를 만족시키려면, 임금뿐만 아니라, 보험 및 여가시간 확보 등 전반적인 복지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대기업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중소기업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서부지역 개발로 동부지역 농민공 감소

대규모 산업 시설의 이전과 지방경제의 발전도 동부 연해지역 구인난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노동집약형 산업이 서부 혹은 북서부로 이전을 하며, 대규모 근로자를 채용했다. 이로 인해 동남부 연해지역의 제조업체에 구인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외에도 지방경제의 발전과 정부의 농촌 지원 강화도 동남부 지역의 구인난에 한 몫을 했다. 지방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 외지에서 노동일을 하기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도 증가했다.

한 공예품 생산업체 사장은 “이전에는 외지에서 온 근로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면서, “월급을 3,000위안까지 올려도 큰 효과가 없었다. 농민공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기(이우)에서 3,000위안을 벌어도 방세와 식비 등을 충당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면, 가정도 돌볼 수 있기 때문에, 1,500위안의 월급이라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우는 외지에서 장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구인난이 더욱 가중될 것이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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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ilaf.org/board.do?boardConfigNo=4&menuNo=38&boardNo=25835&action=view

출처 : 공인일보(http://firm.workercn.cn/c/2011/09/01/110901090347058752651.html)

중국 중소기업들 구직난속의 구인난에 시달린다

2011-08-17

  (흑룡강신문=하얼빈) 중국의 많은 중소기업들이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중국인들이 많지만 로임 등 조건이 맞지 않아 중소기업 취업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절강성의 소형 전기스위치 제조업체인 `저장캉록전자사’의 경우, 350명을 직원을 더 고용해야 할 형편이지만 겨우 150명을 데려오는 데 그쳤다. 이마저 로임을 올리는 고육책을 사용해서 고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가 소재한 락청시의 경우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많은 데도 중소기업은 직원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에서 경제가 상대적으로 발전한 동부 연안에선 어디서나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신화통신이 7일 전했다.

  중소기업들이 밀집한 의오시의 고용당부서 부주임인 오씨는 의오시의 경우 매일 5천-6천명의 일자리가 주어지는 데도 여전히 매일 300명 이상, 어느 날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력시장에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구직난과 구인난의 미스매치 현상은 무엇보다 로임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중국에서 물가가 올라 로동자들이 기대하는 로임수준도 크게 높아졌지만 기업들은 이들이 원하는 만큼 로임을 올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미 최저로임 등 인건비가 크게 오른 데다 원자재 값이 오르고 인민페의 가치도 절상돼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로임을 올려줄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은 형편이라고 경제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락청시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 32세 로동자인 방씨는 직장을 구하고 있지만 로임 문제로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월 2천원짜리 일자리는 많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매월 방값과 전기료로 300원이 들고 3인 가족의 식비로 월 1천200 원을 써야 하며 담뱃값과 전화료금까지 생각하면 남는게 없다는 것이다.

  그는 급속히 치솟는 일상품 가격을 고려하면 월급이 3천원은 돼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실업자들과도 동일하다.

  하지만 기업은 기업대로 고충이 많다. 동관(東莞)시의 한 하드웨어 제조업체는 과거에 100만원 어치의 제품을 만들려면 인건비로 8만원을 썼으나 현재는 인건비가 12만원으로 올랐다면서 이러한 급속한 인건비 상승이 지속되면 견디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에서 저임금에 기반한 저부가가치 산업이 존속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중국 전문가들은 중소기업들이 기술과 자본투자를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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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2009년 ..실질 임금 상승률이 연평균 14.6% …..

… 최근 3년 동안의 증가세는 연 16%를 넘어 …… ]

중국의 임금 상승

‘세계 공장’ 시대 막 내리나?

썬쟈(沈佳) 선임연구원 jshen@lg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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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임금 인상의 물결이 확산되는 와중에 올 들어 14개 주요 도시의 최저임금이 평균 20% 급등했다. 중국 저임금 시대의 종언이 현실화되었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생산기지를 아예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하려는 기업도 속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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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실질 임금 상승세는 대체로 과거와 비슷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 들어 다소 가속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00년~2009년 물가 요인을 제거한 실질 임금 상승률이 연평균 14.6%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최근 3년 동안의 증가세는 연 16%를 넘어섰다(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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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국 일부 대도시에서 영화 한편 값이 한화 1만원, 커피 한잔이 5,000원이 될 정도로 물가가 이미 한국과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왔지만 중국제조업 저임 노동자들은 한 달에 20~30만원으로 버텨야만 한다. 따라서 중국 경제발전 수준과 임금 수준 간에는 아직도 괴리가 커 향후 임금 상승 여지가 많아 보인다. 다만 2009년 기준으로 중국의 임금은 베트남의 3배, 인도네시아의 1.5배에 달했고 이들 신흥국가와의 임금격차가 점차 벌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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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격차가 지난 80년대의 7.3배에서 2007년의 23배로 확대했고, 지니계수도 2009년에 0.492(사회과학원)로 위험수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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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임금 상승은 어디까지

