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2019.11.01 02:07

진보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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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어부 좌담회 음산한 북한

동아일보 1970.7.29.

귀환어부 좌담회

음산한 북한
평양거리 쓸쓸 …. 주민들 핏기 없고
국교생 도시락엔 쌀한톨 안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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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북한주민들의 식생활은 어떻습니까?

우재=그들은 쌀밥을 먹는다고 선전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더군요. 주민들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식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못먹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일반식당 사이엔 베니어판으로 막아 놓았는 데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 봤더니 일반주민들의 밥은 우리에게 주는 것과 아주 딴판이에요. 그들은 고구마가 섞인 잡곡밥이더군요.

엄동=우리에게 주는 쌀밥도 말이 쌀밥이지 기름기가 없고 푸실푸실하며 새카만데다 맛도 없어요.

우재=우리가 평양여관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들중의 한명이 한 학생의 도시락을 슬쩍 열어보았지요. 저도 곁눈질로 들여다봤지요. 쌀은 한톨도 없고 옥수수로 지은 밥이었읍니다. 도시락을 몰래 열어본 동료는 즉시 끌려가 우리 일행이 석방될 때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사회=북한주민의 의복은 어떻습니까?

최성=제가 묵고 있던 여관의 안내원들은 옥양목이나 모시저고리를 입었더군요.고무신은 도저히 볼 수 없고 모두 비닐신을 신고 있었읍니다. 비닐신은 딱딱해보였고 부러진 자국도 있었읍니다.

사회=평양시가와 건물들은 어떻습니까?

최해=평양시는 크기가 강릉시와 비슷했읍니다. 건물은 대개 4,5층으로 네모 반듯해 퍽 단조로왔읍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아동궁전이라고 하는 건물로 11층이더군요. 거리의 풍경은 퍽 쓸쓸했고 행인들은 우리들이 납북어부들이란 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몰라보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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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도 김일성 사진

사회=공장에 가 보신 소감을 좀 ….

최해=일만시키니 노동자들이 지쳐있어요. 공장에 시찰 온 김일성이가 앉기만해도 그 자리는 곧 성역이 되어 보전되어 있어요. 변소에까지도 김일성 사진이 붙어 있는데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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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 …… 돌아오기 전날밤 저는 쉐터와 구두를 잃어버렸읍니다. 북한에는 옷이 귀하니까 누가 훔쳐간 것 같아요.

우리 물건 굉장히 탐내

최해=그들은 남한의 물건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입고 간 털옷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또 날짜가 나오는 시계를 보더니 욕심을 내더군요. 이런 시계를 남한에서 생산한다고 했더니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사상교육 교관들이 매시간 바뀌는데 차고 오는 시계는 항상 같은 모양이에요. 시계 어쨌든 교대로 차고 오는 것 같아요. 어쨌든 북한에는 시계가 귀한 모양입니다.

우재=동해안에 와 보니 우리배에 발동을 걸어 놓았더군요. 주위엔 환송객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었어요.60 정도의 노인들은 악수를 청하거나 붙들며 울더군요. 그런데 30대 미만의 젊은 사람들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봐요. 아마 남한은 지옥과 같다고 이들에게 하도 허위선전해서 정말 그런줄 알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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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은?

최해=여자들이 화장을 일체 않고 남자 이상으로 일하는 것 같아요. 부인네가 어린애 한명은 업고 한명은 손잡고 걸리며 한손엔 책을 들고 읽으면서 걸어가더군요. 측은한 마음까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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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국민학교 학생들도 공기총사격연습을 하며 놀더군요. 어떻게 훈련을 시켰는지 아주 잘 맞혀요. 우리들한테 맞춰보라고 해서 한번 쏘아봤더니 잘 안 맞아요.

사회=북한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최해=같이 납북됐던 노인들의 말을 빌면 왜정 말기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도 그 쪽엔 별로 발전한 것 같지 않아요.

최성=한마디로 남한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발전상은 비교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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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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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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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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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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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 연변

[ ……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

……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 …….

……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 ]

(2) 재미교포 한태경씨 | 「연변조선자치주」를 가다 본지독점연재

[중앙일보] 197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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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그린다 | 신문·방송통해 고국소식 알아 | 만난 사람마다 미국생활 질문 | 북괴와 서신왕래두절…대부분이 한국동경 | 북송교포 “연변에 도망치다 잡힌 사람 많아”

이 밖의 「뉴스」 매체로는 한글로 된 연변일보, 중국어판 길림일보 등 신문과 장춘에서 1주일에 2회, 약 2시간 정도 연변지역에 중계방영하는 흑백 TV, 연길의 한국어 방송, 길림의 중국어 방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다.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발전상을 자세히 알고있는 듯 했고 미국과의 수교가 임박해서는 미국생활에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내가 집을 나와 산보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질문공세를 폈다. 미국이 잘 살고, 과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알고있으나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도 기계가 짓고 빨래도 기계가 한다는데 사실이냐』

다행히 내가 갖고 갔던 「폴러로이드」 사진기가 모든 대답을 해줬다. 이때까지 「컬러」 사진을 구경 못한 이들에게 천연색사진이 촬영하자마자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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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동포들은 또 북한의 실정을 잘 아는지라 일부 거류민단간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었고 남북한 국민전체의 자유선거를 통한 남북통일을 원하고 있는 듯 했다.

한때 이른바 김일성 혁명사상을 「테스트」 한다는 「고험」(시험)을 거쳐 북한으로 이왕한 동포들도 있었으나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북송된 많은 북송교포들이 「연변자치주」로 탈출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갖고 온 자동차·TV 등을 모두 북한당국에 뺏기고 빈털터리가 돼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항의 「데모」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집단농장으로 보내졌고 연변으로 도망쳐 나오다 붙잡힌 사람만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이곳 동포들이 알려줬다.

미·중공수교를 전후해서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국민학교에서조차 지금까지의 소련어 대신 영어를 외국어 교육과목으로 채택,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른바 중점학교(일류학교)에서는 영어교육에 중점을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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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기간 중 몇몇 동포들은 자신의 가족·친척들을 고발해 숙청의 제물이 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뜻있는 노인들이 매우 통탄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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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503345

1979.10.

[ …… 앉아 있던 중국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라고 권했다 …….. ]

동아일보 1979.10.10.

중공 30년

[홍콩=박흥원 특파원] 현중공정권이 대외정책에서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로부터 평화공존과 데탕트추구로 급선회함에 따라 지난 30년동안 굳게 닫혔던 죽의 장막이 걷히고 중공사회는 그문을 활짝 열었다.

이에 따라 외국관광객들이 중공에 몰려 들고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가고 있다.그뿐만이 아니다.9억 인구의 방대한 시장을 노린 외국상인들이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중공땅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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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엔 무조건 특별대우

최근 중공을 다녀온 한 미국기자의 중공인상을 들어보자.

“만원버스를 탔다. 앉아 있던 중국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라고 권했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있는 뒷줄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팔을 잡아끌기에 어리둥절해 있으려니까 앞줄로 가라는 것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봤다. 내국인식당인데도 외국인을 위한 전용특실이 마련돼 있어 그곳으로 안내 받았다. 공항대합실에도 기차역에도 외국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전용특실이 있다.”

중공은 외국관광객들도 자기 나라를 찾아준 외국손님이라며 대접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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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중공서 「홍콩」으로 헤엄쳐 탈출 10월 들어서만 1만1천3백명

[중앙일보] 1979.11.02

■…바다를 헤엄쳐 중공으로부터 「홍콩」으로 탈출해오는 「자유의수영객」들이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

10월 들어 이같이 헤엄을 쳐서 「홍콩」으로 탈출했다가 「홍콩」경찰에 불법입국자로 체포된 사람수는 1만1천3백명을 상회하고 있으며 이같은 중공으로부터 불법이민자수의 증가는 62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던 금년봄의 수준에 육박하는 것.

중공으로부터 온 불법이민체포자수는 금년 5월에 1만4천4백명이있고 6월에는 1만2천1백명이었다.「홍콩」정청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8개월동안 중공으로부터「홍콩」에 온 불법 및 합법적 입국자수는 총25만명 이상이다.

1978

[ …… 한국은 1천3백10달러로 39위 …….

…… 중공 (230) ……. ]

1981.4.11. 동아일보

한국 세계 39번째 부국

78년 1인소득 천3백10달러

[워싱턴 AP연합] 78년 집계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5천9백70달러의 쿠웨이트이며 미국은 9천7백70달러로 9위, 한국은 1천3백10달러로 39위를 차지했다고 10일 세계은행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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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소득이 3백달러 이하인 국가는 우간다(280 달러. 이하 달러) 기니(260) 마다가스카르(250) 아이티(240)

중공(230) 스리랑카(200) 인도(180) 아프가니스탄(160) 방글라데시(9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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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7. 중공

[ ……. 마르크스주의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 ……..

……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 8백달러선으로 수정 ……… ]

중공의 새물결(중)

등소평 체제의 새과제들

[중앙일보] 1981.07.03

호요방이 중공당주석에 취임하고 첫 공개연설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한 배경은 무엇보다 심각한 경제난국에 있다.