1. 다가오는 ‘루이스 전환점’

임금 추세를 좌우하는 근본적인 요인인 노동력 수급관계도 점차 빠듯해질 것으로 보인다. 먼저 ‘1자녀’ 정책 탓에 중국의 Baby boom 세대들이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하면서 경제활동인구가 2015년 전후에 최고치에 달한 후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
고, 전체 인구에서 15~29세의 젊은 층 비중도 역시 서서히 감소될 전망이다. 2010년 24분기의 도시인력 수급 현황을 보면 25~34세 연령대의 공급부족이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도 2010년 중국 인구의 평균 나이가 34.2세, 2030년에는 40세로 높아
질 것으로 추정했다(그림 6 참조).

더군다나 최근 농민공 부족 현상이 연해지역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확산되면서 중국은 이미 ‘루이스 전환점3’에 도달했다는 견해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림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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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이스 전환점 (Lewisian turning point)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더 루이스의 이름을 딴 개도국 경제발전 단계이론. 농촌의 값싼 잉여 인력이 도시의 산업분야로 진출하면서 제조업이 저임금 인력으로 발전을 지속하다 값싼 인력공급이 고갈되면서 전체적으로 임금도 오르고 고성장도 둔화하는 현상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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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상승률만을 가지고 실제로 경제와 기업의 부담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도 더불어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연평균 15%씩 급증해왔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의 평균상승률은 1.8%에 그쳤고 제조업의 이윤증가율도 높은 성장세를 유지해왔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기간 노동생산성의 평균증가율이 16.9%로 임금 상승률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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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Business Insight 201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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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 큰 은혜라고 생각해 기절할 것처럼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만 했죠 ………. ]

[ …… 한달에 하루를 쉬고 700위안(약 12만원)을 ……..

…… 고향에서 … 한달 200위안보다는 훨씬 큰 돈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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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선전의 문구공장에 와서 일을 시작했을 땐 월급도 고향보다 많고 숙소와 밥도 주는 게 큰 은혜라고 생각해 기절할 것처럼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만 했죠.”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 외곽의 공단지대, ‘노동자 구함’이라는 공고가 곳곳에 붙어 있는 낡은 공장 건물들을 지나면서 덩핑(가명·22)은 옛이야기를 꺼냈다. 중국 서북지역 가난한 농촌 출신인 덩핑은 오빠와 동생의 학비를 벌려고 중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고 농민공이 됐다. 2004년 선전에 온 16살 소녀는 밤 10~11시까지 잔업을 했다. 회사는 잔업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밤에는 출근카드를 기계에 입력하지 못하게 했다. 노동자들이 세수할 때 물을 많이 쓰는지 감시하고 있다가 벌금도 물렸다. 한달에 하루를 쉬고 700위안(약 12만원)을 받았다. 고향에서 받던 한달 200위안보다는 훨씬 큰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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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 부족 현상은 이들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 있다. 1979년부터 실시된 ‘한자녀 정책’의 결과 젊은 노동력이 줄면서 주장(주강)삼각주(선전을 비롯한 광둥성 일대의 수출산업지대)의 노동력 부족은 극심해지고 있다. 광둥성 정부는 주장삼각주 공장지대에서 90만명의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집계했다. 의류, 완구, 신발 등 노동집약산업 공장들은 노동자를 못 구하거나 임금 상승을 견디지 못해 도산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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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중산층에서 가정부의 임금이 높아지자 직접 주방 살림을 하기 위해

고품질의 국산 고무장갑을 찾는다”고 …….. ]

한국 온 中관광객…선물용으로 ‘싹쓸이’하는 품목은

2012-01-26

최근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소득 수준이 중산층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중국 관광객 사이에서 한국에서 ‘반드시 사야할 품목(Must have item)’으로 떠오른 것이 있다. 바로 대형마트에서 파는 한국산 고무장갑이다.

 
이마트의 한 관계자는 26일 “한국을 찾은 중국인들이 고무장갑을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하고 있다“며 “한 사람이 고무장갑 10개 이상을 구입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고 전했다.

특히 하루 평균 200명이 넘는 중국 관광객이 찾는 동인천점에서는 이미 고무장갑이 쇼핑 필수 항목이 되고 있다. 이 곳의 한 바이어는 “중국 중산층에서 가정부의 임금이 높아지자 직접 주방 살림을 하기 위해 고품질의 국산 고무장갑을 찾는다”고 고무장갑 제조업체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또 한류 열풍으로 중국 내 한국 드라마나 조선족을 통해 국산 고무장갑 품질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중국인들의 입소문도 한 몫하고 있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고무장갑 쇼핑’은 인천공항을 비롯해 제주ㆍ김포공항, 인천항 등 중국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지역의 대형마트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처럼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를 끄는 한국산 쇼핑 품목은 과거 해외 명품에서 생활필수품으로 확대되며 다양해졌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던 명품을 사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중국 부호들이 아니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사는 중산층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으면서 저렴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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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heraldcorp.com/common_prog/newsprint.php?ud=201201260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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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회가 구사대를 자처한데다 공회 조직원들이 파업 노동자를 구타 …….. ]

중국 노조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

헤럴드경제 2010.06.25.

중국 연해발전지역 기업들사이에 시위와 파업이 확산되는 가운데 중국 노조인 ‘공회(工會)’에 대한 회의및 무용론이 확산되고 있다.

노사갈등이 중국 산업계의 현안로 떠올랐지만,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야 할 공회가 침묵하거나 사측 편에 서면서 공회의 정체성 확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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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광둥(廣東) 푸산(佛山) 난하이(南海) 혼다 부품공장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회사는 임금을 35% 상향 조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초 임금인상 요구에서 시작됐던 혼다의 파업은 공회 개혁 촉구로 방향이 틀어지고 있다. 특히 연쇄 파업 과정에서 공회가 구사대를 자처한데다 공회 조직원들이 파업 노동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회가 노사갈등 소용돌이의 핵으로 떠올랐다.

중국의 노조조직인 공회(중화전국총공회의)는 세계 최대 규모다. 2010년 상반기 현재 전국에 있는 공회는 184만5000개, 회원은 2억26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 전체 노동자의 71.5%가 공회 회원인 셈이다.

하지만 중국 공회는 공산당 산하 조직 격으로 회사 간부나 경영진과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 공회 간부를 맡고 있다.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조직과 거리가 멀다.  

주간지인 난팡저우모는 지난 10일 사설을 통해 노조 간부를 직선으로 선출하고 월급의 2%를 노조 활동비로 적립하며 노조 전임자를 위한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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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100625094410283&p=ned

[ ….. 노조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는 ‘공회’이며, 회사의 관리자들이 노조의 자리를 차지 ……… ]

노동자 연쇄자살’ 폭스콘

중국 첫 자주적 노조 실험

등록 :2013-02-04

무기명 투표로 첫 노조대표 선거
당 통제 ‘공회’가 중심인 중국서
노동조직에 변화 가져올지 촉각
  
애플 하청 중국 최대 민간기업
열악한 노동환경 뭇매뒤 대수술

중국에서 120만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해 애플의 아이폰 등을 생산하고 있는 거대 전자기업 폭스콘이 노동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자주적 노조를 구성한다. 노동자 연쇄 자살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비판받아온 폭스콘이 노동 관행을 대수술하겠다는 것으로, 당국이 통제하는 노조만 존재하는 ‘세계의 공장’ 중국의 노사 관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폭스콘은 노동자들의 선거로 노조 대표와 주요 위원들을 선출해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조’를 설립하는 작업에 착수한다고 영국 가 4일 보도했다. 폭스콘 관계자는 “폭스콘노동위원회연합의장(노조대표)과 소속 20개 위원회 위원들을 5년에 한번씩 무기명 투표를 통해 선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에서는 생산직 노동자를 더 많이 선출하고 관리자들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폭스콘 쪽은 밝혔다. 중국 내 대형 사업장 가운데 자주적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처음이다.

폭스콘은 춘절(설) 연휴 이후 미국 노동감시단체인 공정노동협회(FLA)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들에게 노조 선거에 대한 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다. 우선 올해와 내년 임기가 끝나는 약 1만8000명 노조 위원들의 후임을 노동자들의 직선으로 뽑는다.

중국 대부분의 공장에서 노조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는 ‘공회’이며, 회사의 관리자들이 노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폭스콘의 현재 공회 대표인 천펑은 폭스콘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궈타이밍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소식통은 “지금까지 폭스콘 노조 대표들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입후보 절차 없이 비민주적으로 선출됐으며, 절반 이상이 관리자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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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572718.html

[ ….. 공회(工會)는 한국 자동차 노조의 연례적 파업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여긴다 ….. 중국 공장에서는 노조와의 갈등이 없어 ……..

….. 이 때문에 중국 공장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 없이 ………

….. 만들고 싶은 차종을 언제든지 만들 수 있고, 전환배치도 효율적 ……… ]

“중국노조, 한국노조 파업 이상한 행동으로 여겨”

김태윤 현대차 중국공장 부사장

베이징 현대 본부장 “중국 공장엔 노사마찰 없고, 생산유연성 확보 가능”

(베이징=연합뉴스) 장영은 기자 = 김태윤 베이징 현대(현대자동차 중국법인) 생산본부장(부사장)은 “중국에서 노조에 해당하는 공회(工會)는 한국 자동차 노조의 연례적 파업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김 본부장은 지난 14일 베이징 현대의 베이징 3공장에서 열린 국내 노동담당 기자와의 간담회에서 “현대차 베이징 공장도 국내 공장처럼 공회와 매년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을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본부장은 “공회와의 노사협상은 매년 초 한달 가량 진행하는데 주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한다”며 “노사가 함께 문제점에 대한 개선책을 찾고 , 공회는 회사 방침에 동의하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같이 힘을 모은다”고 강조했다.