현재의 중공사회 경제체제는 정통적인 공산주의의 경제정책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는 중공지도부의 현실인식이 언뜻 보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게 한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75년에 시작한 「현대화계획」, 화가 목표 늘려잡아 물가 치솟고 재정파탄 위기직면
불만 쌓이자 어쩔수 없이 자본주의식 치유책 도입

70년대 중반 주은내(전수상)로부터 현재의 등소평(당부주석)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국민들에게 서기 2천년의 화려한 중공미래상을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날의 과실을 위해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당지도부의 노선에 충실하고 헌신하라고 호소해왔다.

주은내는 75년 『중공이 서기 2천년에 공업수준이나 개인소득 등의 모든 면에서 구미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초현대적 사회주의 대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4개현대화(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계획이 그것이다.

76년 주와 모택동이 사망한 후 대권을 장악한 화국봉은 지지기반이 엷고 권위가 허약한 것을 확대하고 벌충하기 위한 조급한 생각에서 4개현대화 계획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늘려 잡았다. 중공의 연간석유 생산량의 반을 생산하는 대경유전과 같은 규모의 유전을 10개씩이나 건설한다는등 1백20개의 대형건설사업을 추진했다. 그것도 10년 동안 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투자소요 추정액만도 당시 6천3백억달러규모(부주석 이선념)였다.

서방세계가 맹목적으로 중공특수의 환상에 들뜬 것도 그래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도외시한 이 계획은 2년도 못가 부작용을 낳았고 마침내는 이선념의 고백처럼 중공재정의 파탄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다. 화의 실세에 일조만 한 것이었다.

뒤이어 등소평과 진운(당부주식)은 그 계획을 백지화하는 3년간의 경제 조정기를 갖고 보다 현실에 근거한 새로운 8개년 계획을 제시했다. 등은 또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1천달러선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등은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8백달러선으로 수정해야 할만큼 중공경제실정은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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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중공이 제시한 미래의 달콤한 꿈만 쫓아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기에는 너무 지쳐있었을뿐 아니라 속임을 당하고있다고 자각했다.

상해같은 대도시는 물론 신강성같은 변방에서조차 정부시책에 합의하는 대규모시위 또는 폴란드식의 자유노조결성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마르크스주의는 청·장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청년들은 더이상 어떤 주의나 정치를 신봉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아주 정상적이다』(「탐소」5호·여림)는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실용주의 지도부는 이처럼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그로 말미암아 정부가 국민의 신임을 못얻게 하는 장애가 다름 아닌 교조적 공산주의이념의 집착이라고 본셈이다.

따라서 호의 연설로 가장 영향을 받는 분야는 경제정책이다.

실제로 이미 진행되고있는 경제정책은 공산주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본주의적 냄새가 짙은 것들이 많다. 예컨대 상여금제도의 실시, 개인기업의 부활과 장려, 기업상호간의 경제체제를 통한 시장경제원리의 도입, 1백% 외국투자의 허용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등-호 체제는 말하자면 그와 같은 「이단정책」을 더 확대하고 합리화하기 의한 방편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맹신에 경종을 울리는 「이단」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중공은 앞으로 뒤떨어진 경제건설과 불만에 찬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 이념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입장에서 경제정책을 시행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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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72895

1980.8.

[ …… 「그다니스크」항도의 노동파업은 …..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 ]

「폴란드」노동자 파업 | 반체제 운동으로 확대

[중앙일보] 입력 1980.08.18

【바르샤바17일 로이터·AP합동】 「폴란드」 최대 「레닌」조선소를 중심으로 4일째 계속되고 있는 「그다니스크」항도의 노동파업은 17일「그다니스크」시 주변 21개 기업체 노동자들이 공장파업위원회(MKS)를 조직,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유례 없는 힘의 과시로 공산정권에 정면도전하는 정치사태로 악화됨으로써 공산 「폴란드」는 2O년 노동폭동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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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째 계속되는「폴란드」전국의 노동파업에 호응, 지난14일 「레닌」조선소를 점령함으로써 발단된 「폴란드」북단「그다니스크」시의 노동파업은 「기에레크」 공산당정부의 유화책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악화되어 이 날 MKS가 21개 공장지도자의 이름으로 된 성명을 반체제자위안(KOR)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정치대결로 변모된 가운데 공산정면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번 「폴란드」 파업 소요는 지난 7월초 정부가 지난 수년간 공급부족 상태였던 고기값의 대폭 인상을 발표하자 「우르수스」「트럭」공장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 대규모 파업이 「루블린」·「브로츨라프」·「루기」·「바르샤바」및 그 밖의 도시로 계속 번져나갔으며 당국은 대부분의 경우 파업소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임금인상 및 그 밖의 요구들을 들어주었으나 지난14일「그다니스크」·「레닌」 조선소와 수많은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더욱이 파업노동자들이 반체제 운동단체들과 손잡음으로써 반정부적 색채를 띰으로써「기에레크」당 제1서기가 이끄는 현정권은 최악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

http://news.joins.com/article/1544099

[ …….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

……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

……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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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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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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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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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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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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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14. 경향신문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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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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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부림사건

[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부림 사건 피고인들이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사회주의 이념을 주장했다는 ……. ]

[사설]‘부림’ ‘유서 대필’ 무죄, 진영논리로 재단할 일 아니다

기사입력 2014-02-14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 사건과 강기훈 씨의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해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부림 사건은 수사기관의 증거가 불법으로 수집됐고, 강 씨의 유서 대필 사건은 필적 감정의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합리적으로 수집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만이 유죄를 만든다는 형사소송의 원칙을 확인한 판결이다.

부림 사건은 1981년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등 19명을 적발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사건이다. 부산지법 형사항소2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 자백을 했지만 진술서가 자백이 이뤄진 지 상당 시간 경과한 뒤에 작성된 데다 불법 구금 기간이 오래돼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부림 사건 피고인들이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사회주의 이념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번 무죄 선고는 부림 사건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불법 수집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피고인들을 고문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재판부는 고문의 존재 여부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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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40213/60845202/1

[ …..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당간부 교육을 위하여 발간한 사상방법론, 조선노동당규약 등을 교재로 ……. ]

[ ….. 반민족, 반민주적 팟쇼체제 …. 모든 분야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회로 전락 ….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 ……

….. 대중봉기로서 자유민주주의 현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 …… ]

대법원 1982. 10. 26. 선고 82도1861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범인은닉,범인도피][집30(3)형,186;공1982.1.1.(6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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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고인 1, 6, 7, 11의 각 상고이유 제4점 피고인 4, 8, 10, 15의 각 상고이유 제3점, 피고인 3, 9의 각 상고이유 제2점 및 위 동 변호인의 상고 이유 제1점에 관하여,

이른바 집회라는 것은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인이 특정한 공동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하므로 특정한 공동목적없이 우연히 만나는 것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모이는 사람의 다과에 아무소장이 있을 수 없고, 한편 계엄법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었을 때,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실내의 집회에 허가를 받게 하거나 일체의 정치목적의 옥내 외 집회를 금지하고 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해산된 정당 또는 예속단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회 재판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있거나 미치게 하기 위한 집회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관한 단속법규에 위반하거나 위반할 우려가 있는 집회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등을 금지하고 있는 터이므로

원심판결이 이와 같은 취지에서 그 거시증거를 종합하여 피고인등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민족, 반민주적 팟쇼체제로서 노동자. 농민 등 노동대중을 수탈 착취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사회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회로 전락되었다고 분석 평가하고 이러한 모순과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서로의 의견일치를 보아

부마사태, 광주사태의 실패에 비추어 대중봉기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면 의식화된 대중조직을 강화하여 결정적 시기인 대중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을때, 현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여 합법적 수단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해졌을때 대중이 의식화되고 그 조직이 강화되었을 때 등의 시기를 포착하여 대중봉기로서 자유민주주의 현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하고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에 필요한 여건조성방안으로 대중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식화 과정 즉 현실분석, 비판 반정부 비판의식 강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의식고양 등을 거쳐 단계적으로 대중을 의식화시키고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생, 고등학교학생, 노조원, 여공, 사북탄광 광부, 양서조합등 협동조합운동원 등을 상대로 소그룹활동 프로그램 또는 후라이데이. 세터데이 등에 따라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소위 의식화교육을 위한 모임을 되풀이하여

혹은 노동경제학, 사회계급론, 금일의 철학, 현대철학의 설계, 소외론 등 주로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서적과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당간부 교육을 위하여 발간한 사상방법론, 조선노동당규약 등을 교재로 반국가단체나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하는 의식화교육을 하고, 혹은 학원데모를 모의하거나 그 평가와 사후 수습책을 토의하고 혹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 살포하는 등 원심판시 피고인등의 범죄사실을 확정하고

이를 계엄법상의 계엄당국이 금지하는 집회 및 정치목적의 집회 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항 제4호 소정의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라고 판시하였음은 정당하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 채증법칙위반이나 법리오해 또는 심리미진의 위법을 가려낼 수 없고

소위 정치목적의 집회는 계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예를 들어 정당의 창당 등 정치적 결사를 위한 집회라던가 또는 대통령을 추대하기 위한 집회등 구체적이고 뚜렷한 정치목적을 위한 집회에 한한다고 해석할 근거도 없으므로 소론 논지는 독자적 견해에 불과하여 채용할 것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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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2079910

2003.3.

[ ….. 각계 원로 12명을 청와대로 초청 …. 조언을 들었다. ……..