현장 근로자의 불만 등은 공회가 조사해 사측과 협의하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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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공장에서는 임단협 과정에서 노사간 이견이 커 파업으로 이어지지만 중국 공장에서는 노조와의 갈등이 없어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중국 공장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 없이 베이징 공장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현재 500여 명)이 졸업하기 전 1∼ 2학기 정도 임시직으로 실습하고, 졸업 후 본인이 희망하면 근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본부장은 “근로자의 월급은 평균 130만원 정도로 중국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고, 현대차 근무복을 입고 나가면 인기가 높아 많은 젊은이들이 현대차에 취업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자랑했다.

베이징 현대의 생산 경쟁력이 높은데 대해 그는 “한 개 생산라인에서 3∼4개 차종을 함께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시장의 수요에 따라 차종 변경을 할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어떤 상황이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생산 유연성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 공장과 달리 생산라인에서 만들고 싶은 차종을 언제든지 만들 수 있고, 전환배치도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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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1/16/0200000000AKR20131116056900057.HTML?input=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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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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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선 대부분의 노조가 정당과 손을 잡고 있다. 정치 무대의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노조의 힘도 전세계 노조가 부러워할 정도로 막강하다. 그래서 ‘정치노조’ ‘당쟁노조’ ‘배째라 노조’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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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인도의 노조 상급단체(노총)들은 굳이 한국 회사에 노조를 세우려 애쓰지 않는다. 정당에 소속된 인도노조 입장에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대형 외국 사업장 만큼 좋은 텃밭이 없다. 유사시엔 볼모로 잡기에 딱 좋고, 따라서 이들 사업장에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 법하다. 더욱이 인도에선 6명만 의기투합하면 노조 설립이 가능할 정도로 자유롭게 노조를 만들 수 있다. 물론 회사 내에 여러 개의 노조가 활동하는 것도 허용된다.

인도노총(INTUC)의 P J 라주 사무국장은 “근로자 스스로가 노조 설립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지 총연맹 차원에서 노조를 만들도록 개입하는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투자기업들은 강력한 노무관리로 근로자의 만족도가 높고, 생산성도 높다”고 외투기업을 칭찬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은 노조 없이도 잘 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근로자의 권익을 회사가 알아서 챙겨주는데 굳이 노조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또 노조설립은 해당 사업장 근로자의 문제이지 노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에서 노조가 설립된 뒤 상급단체로 가입해도 “내셔널센터(노총)에서 각 기업노조의 일에 개입하는 경우는 없다”고 인도 고용노동부 관계자가 전했다. 말 그대로 기업 단위의 노사관계는 해당 기업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중앙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기업에서 벌어지는 노사분규에 노총이 심심찮게 간섭하는 우리의 경우와 대비된다.

노조 설립과 관련해서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삼성과 같은 무노조 기업에 노조를 세우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9월 3일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이 이른바 현장대장정을 끝내고 기자들에게 배포한 자료에는 전략적인 첫 번째 사업과제로 ‘삼성 등 무노조 사업장에 대한 대책수립’이 들어있다.

한국노총도 마찬가지다. 양노총의 무노조 업체에 대한 노조 설립의지는 그 회사에 근무하는 근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 회사가 세계 시장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지도 따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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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노조의 또다른 특징은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외국계 기업에 대해서는 그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서는 쟁의행위가 거의 없다. 인도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임금체불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투자기업에선 임금이 밀리는 경우가 없어 파업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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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노조의 변화상과 시사점

출처 : 월간 경영계 10월호 기자의 창 | 작성일 : 2007-10-10

베트남·인도 복지 좋은데 노조가 무슨 필요 있나

[중앙일보] 입력 2007.05.01

외국인 투자유치에 동참

연 8%대의 고도성장을 하며 한국경제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인도와 베트남. 이 두 나라 노조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종업원이 512명인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는 노조가 없다. 베트남 노동법은 10인 이상 사업장에는 반드시 노조가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법을 어긴 채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며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정부나 노총의 협조 때문이다. 베트남 노동부 다오 꾸앙 빈 국제협력관은 기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노동자의 복지수준도 높은데 법을 그대로 적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추낫빈 베트남노동총연맹 대외협력본부장은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라면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며 투자 유치를 장려하는 법이나 제도라면 만들면 만들수록 좋고, 행정절차도 간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정의 이런 노력은 외국인 투자기업의 근로손실 일수 ‘0’일이라는 기록을 낳았다. 지난해 베트남 외투기업에서는 272건의 노사분쟁이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노총이나 정부가 중재에 나서 하루(8시간)를 넘기지 않고 모두 해결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주재 장근섭 노무관은 이곳에선 노조가 있는 게 더 낫다고 할 만큼 노조의 경제마인드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인도의 노조도 변하고 있다. 인도의 노조는 과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회사 안에서 관리자에게 폭행도 서슴지 않아 외국 기업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조가 나서서 기업을 괴롭히는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라주 인도노총 사무총장은 파업이 발생하면 기업주도 공장을 폐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엔 그것도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돼 있는 등 기업을 지나치게 제약한다며 노동법을 개정토록 의회를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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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71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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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못 세운다” …….. ]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16/2007011600998.html