…..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 ]

盧대통령, 각계 원로 조언 청취

2003.03.06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6일 낮 각계 원로 12명을 청와대로 초청, 1시간30분간 오찬 간담회를 갖고 북핵문제 해법과 대북송금 사건 특검대처 문제 등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 김지길 목사, 류강하 신부,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박형규 목사,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 이돈명변호사,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조준희 변호사, 청화 스님, 함세웅 신부 등12명의 원로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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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이같은 조언들을 경청하면서 북미관계와 북핵문제 등에 대해 평화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전쟁 가능성을 줄이는데 최우선점을 두겠다고 밝혔다고 청와대 송경희(宋敬熙) 대변인은 전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들 원로와 북핵 및 특검문제, 참여정부 국정운영에 대한 조언을 예정시간보다 20분간 더 길게 듣고 진지하게 토론했다고 송 대변인은 덧붙였다.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30670255

문재인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

등록 :2010-12-07

우리시대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회에 눈을 뜨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7일 오후 리영희 선생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 조문하고, 부인 윤영자(78)씨를 만나 “선생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문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범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부일 사건’을 통해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피고인을 변호하면서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다 읽었다고 하더라. 그것 보고 (노 대통령이) 의식화 되신 것”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말했다.

문 전 실장은 “리영희 선생이 참여정부 기간에 진실과화해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아 과거사 정리 작업에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최근에는 노무현재단의 고문을 맡아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도움을 주셨다”며 “참여정부를 많이 응원해 주셨다”고 소개했다.

문 전 실장은 “우리 세대들에게나 학생운동, 민족운동 한 사람들은 선생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며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을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지식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배우고 큰 사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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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52593.html

[ …..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 ………

….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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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지난 3월에 발간된 「대화」라는 책에서 소년 시절 社會主義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외삼촌 최모린을 존경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巨富였던 외조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사라진 뒤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세 번에 걸쳐 외조부의 재산을 털고 끝내 외조부를 총으로 죽인 머슴 문학빈(그후 일본군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짐)을 憧憬(동경)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관으로서의 軍생활과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軍의 불합리와 부패, 그리고 당시 기자 사회에서 나타난 부조리와 연줄관계에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리영희는 「그 代案으로서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1965년에 일어났던 文化革命(문화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후 일관되게 親北 논조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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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것과, 계급분화의 제 조건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사회를 보장·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 운동』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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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毛澤東을 극찬하고 있다. 그는 한 서방의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혁명은 못 했다. 毛澤東은 공업화와 인간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 놓았다.

리영희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문화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全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고 했다. 그 노선의 실현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는 1977년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下放(하방: 지식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노동을 시키는 운동)」을 「인간우선주의」의 실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그 예로 『가장 극심한 비판을 받았던 劉少奇도 北京 교외에서 현재 再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리영희의 毛澤東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毛澤東은 인간적으로 그릇이 매우 큰 영웅의 풍모를 지녔고 동시에 사상가·교육가·정치가·전략가·詩人 등 다양한 자질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는 더 나아가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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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1945년 이래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美 제국주의의 남한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이에 결탁한 李承晩과 朴正熙를 비롯한 독재정권과 그들의 계급적 기반인 親日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반면 그는 얼마 전 발간된 「대화」에서 북한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나라이며,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親日派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된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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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64336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毛澤東과 문화혁명 일방 美化
反美·대한민국 현대사 왜곡
386을 사상적 혼돈으로 인도

이동호

1981

[ …… 한국 … 1인당gnp 1천6백7달러 ….

북한 … 1인당gnp 7백50달러 ……..

…. 수출 …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 ………

….. 한국 … 93%가 공산품 ….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 ……… ]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경향신문 1983.6.22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gnp 4.6(남) 대 1(북)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단연 앞서 … 발전도 2배격차
중공업분야도 반전 … 거의 3배차

북한군사비 gnp 24% … 야욕 못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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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적경쟁을 벌였으나 70년대 중반기부터 남북한간에는 경제적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 규모(81년말 현재)는 한국이 gnp 6백22억달러 ,1인당 gnp 1천6백 7달러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gnp 1백36억달러, 1인당 gnp 7백50달러로 추계됨으로써 북한은 한국에 비해 gnp규모면에서 22%, 1인당gnp면에서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경제총량규모의 현저한 격차는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지속했고 특히 73-74년, 78-79년의 세계적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온 반면 북한은 최근 투자율이 30% 이상의 고율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의 낭비와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의 국면에 빠져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gnp에 대한 군사비부담률은 81년에 한국이 6.3%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23.8%로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수출면에서는 81년 한해 동안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나 되고 있다. 수출주종품목도 한국이 수출품목의 93%가 공산품인데 반해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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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중공

[ …. 1백명당 자전차 보유대수는 … 13.1대 …. TV는 … 2.7대 …..
….. 중공의 1인당 GDP는 3백10달러 …. 중공의 엥겔계수 … 60% 정도 ……

….. 82년 대만의 GDP가 2천3백42달러 ……. ]

1984.12.7. 매일경제

“서구를 따라잡자” 열기충만

대변신 … 중공경제

미나미 료오신

중공이 개방정책으로 선회한 이후 서방국들은 대중공잔출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컴퓨터부문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벌이면서까지 대중공 시장확대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이같은 추세속에 최근 중공의 대변화현장을 둘러 보고 온 일본의 미나미 료오신 일교대교수는 본사의 독자들을 위해 직접 쓴 견문록을 본사 이정근 동경특파원을 통해 보내왔다. 생동감이 넘치는 르포 형식의 이글을 3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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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물자는 대부분 배급제로 국가에서 할당되는 쿠폰으로 물건을 배급받던 것은 이제 옛날 얘기라고 한다. 상품생산이 급증하면서 배급품목은 대폭 줄고 있으며 현재는 쌀등 주식과 식용유 정도가 남아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활용품 자유매매

자전차 시계 TV 등도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문혁이 끝난 직후인 78년부터 82년 사이의 변화상을 보면 1백명당 자전차 보유대수는 7.7대에서 13.1대로 늘어났고 시계는 8,5개에서 18.8개 TV는 0.3대에서 2.7대로 늘어났다.또한 과거 인민복일색이던 복장도 변해 신사복을 입은 남자도 가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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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의 추계에 따르면 82년 중공의 1인당 GDP는 3백10달러로서 조사대상 1백4개국중 밑에서 18위에 속하는 낮은 수준이다. 인도 파키스탄 케냐와 비슷한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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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계수 60% 수준

중공의 엥겔계수(82년)는 대체로 60%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가 58.7%, 농민은 60.5%) 이것은 표의 제1계층의 평균치와 비슷한 것으로 인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같이 1인당 GDP 및 엥겔계수만을 통해 볼 때 중공은 인도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생활이 뒤진 국가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2년 대만의 GDP가 2천3백42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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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이웅평 대위 진술 민족에 남침위기 알리러 왔다

경향신문 198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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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는 자기가 북한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81년 리비아 수단 이집트등 중동지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동료들로부터 외국비행사들은 승용차 TV 냉장고 등을 소유하고 잘사는데 북한비행사들은 난로용 화목을 직접 채취하고 78년부터는 간식 기호품공급이 점점 적어 지더니 나중에는 담배 술까지 제한받는 등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이같은 북한실정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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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는 본사와 특별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활기찬 서울을 보고 깜작 놀랐다”고 밝혔다. 활기찬 서울이 바로 자유의 모습이요 자유의 댓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대위는 빽이 있어야 북한에서는 출세도 한다고 털어 놓았고 도둑이 많아 북한 주민들은 빨래를 마음대로 널어 놓지도 못하며 북한의 경찰격인 안전원도 컬러TV를 사고 싶어서 은행을 턴 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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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15일밤 MBC TV서 방영한 특집방송에서 이곳 생활의 소감을 밝히고 특히 백화점에 쌓여 있는 전자제품을 보고 “이것들이 모두 국산제품이 틀림없느냐”고 놀라면서 “국산품이면 조선말(한글)로 크게 딱지를 붙여서 알아 볼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공군사관학교에 들러 역대 공사교장들의 사진을 진열해둔것을 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외의 다른 사람 사진진열은 상상할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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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MBC TV 기자와 함께 서울 밤거리를 돌아 보고 대포집에서 시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일과가 끝난 후 휴식을 취하는 서울사람들의 생활을 보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북한서는 3간짜리 집에도 전기를 다 켜지 못하게 하는 판인데 이곳에 와 보니 낭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고 되도록 절약해서 국력을 기르는 데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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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3.5.18.

리웅평 북한 탈출 수기

모의전투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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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나 됐을까 싶은 전사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활주로 끝 내 비행기 밑에서 일하다가 나에게 기체를 인도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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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동장갑 한개 없나”

나는 겨우 이말 밖에는 못했다.그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줄게 뭐야요. 목테(머플러)조차 없고 솜신이 헤어져도 그것조차 갈아주지 않는 걸요 — “

그러고 보니 그는 목에 때가 더럽게 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신발은 앞이 터져 발싸개가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발은 동상에 걸린게 틀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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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0.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위키백과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폭탄 테러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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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9. 북한 수해물자 지원

[ …… 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

….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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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남한에서 수재로 인해 1백90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9월 8일 쌀 5만섬을 비롯한 구호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당시 은 구호활동을 ‘분단 40년 역사 이래 최고의 위업’이라며 대서특필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남한에 도착한 쌀은 쌀이라고 하기엔 질(質)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언제 수확한 것인지 색은 변색된 데다가 묵은 냄새까지 풍겨 밥을 지어 먹는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북한에서 보내온 쌀을 비롯한 구호물품은 북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한 사회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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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사람이 밥해 먹기에는 도정도 엉망이고 품질 자체가 저질이에요.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이런 천으로 어디 샤쓰를 만들어 입겠어요, 바지를 짓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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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수해물자 “최고품”자랑

[중앙일보] 입력 1985.03.09

관광시켜준 사찰주지는 노동당원|귀환어부 회견 1문1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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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만나보았는가.

▲숙소인 여관 종업원들과 접촉했을 뿐이다.

한 지도원이 우리 선원이 입고 있던 캐시밀론 반코트를 보고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마음대로 사 입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작년에 보낸 수재물자는 자기들 물건 중 최고품이라고 자랑하면서 남한 관리들이 물건이 탐이나 중간에 다 빼돌렸을 것이라고 악선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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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983201&ctg=

1984.10. 중공

[ …..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 ]

1984.10.22. 경향신문

북경의 자본주의 혁명

등체재의 확률 높은 도박
자유시장원리확대
좌파반발무마등 숙제로

중공당전체회의의 ‘경제개혁’ 선언의 의미

중공당 제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12전3중전회)는 20일 건국 이래 추구해온 소련식 중앙통제경제 정책을 철회하고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내년 1월 1일부터 실시키로 결정함으로써 과감한 자본주의식 경제제도의 도입을 공식화 했다.

‘경제혁명’이라고 불리는 이번 개혁조치는 전경제의 약75%를 자유화시키는 것으로서 그동안 중공이 추구해온 4개현대화계획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는데 큰 뜻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방식을 가미한 이번 개혁의 주요골자는 첫째 일부 전략품목을 제외한 공산품과 농산물의 국가쿼터제를 폐지, 중앙통제경제구조를 지방분권화하며, 둘째 모택동 시대의 가격 및 임금 구조가 수요공급의 원리와 생산성에 따른 적절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 적용한다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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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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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6.1.14.

“수재물자 보내고 일주일 강냉이죽 먹었다”

귀순 임종철 하사가 털어 놓은 북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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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상호교환방문때 북한기자가 찍은 한강주변 판자집을 보여 주면서 이처럼 거지가 득시글 거린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인민군 하전사들은 “쌍방 접촉으로는 조국통일이 이뤄질 수 없다.대화가 진행되는 기간이라도 수령님이 명령만 하면 전쟁을 일으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주민의 생활참상 = 북한주민은 날이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선 전주민을 대상으로 쌀배급량을 한끼당 무조건 50g씩 공제하기 때문에 식량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한가구에 한달에 무우 10kg, 배추 10kg, 된장, 간장, 소금이외에는 별다른 부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나 화보 같은데는 일부러 얼굴이 크고 둥근 사람을 나오게 해서 살찐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보통 노동자가 한달에 받는 월급이 50 – 70원이며 그나마 그나마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 아직도 목탄차와 소달구지가 많다. 평양시내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목탄차가 외곽으로 다닌다.

50대 이상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한국에 수재물자를 보낸 뒤에는 전주민과 군인들이 일주일씩 강냉이죽을 먹었다. 그래도 북한 주민들은 남한동포들을 도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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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0989

김만철 가족 서울 도착 기자회견
입력 1987.02.09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0985

김만철 가족 서울에서의 첫날

입력 1987.02.09 (21:00)

[ …..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 ]

1987.2.13

[귀순용사 임종철씨가 토로한 북한 실정]

● 앵커: 네, 김만철 씨의 막내아들 광호 군이 어저께 기자들에게 들려준 얘기를 듣고 작년에 중부선선에서 월남했던 귀순용사 임종철 씨가 북한의 실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 김광호군: 여기서는 거지가 욱실욱실 거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하면 거지아이들이 깡통차고 구경한다.

● 임종철(귀순용사): 북한의 모든 학교에 가면 그런 커다란 그림이 제가 학교 다닐 때 그 그림을 많이 봤는데 바로 창문 옆에는 신문팔이, 껌팔이 거지들이 모여서 줄을 서 있는데 부잣집 아이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부러워하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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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호군: 놀잇감 한 번도 못 가져봤고 이곳 백화점에서 실컷 만져봤다.

● 임종철(귀순용사): 아바이 놀음이라는 것은 김일성이 어릴 때 만경대 고향집에서 일본 놈들을 족치는 군사놀음을 아바이 놀음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어린이들의 군사놀이를 많이 하고 있고 놀잇감을 볼 수가 없습니다.

● 김광호군: 밀에다 물을 타서 끓여서 먹는 것이 밀죽.

● 임종철(귀순용사): 밀죽이라는 것은 밀쌀을 망에다 갈아서 거기다 물을 부어서 죽을 끓여 먹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도 북한에 있을 때 밀죽과 깡냉이죽을 많이 먹었는데 친척이 왔다 가면 쌀이 모자르고. 평상시에도 모자르기 때문에 죽을 많이 끓여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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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20. 경향신문

“성분 나쁘면 사람축에 못낀다”

김만철씨 일가 회견내용 …. 동토의 삶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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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례씨(김씨부인)=북조선에서는 15일에 한번씩 배급을 받습니다.

한살까지는 1백g을, 세살부터 어린이 유치원생 그리고 노인들은 3백g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틀분은 전쟁준비를 위해 전량미로 떼내 북조선인민들은 실제 13일분을 받는 것입니다.

배급식량은 쌀이 30%이며 강냉이등 잡곡류가 70%이기 때문에 13일치 식량을 15일동안 먹으려면 죽으로 끓여 먹어야 합니다.

또 부식물이 전혀 없고 배추의 배급량이 적어 식구가 많은 우리집으로서는 김치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읍니다.

간장 된장의 배급은 거의 없어 상점에 가서 사지만 줄 서 있다가 떨어지면 먹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간식은 아이들이 입밖에도 내지 못하며 설날과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15일 수령탄생일, 9월 9일 공화국설립일, 10월 10일 당창설일등 1년에 5번 아이들을 위한 사탕과 고기 5백g을 줍니다.

어떤 때는 1년에 1번 정도 간식이나 고기맛을 보며 살아온 적도 있습니다.

광숙이는 죽도 배불리 먹지 못한채 4년전부터 영양실조로 다리가 이렇게 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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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4.26

[김만철씨 일가족 새마을 향토 야시장 나들이]

● 앵커: 김만철씨 일가족이 오늘 낮 새마을 향토 야시장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 기자: 산뜻한 봄차림을 한 김만철 씨 일가족은 오늘 오후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에서 벌이고 있는 새마을 향토 야시장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 고향의 맛과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맛과 멋이 각 고향별로 마련된 향토음식점과 토산품 판매장에서 풍겨나와 아련한 기억을 더듬게 해주었습니다.

● 김만철: 야, 이거 나 오늘 너무 먹어서 배 터지겠는데….

● 기자: 특히 이북5도관에서는 두고 온 가족 소식을 김씨로부터 전해 듣고자 하는 안타까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오늘 이렇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 나와서야 처음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기자: 거기서 이런 음식, 요새도 맛볼 수 있습니??

● 김만철씨 부인: 아…우리는 이런 거 없어요. 먹어볼 수도 없어요.

있다는 게 강냉이…

● 김만철: 이북에서는 이 순대를 어쩌다 한 번 씩 먹을 때가 있죠.

근데 뭘 넣는가..

찹쌀같은게 없으니까..좁쌀도 없고, 강냉이쌀을 여기다 넣어요.

우수국산품 상설전시관을 찾아서는 조국의 기술수준이 세계적임을 새삼 깨닫게 됐고 생활필수품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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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3434_19322.html

[ …..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 ]

김일성 생일선물

[중앙일보] 입력 198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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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소감을 한마디만 더하라면 나는 서울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서울시민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럴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 얘기 또한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았을때 수세식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북한의 주택은 공동주택이다. 방2칸, 부엌1칸씩을 하모니카처럼 엮어놓았다. 인민반 (30가구)마다 설치된 화장실은 겨우 2칸. 물론 재래식이다. 30가구 1백50여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2칸뿐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니다.

목욕탕 사정도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청진시내에는 각구역별(인구5만∼10만) 로 공동목욕탕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연료사정 때문에 대부분 개점휴업상태다. 1주일에 한번(일요일) 문을 여는데 그날이면 목욕탕은 콩나물시루가 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목욕탕사용을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는다.

생필품 공급사정도 엉망이다. 세탁비누의 공급량은 연간 5장. 6개월도 채못돼 바닥이 난다. 주민들은 아직도 명태·정어리기름등에 가성소다를 섞고 이를 끓여 비누를 만들어 쓴다. 이때문에 주민들의 옷에는 항상 쾌쾌한 비린내가 배어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은 사겅이 다르다. 북한에는 「8·9호제품생산기업소」가 있다. 당간부들에게 특별공급하는 식품·피복·생필품등을 전문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또 이 기업소 노동자만을 특별검진하는 「8·9호검진대」란 것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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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95935&ctg=

[ …… 조밥에 된장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죽보다 낫겠다 …….. ]

“정치 바로하라” 편지

[중앙일보] 입력 198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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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가까운 연간에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고래 등같은 기와집에서 살게하겠다는 말이 25년도 넘었는데 인민들은 먹을것조차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 당간부들은「옛날 혁명시절에는 조밥에 된장을 찍어먹고도 강고하게 혁명을 했는데, 왜 일들을 열심히 하지않느냐」고 하지만 조밥에 된장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죽보다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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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 북한에는 우상화 작업이 심화돼 김일성·김정일 두사람에게「해와 달이 닳아 없어질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겠다」는 노래가 있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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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올 때 가져온 삼면경이 깨진 뒤 손거울조차 없이 지냈다 ……. ]

「혈육의 정」은 뜨거웠다.