[조선데스크] 이병철과 정주영과 노조

최홍섭 산업부 차장대우

입력 : 2007.01.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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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는 노조에 관해서도 대조적이었다. 이 회장은 IBM·월마트·HP 등 세계적 기업에 노조가 없는 걸 보고 ‘무(無)노조 경영’을 원칙으로 삼았다. 1977년 제일제당 김포공장 여공들을 중심으로 노조 설립 움직임이 불거지자 이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못 세운다”고 선언했다. 대신 “종업원이 노조의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좋은 근로조건을 만들어라”라고 지시했다. 그 전통은 철칙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노동계에선 ‘삼성은 노조에 대한 알레르기가 병적 수준’이라고 비난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회사가 좋은 경영 실적을 내고 직원들은 만족하는데 왜 노조가 없다고 시비를 거느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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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삼성전자, 7년째 대학생 취업 희망 1순위

삼성전자가 7년 연속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에 올랐습니다.

온라인 리크루팅업체인 ‘잡 코리아’가 대학생 1,631명을 대상으로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 중 취업하고 싶은 곳을 조사한 결과 18.6%가 삼성전자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삼성전자는 ‘잡 코리아’가 2004년 이 조사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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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tn.co.kr/_ln/0102_201004191028255599

2013

LUXMEN·오픈서베이·잡코리아 공동조사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삼성전자와 구글`

기사입력 2013.11.08 17:19:00 | 최종수정 2013.12.20 11: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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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라이벌?

글로벌 IT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에 맞서 안드로이드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구글이 이번에는 라이벌이 됐다.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 2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4일 매일경제 LUXMEN과 모바일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아이디인큐(대표 김동호),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공동으로 전국 대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취업 희망 기업’ 순위에서다. 삼성전자는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를 차지했고, 구글은 오차범위 내에서 2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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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uxmen.mk.co.kr/view.php?sc=51100002&cm=Cover%20Story&year=2013&no=1103882&relatedcode=

2014

[ ….. 전체 응답자들이 꼽은 취업하고 싶은 기업 …. 삼성전자 … 1위 …….. ]

대학생, 취업희망 1순위… 女 CJ제일제당·男 삼성전자

입력 2014-09-02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가장 들어가고 싶은 국내 기업으로 CJ제일제당을 꼽았습니다. 남학생들은 삼성전자를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로 선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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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결과, 전체 응답자들이 꼽은 취업하고 싶은 기업 톱10으로 삼성전자 16.7% 지지로 1위, CJ제일제당 13.5% 2위, 대한항공 10.8% 3위, 아시아나항공 10.4% 4위, 포스코 10.1% 5위, 한국전력공사 9.6% 6위, 현대자동차 7.4%로 7위, SK텔레콤 6.1%로 8위, KB국민은행 6.0%로 9위, LG전자 5.8%로 10위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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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90277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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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년 방직공장 여공 평균월급 3천4백40원

1970 한달 급료 1만3백25원, 쌀 3백ℓ

[…. (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쌀 20ℓ 6백37원).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

…. 1970년이 되면서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 쌀 3백ℓ에 ……. ]

[ ….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 ]

수출 전략의 입안자가 쓴 20世紀 한국의 위대한 世代-女工 찬가

『女工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吳源哲

보릿고개

우리나라에는 古來(고래)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릿고개」는 農土(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農家(농가)에서 일어난다. 따로 소득도 없다. 그러니 「보릿고개」의 절박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난한 農家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産母(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된다.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食口(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열 살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딸들인데, 말이 양자이지 대개 식모살이를 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이 「보릿고개」였다. 이런 「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農家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딸이었다. 그 당시 어느 농촌 소녀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소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家事(가사)를 돕다가 15세가 됐다. 동생들은 늘어나고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바늘이 손가락에 박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給食(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필자 注그 당시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 6백g이 1백29원, 연탄 10장 76원, 쌀 20ℓ 6백37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해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19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日給(일급) 4백13원이 됐다.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당시 쌀값이 20ℓ에 6백92원이었으니 쌀 3백ℓ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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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199912100033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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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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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25132&C_CC=BB