[중앙일보] 입력 198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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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의 처 최봉례씨는 작년에 홍수 난 이후 북한에서는 배급이 잘 안돼 사료를 사다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고 생활의 어려움을 폭로.

전기 제품이라곤 전기 다리미밖에 없고 TV·냉장고·라디오도 없이 지냈으며 라디오 방송은 중앙에서 달아준 스피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고.

거울을 볼 시간 없이 주민들은 매일 쫓기고 그나마 거울이 귀해 최씨는 시집올 때 가져온 삼면경이 깨진 뒤 손거울조차 없이 지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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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86011&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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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길 잘했다”‥‥환한미소

[중앙일보] 입력 1987.02.10

김만철씨 일가는 놀라움과 신기함, 자유를 찾은 기쁨속에서 서울생활 첫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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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9일 상오9시 김치와 생선·육류등으로 자유세계에서의 첫 아침식사를 밝은 분위기 속에서 담소하며 즐겼다. 대부분 그릇을 깨끗이 비웠으나 김씨의 부인 최봉례씨는 『기름진 음식을 먹었더니 느끼하다』 며 반정도를 남겼다.

특히 나이어린 광호군과 광숙양은 국대신 물에다 밥을 말아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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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1.29. KAL기 폭파 테러

중동근로자가 대부분인 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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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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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데 중국은 오늘날 생활수준이 60년대의 우리나라 수준이라는 것이, 요사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 온 한국인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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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여름 월간지 ´샘이 깊은 물´
전두환씨를 변호한다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

1988.12.

[ …… 중국에이르기까지 대규모투자유치사절단이 서울을 찾고 한국기업전용공단을 조성하겠다고 …….

…… 소련 중국 동구는 물론 베트남까지 한국투자를 요구하고 …. 북한 눈치보다는 우리기업의 돈눈치를 더 …….. ]

1988.12.21. 동아일보

민주주의에의 확신을

김진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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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12%가 넘는 성장, 최저의 실업율, 정착된 흑자 그것도 경제규모(gnp)에 비하면 세계최고의 8%가 넘는 흑자 비율, 주가지수는 천정을 모르고 주책없이 뛰고 있읍니다. 원화는 더욱 세져서 IMF 8조국으로 넘어갔고 후진국졸업장을 받았읍니다. 외국사람들은 이제 한국에 투자를 못해서 안달이고 한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미국 서구선진국에서부터 남미 아프리카 인도양제국 그리고 동남아와 중국에이르기까지 대규모투자유치사절단이 서울을 찾고 한국기업전용공단을 조성하겠다고까지 합니다. 소련 중국 동구는 물론 베트남까지 한국투자를 요구하고 이제 북한 눈치보다는 우리기업의 돈눈치를 더 보고 있읍니다.

이제 한국의 신라방이 1천여년의 시간의 거리를 두고 세계 곳곳에 서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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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이래 아니 개화 근대화라는 역사의 변혁이 시작된 1백여년동안 이만큼 좋은 일이 한번도 없었읍니다. 경제와 올림픽과 국제관계와 나라의 힘의 크기가 이만큼 호황을 누리기가 과거에도 없었고 내일에도 쉬운것이 아니지요.

k형.

그런데 어째서 88년이 저무는 대한민국의 빛깔은 밝고 푸르지 못하고 어둡고 회색입니까. 왜 아직도 거리에는 화염병이 터지고 공공건물이 부서지고 심지어 국회의사당까지 난입하는 불법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읍니까. 왜 시민들의 깊은 가슴속엔 내년봄의 걱정이 도사리고 있읍니까.

참 세상이 기가 막히고 더러워서 요새 시국을 걱정하면 극우를 초래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의심을 사고 한국시민의 증명된 저력을 믿고 폭력급진주의자들의 진실을 외면하는 자기모순때문에 이들이 이나라 중심세력이 못된다고 하면 좌경과 ‘민중’을 경시한다고 면박을 받습니다. 요새는 입다물고 글 안쓰는 일이 제일 편한 세상이 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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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 곳곳에 한국 상품 밀물

[중앙일보] 198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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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 터진 경제교류 라면부터 가전품까지 합작9개 기업진출…천만불 투자…중국산 죽제품·석탄 등 한국시장에 등장

그러나 20세기말 그 같은 흐름에는 커다란 변혁이 왔다. 우리의 상품,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본이 중국대륙 곳곳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49년 중국에 공산당정부가 들어서면서 근 40년간 뚝 끊겼던 양국관계가 중국 측의 변화로 재개되면서 그 같은 문물의 역류가 우리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가 한중사이에 시작되고 있는 느낌이다.

12억 인구의 심장부인 수도 북경의 럭키금성상사 봉제완구공장에는 현지인들이 서울에서 가져간 재봉틀과 원단으로 곰인형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완구공장에서 멀지 않은 두산그룹이 운영하는 식당에선 중국인들이 냉면·비빔밥·불고기 등 전통 한국식 음식을 즐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한국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흑룡강성 하얼삔에는 지금 삼익악기의 피아노 생산준비가 한창이다.

한두수산이라는 크지 않은 수산업체는 이미 87년초부터 현지인들에게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 가며 중국바다에서 광어·홍어 등 고급어종을 잡느라 여념이 없다.

과거 한중교역의 중심지였던 산동성 청도에는 삼양식품의 라면공장이 곧 들어서 빠르면 내년부터 라면이 생산된다. 6백만 달러를 중국 측과 반반씩 나누어 투자한 청도 삼양식품유한공사의 기계설비 일체는 물론 국산제품으로 충당된다.

소도시까지 진출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TV에는 이미 대우가 현지에서 만든 퀸(중국명 황후)이라는 상표의 냉장고 광고가 나간 지 수개월이 지났으며 그 냉장고를 쓰는 중국인들은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에 적잖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또 4대 경제특구의 하나인 중국 남쪽 하문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제공한 퍼스널컴퓨터 앞에서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컴퓨터수업을 받느라 열심이다.

지방 작은 도시의 구멍가게에도 오리온 캐러멜이 진열되고 있으며 중국 최대의 상공업도시인 상해에는 삼성냉장고가 우리 상표를 그대로 붙인 채 판매돼 인기를 끌고있다.

이 같은 일들은 우리의 발길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중국대륙 곳곳에 미치고 있는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심지어 지난 6월 북경 천안문사태 때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구호 중 「한국대학생들의 과격성을 본받자」는 구호까지 등장, 무형의 시위기술()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과의 교류는 우리의 상품과 자본이 일방적으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중국제 돗자리와 대나무 우산이 서울시내 유명백화점에서 팔리고 있으며 중국산 석탄이 우리 가정의 아궁이에서 타고 있기도 하다.

길림성에 본사를 두고 있는 무역회사인 길죽유한공사와 요령성의 무역상사인 중요유한공사가 한국진출을 위해 지난 1월 우리 정부에 지사설립신청서를 제출해 놓고 있으며 이미 관계자 몇 명은 서울을 드나들며 국내 무역업계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85년 광동에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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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기업의 중국진출은 봉제완구업체인 한스물산이 85년 10월 광동성 광주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테이프를 끊었다.
그 후 지금까지 중국에 진출한 기업은 9개 업체로 투자금액은 1천만 달러에 이른다.
7월말 현재 정부로부터 투자허가를 받아놓고 있는 업체까지 합치면 모두 19개 업체로 투자금액은 1천4백14만 달러에 달하며 투자계약기준으로 보면 24개 업체 3천7백만 달러에 이른다.

적어도 금세기 중에는 코리아로드가 뚫리기 힘들 것으로 예상됐던 중국에 우리 기업인들이 「남조선」사람임을 숨기지 않고, 아니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이 도시, 저 도시를 뛰고 있는 상황은 현재의 투자규모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직접투자에 앞서 양국 간 교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등소평의 중국정부가 79년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작된 양국 간 교역(홍콩·일본 등을 거치는 주로 간접교역) 규모는 80년 1억8천8백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9년이 지난 88년엔 교역량이 17배 늘어난 31억9천6백만 달러(우리측 수출 18억9백만 달러, 수입 13억8천7백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일본·서독에 이어 중국이 어느새 제4의 교역상대국이 된 것이다.

올해 교역규모는 다시 작년보다 30%정도 증가한 4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무역진흥공사측은 전망하고 있다.

양국 간 상품이 오가는 것은 물론 직접 투자까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사람의 왕래 또한 빈번하다.

북방교역에 특히 적극적인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비롯, 이건희 삼성회장, 김영도 진도사장 등 기업인들을 필두로 이선기 무역진흥공사사장, 문희갑 전 경제기획원차관(현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 김복동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고문, 장덕진 농업진흥공사이사장이 작년 이후 중국을 다녀온 주요 국내인사들이다.

각료급 상호방문

또 지난 5월초에는 북경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 이규성 재무장관이 참석, 공산당정부 수립 이후 중국을 최초로 방문한 한국각료가 됐으며, 당시 같이 참석한 국내금융계 인사로는 김건 한은총재, 신병현 은행연합회장, 시중은행 및 특수은행의 은행장, 증권회사사장 등 1백50여명에 달했다.

중국의 거물급들도 다수 서울을 다녀갔다.

중국국무원산하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CCPIT) 정홍업 회장대리(장관급)가 지난 5월 방한한 것을 비롯, 작년 하반기 이후 한국을 다녀간 주요 인사로는 CCPIT 부회장 서대유, 산동성 분회장 이유, 요령성 분회부회장 고충무, 그리고 CCPIT와 개방정책 추진의 양대 기관인 CITIC(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 요령성 지사장 이봉, CITIC 자회사인 중신무역공사 두표 사장, 길림성의 대한투자 유치단 진강증 단장 등1백명에 이른다.

거물급들의 잦은 왕래와 함께 양국 간 교역 및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양국 모두에 경제적 실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우리 기업을 자국에 유치함으로써 자본과 기술 도입은 물론 고용수준도 향상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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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

[ …..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 ]

1988.7.30. 경향신문

미일중소 4강 한반도인식급변

알게 모르게 교차교류 활발

한국발전모델에 매력
미소 데탕트가 촉진제

남북한의 대화진전 따라 역학구조 큰 변화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소 4개강국의 상호접촉이 최근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아직은 공식화하지 않고 내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으나 지금까지 거의 관계가 두절되어 왔던 양대진영의 교차교류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회에 회담을 제의하고 일본이 북한과의 직접접촉을 꾀하는가 하면 중국과 한국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또 지난달 열린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나오는등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눈에 띤다.

이같은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양대진영의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가 큰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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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2. 김대중

[ ….. 사회주의 갖고는 되지 않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

….. 모스크바공항 …. 국제전화시설이 안돼 있고 화장실은 악취가 심해 도저히 ……. ]

사회주의는 안되겠더라

[중앙일보] 1989.02.18

김대중 평민당총재는 17일 스웨덴·헝가리 등 유럽5개국을 순방한 감상을 이렇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헝가리를 참 잘 가보았다. 가보니까 사회주의 갖고는 되지 않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김 총재는 『헝가리는 그래도(물건을 사기 위해) 줄서는 사람은 없어(다른 동구권국가보다는) 좀 나은 것 같더라』면서 불과 5시간 기착했던 모스크바공항의 경험담을 말했다.

『오후 4시쯤 모스크바공항청사의 대기실이 어두운데도 전기불이 켜져 있지 않아 왜 안켜느냐고 물어보니까 오후 5시가 돼야한다고 하더라. 공항기착대기실에 국제전화시설이 안돼 있고 화장실은 악취가 심해 도저히 국제공항으로 보기 어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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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네덜란드·스웨덴·이탈리아에서 만나본 대부분의 수상·외무장관·국회의장 등 고위 정치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당서기장을 도와 그의 개혁·개방정책이 성공하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을 갖고있더라.』

『서구지도자들의 이런 말이나 모스크바공항의 경험을 유추, 확대해보면 소련은 군사분야만 초일류국이지 나머지 분야는 2, 3류국인 것이 분명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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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310437

1989.3. 모스크바

[ ….. 황량하다 못해 차라리 황폐한 느낌이다. 도심지 역시 먼지가 많아 거리의 청소조차 별로 하지 않는 듯하다. …….

…… 자동차…엔진에서는 탱크 소리가 나고 차문조차 잘 여닫히지 않는다. …….. ]

1989.3.22. 동아일보 1면

공산혁명 – 좌절된 신화

소련 헝가리를 가다

남시욱

모스크바의 거리를 며칠만 다녀보면 페레스트로이카가 왜 소련에 불가피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년동안 이나라 지도자들이 추구해온 공산주의 혁명의 꿈은 쓰라린 좌절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소련에 부강한 공산주의사회가 이룩될 것이라던 60년대의 ‘흐루시쵸프’의 예언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80년대는커녕 90년대에 들어가서도 소련의 장래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소련 스스로 인정하게끔 되었다.

낡고 지저분한 택시

3월 중순의 모스크바는 황량하다 못해 차라리 황폐한 느낌이다. 도심지 역시 먼지가 많아 거리의 청소조차 별로 하지 않는 듯하다. 다른 나라의 대도시에 있는 거리의 쓰레기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옛날에는 웅장했을 건물들 역시 단장되지 않는 것 같다. 보수할 예산이 모자란 듯하다.

거리를 나서는 사람들이나 자동차 모습도 마찬가지다. 관광객 유치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의 택시치고는 너무도 낡고 지저분하다. 자동차의 크기는 중형이 많은데 어찌된 셈인지 엔진에서는 탱크 소리가 나고 차문조차 잘 여닫히지 않는다. 자동차에 관한한 우리나라 60년대 중반수준이다. 가끔 눈에 띠는 좋은 차는 자세히 보면 오렌지색 번호판을 단 외교관 차들이다.

한마디로 모스크바는 초강대국의 수도다운 화려함도 장엄미도, 또한 서방의 대도시 같은 윤기도 활력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공산주의의 메카인 모스크바가 이럴진대 오늘날 소련이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더 물어볼 것이 없다.

핵무기 가진 개도국

‘핵무기를 지닌 개발도상국’ – 이 말은 소련을 평가한 고르바쵸프 자신의 표현이다. 따라서 개혁은 불가피하다. 일대 수술 없이는 소련사회는 더 발전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쇠퇴일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제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실패하면 소련은 영원히 2류 3류국가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아니 우리 사회는 붕괴할지도 모르지요’

만나는 소련의 지식인들마다 거침 없이 내뱉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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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동독

1990.9.2. 동아일보

동베를린 시민 집단장에 큰관심

40년간 개량 안해 낡고 우중충

보다 쾌적한 주거생활. 동베를린시민 대부분이 최근 들어 갖게 된 가장 절박한 욕구중의 하나다.

자유화 이후 특히 경제 통합 이후 실질적인 구매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주택을 보수하고 실내를 새롭게 꾸미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허술한 욕실 등 위생시설과 낡아 빠진 난방시설의 현대화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동베를린 시민들은 지적한다.

주거환경에 대한 동베를린 시민들의 새로운 욕구는 최근 서독의 한 시장조사기구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사에 따르면 동베를린시민의 38%가 주택의 각종 내부시설을 새롭게 하는데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28%의 시민은 문과 창문, 16%는 다락벽 현관의 보수가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으며 14%는 주택의 바닥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라 여기에 최우선적으로 돈을 쓰겠다고 말해 주택의 현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택의 보수 , 주거환경개선에 대한 욕구가 이처럼 높은 것은 40여년간의 사회주의체재하에서 주택개량사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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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붕괴 시점에는 2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철거해야 마땅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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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로변의 풍경들이 초라 하고 우중충 ……. ]

[ …… 표정이 어둡고 어딘가 실의에 빠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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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철로변의 풍경들이 초라 하고 우중충하여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서독과의 격차가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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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개정판 |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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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을 여행할때는 들판이나 집들이 윤기가 흘렀는데 동독은 한마디로 우중충 하다.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게르만 민족 특유의 고자세는 있어도 서독인들은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데 동독인들은 표정이 어둡고 어딘가 실의에 빠진 사람들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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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6. 천안문 시위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28

중국 천안문사태 5백여명 사망

입력 1989.06.04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40

천안문사태 외신 종합보도

입력 1989.06.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39

중국 천안문광장 시위진압 사망자 수천명

입력 1989.06.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63

천안문사태 북경 현지상황 영상

입력 1989.06.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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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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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Hand in Hand’를 불렀다. 서울올림픽의 주제가는 그들의 혁명가였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삽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바츨라브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민주화된 뒤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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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904&num=335

2009년 겨울호

[특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김주성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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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가

작 사 임종석

작 곡 윤민석

깃발을 들자 투쟁의 깃발
이제 우리 출정이다
치떨리는 분노 가슴에 품고
결전의 전장으로

북을 울려라 진군의 북을
태풍으로 몰아쳐 가자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에 대한 뜨거운 믿음으로
마침내 자주 민주 통일의 길로
달려 나가자

식민지 조국의 가슴 참 해방을 안고
먼저 가신 선배 열사의 뜻 이어받아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기쁘게 싸우러 가자

* 윤민석 — 김남주

[ ….. 김남주 시인처럼 나도 기록자나 예술가에 머물지 않고 전사로 불리고 싶었다. ……..

….. 가슴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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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떨어져 노래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나름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성격이기도 하다. 노래에서 나가자, 싸우자고 해놓고 나는 안 나가고 안 싸우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시위 현장에서도 늘 맨 앞에서 싸웠다. 딸이 나한테 하는 얘기가 있다. 아빠는 중간은 없이 모 아니면 도라고 말이다. 나의 롤모델은 실천적으로는 김남주 시인이었고, 정서적으로는 문익환 목사였다. 김남주 시인처럼 나도 기록자나 예술가에 머물지 않고 전사로 불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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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망했다고 표현한 것은 1992년 이른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된 것을 뜻한다. 당시 1심 법원은 남한 조선노동당의 실체 자체를 부인하고,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이라는 조직 사건으로 규정했다. 윤민석은 이 조직의 하부(애국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 혐의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 노래를 만든 건 사실인가?