이런 교과서로 공부하면 조국을 미워하게 된다
고교 國史 교과서의「대한민국 때리고 金日成 父子 감싸기」

裵振榮(월간조선)
*月刊朝鮮 200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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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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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가면 돈도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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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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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960년대의 여인상(女人像)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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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공의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여인상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여아였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이 아가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돕다가 만 15세가 됐다. 동생들의 수가 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녀인 이 소녀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을 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아가씨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자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뿐이니 기술이 있을 리 없었고,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으니 모두가 낯설고 두려울 뿐이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바늘이 손가락에 박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손재주도 좋았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당시는 토요일도 반나절만 일할 때가 아니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440원이다(註: 1964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600g) 129원, 연탄(10개) 76원, 비누(375g)가 38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 액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을 했다가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모두가 긴요한 물건이었으나 특히「라디오」선물이 한때 대유행을 했다(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이 아가씨는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일급 413원이 됐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급료가 10,325원(413원×25일), 당시 쌀값은 20 리터에 692원이었으니, 한 달 급료는 쌀 300 리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만한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이제 소녀의 나이 21세,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맵시도 좋아졌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어,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도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만 15세 때, 동네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언니 따라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자리는 곧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쯤에는 여성 근로자의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니가 보태준 학비로 중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기술은 없었다. 그래서 급료는 최하급인 일급 245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쳐서 6,125원이었다. 언니의 월급은 10,325원이니 언니가 약 69%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셈이다(註: 70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쌀(20리터)이 692원, 밀가루(22kg 한 포대)가 773원, 쇠고기(600g) 500원, 무(한 관)가 160원, 배추(한 관)가 222원, 마늘(100개)이 720원, 세탁비누(450g)가 4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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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eoi.org/resource/online_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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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에 공장이 꽉 들어차 있던 ‘구로공단’에 자주 강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서 올라온 여공들이 합숙을 하면서 한 달에 노임을 6만원을 받는데 자기의 숙식비 등을 지불하며 최저 생활을 하면서 매달 3만원을 시골집에 보내서 남동생이 학비로 쓰게 한다는 근로회관 관장의 말을 듣고 감동을 금치 못했던 옛일이 생각납니다.

그 누나들이, 매우 검소한 나날, 고된 하루를 살면서, 벌어서 보내준 학비로 시골서 동생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러는 대학을 나오고 70년대의 ‘조국 근대화’, ‘한강변의 기적’을 일구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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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nas.net/article/article.asp?idx=48087

대한민국을 버티는 사람들
Written by. 김동길 2017-02-27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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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5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

초등학교 5학년 때 탄광 지대로 전학을 갔는데 막장 광부들의 당시 월급이 10만 원이었다. 도시 화이트 칼라 월급의 두 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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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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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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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

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 「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엔統計(통계)는 우리나라의 工業成長率 ……

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1967.04.06 경향신문 5면 사회 기사(뉴스)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저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1968.02.16 경향신문 3면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철도청의 일류기술자들을 상대로 각건설회사가 스카웃전을 벌이고 있다. 15일 철도청에 의하면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은 각건설회사…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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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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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 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갖…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企業主(기업주)들은 새로운 經營(경영)모토와 상징을 내…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은…

公務員退職(공무원퇴직) 激增(격증)문제

1968.07.10 경향신문 2면

…. 그중에서도 教育公務員(교육공무원)을 主(주)로하는 文教部(문교부)의 離職者數(이직자수)가 首位(수위)이고 다음은 警察官(경찰관)을 主… 그들의離職(이직)을 막을 道理(도리)가 없겠다는 것을 새삼 느끼 …..

[ ….. 우리도 하면된다. ….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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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60년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후진국이 1차 5개년 계획을 실천에 옮겨서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처음으로 봤던 시기가 아녜요?

또,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60년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요? 흔히 요즘 경제는 발전 시켰는데 정신은 발전이 안됐다, 정신의 개혁과 발전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전? 저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68년도라는 해는 아버지로선 잊을 수 없는 해라고 그러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버지를 비롯해서 처음으로 우리도 하면된다. 우리도 이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라고 보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자신을 얻은걸 바탕으로 해서 70년도에 조국근대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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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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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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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여공들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당시나 지금이나 학력은 신분을 표시한다. 그런데 당시 여공들의 대부분은 가정 형편상 중학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동창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들 중 한 여공(女工)의 이야기.

朴 대통령은 자주 공장시찰을 했다. 하루는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작았다. 먹을 게 귀했던 당시, 시골에서 영양분 섭취를 제대로 했겠는가. 朴 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여공들이 기특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수출을 할 때라, 영어 글씨가 여기저기 있을 때이다. 대통령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통령의 눈시울도 젖었다. 주위 수행자들도 순간적으로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朴 대통령의 의중을 눈치 챈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朴 대통령 “돈이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여공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나 새로 마련된 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교사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많은 사원들이 자진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이들 여공들은 휴가로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 그래서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공장으로 돌아올 때 이들은 자기 고장의 잔디를 한 장씩 떠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학교 마당에 깔았고, 이를 ‘팔도(註: 팔도강산, 전국을 뜻함) 잔디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과과정(커리큘럼)이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듣고 朴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주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하는 호통이었다.

졸업식 때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재학생도 따라 울었고, 교사도 울었다. 사장도 울었고, 참석한 귀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가 잠시 중단될 때도 있었다. 못 배운 한을 푸는 날.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인가.