“내가 가담했던 그룹의 부탁을 받고는 노래 두 곡을 만들어줬다. 그때는 내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면 뭐든지 다 했다. 누군가 찬불가를 만들어달라고 했다면 제가 천주교 신자였더라도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때는 운동이 나였고, 내가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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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불덩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다. 활동하다가 잡히거나 하면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에서 그때는 가슴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기도 했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늘 우선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왠지 누군가에게 미안했다. 나는 행복하면 안 되고, 즐거우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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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19615.html

“삶으로 내 노래 책임지고 싶었으나…더는 못 버티겠다”

201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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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노맹

1989.11.12.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선언문」

『부르좌 지배체제를 사회주의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전쟁의 시작을 선포한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혁명에 앞장서야 한다』

사회주의혁명 주장 유인물 나돌아

[중앙일보] 1989.11.13

12일 오후5시30분쯤 노동자대회가 열리고있던 서울대 집회에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선언문」이란 제목의 유인물 5백여 장이 뿌려졌고 유인물을 돌리던 20대 여자 1명이 학생들에게 붙잡혔다.

유인물은 『부르좌 지배체제를 사회주의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전쟁의 시작을 선포한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혁명에 앞장서야 한다』는 등의 과격한 내용으로 유인물을 돌리던 20대 여자는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 사무실에 잡혀온 뒤 감시 소홀을 틈타 창 밖으로 투신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전노협집회장서 여인이 뿌려 학생들에 붙잡히자 투신기도

주최측은 『유인물은 전노협을 좌경으로 몰기 위한 공작일 가능성이 크며 이날 집회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참석자들에게 뿌려진 유인물들을 소각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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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히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동지들에게

남한땅에도 마침내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 출범했음을 뜨거운 감격으로 보고 드린다 ……… ]

[ …. 통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대상으로 선정, 탈취계획서 를 작성 …..

…..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 …….. ]

총파업 일으켜 체제전복 목표

사노맹 수사 안기부 발표 요지

혁명지도할 노동자당 결성 기도
재벌재산 몰수 등 내세워 빈민 호응 모색
학-노 등 각분야 침투 민족민주혁명 확산

1990.10.31 / 18 면

사노맹결성과 목표

사노맹은 89년 11월12일 전노협결성을 위해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현장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출범 선언문을 뿌리면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노맹은 이 유인물에서 “특별히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동지들에게 남한땅에도 마침내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이 출범했음을 뜨거운 감격으로 보고 드린다”며 “부패타락한 지배체제의 한 복판을 뚫고 이땅에서 태어나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속에 성장해 온 혁명적사회주의자 들이 그 모습을 온 세상에 당당히 드러냈다”고 그 자생성을 강조했다.

사노맹의 핵심지도부는 84년 서울대학도 호국단 총학생장이었던 백태웅(27ㆍ가명 이정로ㆍ서울대 공법4년제적)과 노동시인 박노해로 알려진 박기평(32) 등으로 이들은 남XX 김XX 김XX 등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 결성에 합의,89년2월 노동계 대학가의 핵심인물 1백40여명을 규합, 사노맹 출범준비위를 구성한뒤 89년11월 출범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세포분열식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이른바 공장의 혁명요새화 를 꾀해왔다.

사노맹의 목표는 노사분규 현장에서 노동해방선봉대 전투특공대 등을 조직,노동자를 배후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뒤 기간산업 마비와 경제교란 등 결정적 시기에 봉기,일거에 체제를 뒤엎고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이를위한 90년도 중점수행 과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선동의 대중적확산 노동자 계급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등 8대 투쟁목표를 제시,노동자 농민 빈민 등 소외계층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위해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 민중위원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조직체계

사노맹은 레닌의 당조직전술원칙 을 모방, 중앙위원회 를 최고지도부로 그 밑에 조직위 편집위 각시도지방위 를,부설조직으로 남한사회주의 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 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 학생연맹을, 조직원파견 그룹으로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화사 등을 두고 단위조직을 철저히 비밀운영해왔다.

특히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사무국과 조직수호,면학,유인물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중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개발,무기탈취계획,독극물개발 등의 특수임무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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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관리와 비밀활동

각 분야의 혁명인자 를 물색,자기소개서를 제출케한뒤 사상성,비밀활동 능력 등 50여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된다. 이들은 1개월~1년의 사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가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는다.

이들은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안가 를 확보해 놓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두었으며,검거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시 소각 또는 삼키도록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중이었다. 사노맹조직원들은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1인당 3백만~1천만원씩 책임제로 모금하고 친지집을 상대로 강 절도를 하거나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을 받고 속셈학원,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주요투쟁사례

혁명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합법적인 월간지 노동해방문학 과 출판사 노동문학사 를 통해 89년4월~12월까지 15만여부의 선전책자를 발간했다. 또 비합법적인 지하기관지 한걸음더 새벽바람 과 유인물 긴급전술결의 등 40여종 20만부 가량을 제작,전국 대학과 노동현장에 뿌렸다.

사노맹은 각 운동단체를 ndr(민족민주혁명) 노선으로 통일하기위해 민중당,인민노련,전노협,카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정파투쟁 을 전개하고 노동자신문 말 지,대학신문 등의 기고문을 통해 ndr 이념전파 및 타정파와의 사상투쟁을 벌여왔다.

또 공장의 혁명요새화 원칙에 따라 무장봉기때 방위산업체인 창원공단내 통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대상으로 선정, 탈취계획서 를 작성했으며 인천지방위원회에선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하는 등 무장봉기계획을 짜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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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인물 인적 사항

안기부가 발표한 사노맹의 핵심지도부 관련자들의 인적사항,경력 등은 다음과 같다.

백태웅(27ㆍ사노맹총책겸 중앙위원ㆍ수배중)=부산 동성고를 졸업하고 8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84년3월 서울대총학생회장을 지내다 그해 9월 제적됐다. 84년11월 서울대 교대 프락치사건으로 1년간 복역했으며,87년6월 노동자 해방투쟁동맹 핵심 간부로서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한국전자 노사분규를 배후 선동한 혐의로 수배됐다.

89년 4월이후 이것이 정통 정치노선이다 의 준말인 이정로 라는 가명으로 월간노동 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사회주의 위기의 근원,고르바초프 개혁조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박기평(32ㆍ사노맹 중앙위원ㆍ수배중)=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 의 준말인 박노해 라는 가명으로 노동의 새벽 등 시집을 냈다. 77년2월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한뒤 82년7월 서울 성수동의 마그마 운전사,84년 6월에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안남운수의 운전사로 일했다. 89년4월 박노해 시인의 긴급 호소 라는 유인물에 현실적 통일방안을 가진 김일성을 존경한다 는 내용의 존경하는 김주석 이라는 시를 게재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됐다. 83년3월 김XX와 결혼했고,89년 4월부터는 노동해방문학에 파업에 나선 노동형제들에게 김우중회장의 자본철학에 전면비판 등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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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ID=9010311803

[ …… 김일성주석을 뜨거운 감격으로 떨리는 입술로 당신을 부른다

주체적 각성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존경하는 김일성주석 …….. ]

안기부 발표 / 박노해씨 「투쟁성향」 분석

[중앙일보] 1991.04.03

◎시 내용에 김일성 찬양문구 많아/사용자 대한 근로자 적대감 고취/「신혼비용」·「호랑이사냥」작전 통해 자금 모아

안기부는 「얼굴없는 노동자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씨에 대한 조사결과 「박씨가 북한을 적극 추종하고 김일성을 숭배하면서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신봉해온 사실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안기부의 발표문중 박씨의 사상·투쟁성향 부분과 「보급투쟁」으로 활동자금을 확보한 경위 등을 요약한다.

◇친북적 사상성향=박씨는 그동안 일부잡지와의 서면인터뷰·수기 등을 통해 「사노맹은 북한과 전혀 관계가 없는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민주주의자· 평화주의자다」고 주장했으나 박씨가 쓴 시를 보면 북한과 김일성을 적극 추종하고 있다고 안기부는 분석했다.

박씨는 89년 6월 사노맹기관지 「노동해방문학」에 게재한 「존경하는 김주석」이란 제목의 시에서 『동토의 왕국은 자부심 가득한 「인민의 왕국」이라 한다』 『북조선 근로인민의 자랑스런 대표자, 김일성주석을 뜨거운 감격으로 떨리는 입술로 당신을 부른다』 『주체적 각성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존경하는 김일성주석』이라는 등 김일성을 적극 찬양했다는 것.

박씨는 또 조사과정에서도 ▲나는 김일성주석을 존경한다 ▲양반의 앞잡이였던 이순신,민족주의자에 불과한 김구에 대한 교육은 하면서 김일성장군이 위대하다는 교육은 안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죽창을 세워들고」란 자작시에서도 『총과 낫·죽창을 들고 자본가를 쓸어 버리자』 『노동해방·농민해방을 피로써 쟁취하자』는 등 섬짓한 표현으로 자본가·사용주에 대한 근로자들의 적대감을 고취시켜 왔다는게 안기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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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생활주변=박씨는 그동안 월간지등에 투고한 글과 유인물 등을 통해 자신이 심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해왔으나 실제로는 노동자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호화·사치생활을 해왔다는 것이 안기부의 설명이다.