여공들은 중학과정을 끝내고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급했고,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생겼다. 이들 대학생에게는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정부나 기업이 여공들에게 베푼「정」이었다. 이「정」이 순수했기 때문에 여공들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고마워했다. 서로가 학우로서 친하게 되니, 협동심도 생기고 단결심도 생겼다. 일의 능률도 올랐다. 이직률도 줄었다. 당시 각 공장에는 월 별로 품목마다 수출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여공들은 이 목표량을 생산하는데 스스로가 노력했다. 목표량이 달성될 때마다 기쁨의 환성을 올렸고 기업주는 이에 보답했다. 모두가 우리나라 경제건설에 앞장서는 개척자였으며, 그들의 목적의식은 뚜렷했다. 그래서 신명나게 일했다.

이런 일을 정치적이나 노동착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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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면 1966년에서 70년까지 4년간 환율이 14.5% 인상되었는데도 제조업 근로자의 노임은 달러로 따져 평균 222.5%로 인상됐다.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상률은 업종별로 큰 차이가 났다. 인건비가 더 많이 오른 쪽이 근로자를 구하기가 더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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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리나라의 업종별 임금 비교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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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노동소득분배율 … 상승세로 전환 …. Lewis 전환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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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지금까지의 국내 연구를 보면 소득분배 전반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으나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분배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많지 않고, 특히 노동소득분배율의 결정요인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소득분배율을 다룬 몇몇 연구를 보면 우선 비교적 오래 전에 이루어진 연구가 배진한(1992)이라 할 수 있는데 동 연구는 1953년~1988년 중 우리나라 노동소득분배율 변동의 주요 특징을 분석하였다. 동 연구에서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세가 상승세로 전환된 점에서 이 시기가 Lewis(1954)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시기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동 연구는 경기순환의 정점 부근에서, 그리고 GDP 대비 수출 비중이 높을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이 대체로 상승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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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경제연구원 「經濟分析」 제19권 제3호 (2013.9)

노동소득분배율 측정 및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김배근

배진한 (1992),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 변동,” 󰡔경제학연구󰡕, 제40집 제2호, 609-631.

[ ….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 ]

[ ….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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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의 여성 근로자의 노임 수준을 알아보기로 한다.

1970년 한국정밀기기 센터(註: 전자공업 진흥센터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는 전자공장 유치용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각국의 임금 실태를 조사했다(1970년 8월). 그 결과가 이다.

1970년 당시 신규로 채용한 우리나라 여공들의 하루 임금은 245원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의 경우는 343원으로 우리나라보다 40%가 비싸고, 싱가포르는 27%가 높다. 우리나라가 경쟁국보다 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참 여공들의 경우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국은 413원인데, 대만은 418원으로 101%, 싱가포르도 101%이다. 즉, 고참 여공의 경우 우리나라는 대만, 싱가포르와 거의 같은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평균으로 계산하면 대만이나 싱가포르의 노임 수준은 우리나라에 비해 11~16% 정도 높았다. 즉,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970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에서 우리나라 여자 조립공의 노임(日給)은 최하가 245원이고 최고가 413원이다. 그 비율은 100 : 169이다. 이에 비해 대만은 100 : 122, 싱가포르는 100 : 133으로 우리나라보다 노임 격차가 적다. 격차가 크다는 뜻은 경험이 많은 고참 여공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수출이 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신참 노동자는 구할 수가 있어도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변해 버렸다. 그 후부터 「값이 싼 한국 노동자」라는 말은 다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환언하면 「값싼 인력 시대」는 여성 근로자에 관한 한 1964년 중반부터 70년까지 약 7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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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여성근로자의 노임 한계점에 도달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 ….. 1970년대에 평화시장 ….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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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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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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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간첩 박원식을 추적하던 경찰이 추풍령 산마루 경북 금릉군 봉산면 광천동 일대의 주민동향을 조사했을 때 속칭 돈목 마을 (27 가구) 은 11명의 처녀가 돈벌이를 하러 도시행, 17세가 넘는 처녀는 단 2명 뿐이었다. 속칭 곤천마을(30가구)은 처녀 13명이 모두 외지로 나가 ‘처녀 없는 마을’이 돼 버렸고 주민들도 “도시에서의 식모살이가 답답한 산골생활보다야 낮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부러워 하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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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2.03.27.

1974

[ …..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

……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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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여공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서울로, 도시로 떠났어요. 시골에서는 먹고 살 길도 없고 형제들이 많으니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지요. 도시로 떠난 언니들이 휴가 받아 오면 다들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그라고 왜 여고생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담임도 야간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았죠. 그래도 어린 마음에 막상 진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대신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 합판공장에 취직했어요.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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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

…..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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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는 여공의 공장에 대한 동경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 민주노조 여공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하층사회 소녀들이 여공이 되는 것은 농촌탈출이란 소녀들의 적극적 선택과 가족적 요구간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그간 대부분 노동사 서술은 여공의 취직 동기는 가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슬픈 ‘哀史’가 담겨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담론을 재생산해냈다.