박씨는 1월7일부터 자신의 비밀아지트인 서울 잠실 한신코아오피스텔에 여자조직원 김기선씨(27·노동문학사 기자)를 비서로 근무시키면서 자신의 건강관리계획서를 짜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씨가 「컴퓨터·소프트웨어회사 운영계획서」라는 위장명칭으로 수립한 박씨에 대한 건강관리계획서는 ▲매월 5만원짜리 자라 5마리와 매일 3회 월40만원어치의 보약 복용 ▲매끼 백화점에서 구입한 신선한 야채와 해물류로 식단 작성 ▲정수기 설치,생수복용 ▲매일 수영장에서 체력단련 등 노동자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호화생활을 담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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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549182

[ …. 통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대상으로 선정, 탈취계획서 를 작성 …..

…..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 …….. ]

총파업 일으켜 체제전복 목표

사노맹 수사 안기부 발표 요지

혁명지도할 노동자당 결성 기도
재벌재산 몰수 등 내세워 빈민 호응 모색
학-노 등 각분야 침투 민족민주혁명 확산

1990.10.31 / 18 면

사노맹결성과 목표

사노맹은 89년 11월12일 전노협결성을 위해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현장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출범 선언문을 뿌리면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노맹은 이 유인물에서 “특별히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동지들에게 남한땅에도 마침내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이 출범했음을 뜨거운 감격으로 보고 드린다”며 “부패타락한 지배체제의 한 복판을 뚫고 이땅에서 태어나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속에 성장해 온 혁명적사회주의자 들이 그 모습을 온 세상에 당당히 드러냈다”고 그 자생성을 강조했다.

사노맹의 핵심지도부는 84년 서울대학도 호국단 총학생장이었던 백태웅(27ㆍ가명 이정로ㆍ서울대 공법4년제적)과 노동시인 박노해로 알려진 박기평(32) 등으로 이들은 남XX 김XX 김XX 등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 결성에 합의,89년2월 노동계 대학가의 핵심인물 1백40여명을 규합, 사노맹 출범준비위를 구성한뒤 89년11월 출범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세포분열식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이른바 공장의 혁명요새화 를 꾀해왔다.

사노맹의 목표는 노사분규 현장에서 노동해방선봉대 전투특공대 등을 조직,노동자를 배후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뒤 기간산업 마비와 경제교란 등 결정적 시기에 봉기,일거에 체제를 뒤엎고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이를위한 90년도 중점수행 과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선동의 대중적확산 노동자 계급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등 8대 투쟁목표를 제시,노동자 농민 빈민 등 소외계층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위해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 민중위원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조직체계

사노맹은 레닌의 당조직전술원칙 을 모방, 중앙위원회 를 최고지도부로 그 밑에 조직위 편집위 각시도지방위 를,부설조직으로 남한사회주의 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 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 학생연맹을, 조직원파견 그룹으로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화사 등을 두고 단위조직을 철저히 비밀운영해왔다.

특히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사무국과 조직수호,면학,유인물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중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개발,무기탈취계획,독극물개발 등의 특수임무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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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관리와 비밀활동

각 분야의 혁명인자 를 물색,자기소개서를 제출케한뒤 사상성,비밀활동 능력 등 50여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된다. 이들은 1개월~1년의 사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가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는다.

이들은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안가 를 확보해 놓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두었으며,검거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시 소각 또는 삼키도록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중이었다. 사노맹조직원들은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1인당 3백만~1천만원씩 책임제로 모금하고 친지집을 상대로 강 절도를 하거나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을 받고 속셈학원,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주요투쟁사례

혁명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합법적인 월간지 노동해방문학 과 출판사 노동문학사 를 통해 89년4월~12월까지 15만여부의 선전책자를 발간했다. 또 비합법적인 지하기관지 한걸음더 새벽바람 과 유인물 긴급전술결의 등 40여종 20만부 가량을 제작,전국 대학과 노동현장에 뿌렸다.

사노맹은 각 운동단체를 ndr(민족민주혁명) 노선으로 통일하기위해 민중당,인민노련,전노협,카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정파투쟁 을 전개하고 노동자신문 말 지,대학신문 등의 기고문을 통해 ndr 이념전파 및 타정파와의 사상투쟁을 벌여왔다.

또 공장의 혁명요새화 원칙에 따라 무장봉기때 방위산업체인 창원공단내 통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대상으로 선정, 탈취계획서 를 작성했으며 인천지방위원회에선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하는 등 무장봉기계획을 짜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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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인물 인적 사항

안기부가 발표한 사노맹의 핵심지도부 관련자들의 인적사항,경력 등은 다음과 같다.

백태웅(27ㆍ사노맹총책겸 중앙위원ㆍ수배중)=부산 동성고를 졸업하고 8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84년3월 서울대총학생회장을 지내다 그해 9월 제적됐다. 84년11월 서울대 교대 프락치사건으로 1년간 복역했으며,87년6월 노동자 해방투쟁동맹 핵심 간부로서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한국전자 노사분규를 배후 선동한 혐의로 수배됐다.

89년 4월이후 이것이 정통 정치노선이다 의 준말인 이정로 라는 가명으로 월간노동 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사회주의 위기의 근원,고르바초프 개혁조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박기평(32ㆍ사노맹 중앙위원ㆍ수배중)=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 의 준말인 박노해 라는 가명으로 노동의 새벽 등 시집을 냈다. 77년2월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한뒤 82년7월 서울 성수동의 마그마 운전사,84년 6월에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안남운수의 운전사로 일했다. 89년4월 박노해 시인의 긴급 호소 라는 유인물에 현실적 통일방안을 가진 김일성을 존경한다 는 내용의 존경하는 김주석 이라는 시를 게재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됐다. 83년3월 김XX와 결혼했고,89년 4월부터는 노동해방문학에 파업에 나선 노동형제들에게 김우중회장의 자본철학에 전면비판 등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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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ID=9010311803

[ …. 무장봉기를 통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국가건설 ……

…. 노동해방문학에 쓴 비폭력노선은 민중에 대한 테러이다 ……

…. 죽창을 세워들고 등의 자작시를 ……. ]

[ ….. 존경하는 김주석 이라는 시에서는 김일성을 극렬하게 찬양 ……. ]

안기부 발표 박씨 도피생활

김일성 찬양시 여러편 써

오리스텔 3곳 얻어 여 조직원과 동거도

1991.04.04 / 22 면

노동자시인 박노해씨를 중심으로 한 사노맹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는 근래있었던 공안사건중 최대규모이다.

구속자도 54명이나 되며,안기부는 지명수배자가 1백50여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기부는 3일의 수사발표에서 박씨의 노선이 무장봉기를 통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국가건설이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그 증거로 박씨가 월간지 노동해방문학 에 쓴 비폭력노선은 민중에 대한 테러이다 라는 제목의 글과 죽창을 세워들고 등의 자작시를 들고 있다.

안기부는 또 그간 제도권 정치에 관심을 보여 온 민중당의 정책위원장 장기표씨나 부총재 이부영씨 등에 대한 박씨의 비난도 그같은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장씨의 경우 박씨의 사노맹조직이 그를 민중당 조직에서 밀어내려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안기부는 이와함께 박씨가 쓴 여러편의 글을 예시하며 박씨가 북한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 김일성을 숭배해왔다고 밝혔다. 89년6월 노동해방문학 에 쓴 존경하는 김주석 이라는 시에서는 김일성을 극렬하게 찬양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안기부는 박씨가 조직원들에게 자살용 독극물의 개발을 지시했다든지,조직이 보호를 위해서는 생명도 아끼지 말라고 교육한 점을 들어 사노맹을 극렬 지하테러조직으로 이끌어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안기부는 박씨의 도피생활과정에 대해서도 발표자료에서 상당부분을 할애해 언급하고 있다. 박씨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호화-사치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 안기부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박씨는 서울의 잠실과 강남 등 모두 세곳에 오피스텔을 얻어두고 자신의 처와 여비서 등과 함께 생활해 왔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압수된 박씨의 건강관리계획서 에 박씨가 매달 3번씩 5만원짜리 자라를 보신용으로 먹도록 되어있었다든지 매일 수영장에서 체력을 단련토록 정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지적하고 있다. 박씨는 이 과정에서 미모의 여자조직원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처 김XX씨와의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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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ID=910404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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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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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자신이 내무부차관보로 재직시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1987년 헝가리를 방문했던 당시를 언급했다.

“그 때는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인데 수상실로 들어가자 수상의 첫 인사가 ‘축하합니다’였다”며 “당신네 나라는 2차대전후 선조를 잘 만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기에 오늘날 발전한 게 아니냐. 2차대전 전 산업화를 했음에도 완전 평등이라는 달콤한 이론에 넘어가서 동구권은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세계사를 미리 예측한 사람은 이승만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부심을 가졌다” 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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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4

“경제 대통령 이승만”
written by. 이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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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대한 역사의 교훈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러시아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에 의하여 표명된 적이 있다. 1991년 11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대그룹의 정주영(鄭周永)과 이명박(李明博)에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이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에게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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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명박,《신화는 없다》, 김영사, p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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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승만과 김구의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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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반동반역의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작살내고 있습니다.

꼴통반동반역의 무리들과 싸운 박근혜는 전사했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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