이런 담론들은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자신의 자립과 독자적인 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에 대한 익명적 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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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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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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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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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부잣집 아들의,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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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은 박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 때였죠. 남대문에 코트라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다보면 수출목표액과 달성액이 전광판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출 많이 하면 애국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밤새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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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1972년에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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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9년 ….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 ….. 한국은 13%로 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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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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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6822&C_CC=BB

維新시절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자료
趙甲濟

공돌이가 외치노라 !!!

10월4일, 난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칠 것이다.

지금 정권의 대다수들이 과거에 고생? 할 때.

난 수출현장의 최일선인 전자회사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명 공돌이였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 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 때 당시 이 나라가 어려울 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나라 어지럽히고,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영광스런 대한민국,자랑스런 대한민국,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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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늪’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힘들다. 좌파 정책은 중산층을 몰락시켜 빈곤층으로 내몬다. 그렇게 생겨난 빈곤층은 ‘평등한 세상’이라는 좌파 구호에 솔깃해 한다. 좌파정책은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빈부격차는 다시 좌파 정권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좌파는 계속 정권을 재창출하지만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남미(南美)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 돼 온 악순환 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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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건국한 중국과 1947년 독립한 인도는 처음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 길은 빈곤에서 빈곤으로 이어지는 미로였다.

중국은 1989년부터 시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도는 1991년에 자유주의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중국과 인도는 각각 10%, 8%의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 경제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좌파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우향우(右向右)’를 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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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30/2007013001152.html

[김창균 칼럼] 대한민국 다시 우향우
2007.01.30

2009.9.

[ ….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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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릴랜드대 국제정책태도프로그램(PIPA) 연구팀과 캐나다의 글로버스캔이 최근 한국과 미국 등 세계 20개국 시민을 상대로 금융위기 1년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자유기업 시스템과 자유시장경제’가 미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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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필리핀(73%)이 뒤를 이었다.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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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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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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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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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써 70년대부터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

……. 1970년대 들어와 누구든지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 ]

[란코프] 소련 붕괴의 원인

란코프 ∙ 한국 국민대 교수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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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제 자신 뿐만 아니라, 저의 친구들은 벌써 70년대부터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기침체였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분위기였는데 이는 소련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었습니다.

경제문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까지 대규모 노동 및 자원의 동원을 통해 잘 성장했던 소련 경제가 70년대 들어와 극복하기 어려운 만성적인 침체에 접어들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 당시 소련 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소련은 북한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생활은 좋아지지 않았고, 소비생활은 사실상 점차 열악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은 소련이 망하게 된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련에서 농민들은 원래부터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도시 시민들 대부분은 6~70년대까지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대체로 지지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사회의 모순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부정부패와 정치테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문제점은 과도기에 있어 불가피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소련 지식인이나 노동자들의 희망은 과도기를 마친 소련이 서양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이와 같은 희망은 점차 식어갔습니다. 처음에 10년이나 20년 정도 걸릴 줄 알았던 과도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1960~70년대 소련은 비교적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을 능가하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 소련 사람들이 필요악으로 받아들였던 여러 가지 사회문제는 심각한 짜증을 야기하였습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소련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서양 나라들의 주민생활과 많이 비교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소련 사람들은 미국에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소련의 공산당 간부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해외로 갈 수도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아무 때나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불가능했습니다. 물질적인 생활도 있었고, 개인의 자유도 김일성 시대의 북한보다는 많았지만, 미국이나 영국과 비교하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불만이 5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1970년대 들어와 누구든지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제발전과 사회의 진보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련 정부가 했던 약속을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약속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전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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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cu-al-102320141133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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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소비생활은 다시 어려워졌다. 그 근본이유는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이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수요-공급 사이의 불균형은 심해졌다.

1947년 배급제를 폐지했을 때의 고정된 물가는 시장경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물가와 대체로 일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중에 나도는 현금이 많아졌다.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의식한 정부는 월급을 계속 올렸지만 국가가 고정시켜 놓은 물가는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영상점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갔다.

1970년대 우리 가족은 큰 상점 근처에 살았는데, 필자가 해마다 소비자의 선택이 좁아지는 것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1972-73년 이 상점 진열대에는 치즈 5종류가 있었는데, 1977-78년에는 1-2종류, 1980년 이후에는 한 종류라도 있으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지역에 따라 큰 차이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육류는 1960년대 말부터 어려워졌고, 가게 앞에 선 긴 줄은 그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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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700&num=12395

배급제… 모스크바로 가던 ‘소시지 기차’
[란코프 칼럼] 구소련도 배급제 부끄러워 했다
2005-10-02

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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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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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이 개혁개방한 것만 알지, 사람들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의 진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홍콩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몇 달만 있으면 중국 고위 공산당 간부보다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어도 소용없었다.

노동자, 농민, 어린 학생만이 아니라 공산당 간부도 도망갔다. 1979년 1월부터 5월까지 15만 명이 홍콩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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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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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예외 없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따라 시행 착오를 거듭할 때,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공로만으로도 전국민에 게 귀감이 되는 것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 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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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있어야만 임금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노조가 임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노조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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