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

2019.08.09 03:27

건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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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

[ ……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0월에 여순.순천반란사건이 ……

….. 군대, 경찰 등 주요 국가 기관내에 공산주의자들(남로당)이 다수 침투 …….

…… 6.25전쟁을 치르면서 …….. ]

[3] 유영익 교수에게 듣는 ‘이승만에 대한 논란 몇 가지’

유영익 교수 강의노트

201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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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대통령이 건국 과정에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친일파를 멀리했다. 집권 후 그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신생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각료 중에 친일 인사를 가급적 기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0월에 여순.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국군 병사들이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한 것이다. 조사를 통해 군대, 경찰 등 주요 국가 기관내에 공산주의자들(남로당)이 다수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최대 위기에 봉착한 이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로 일제시대에 공산당원들의 색출에 앞장섰던 친일 경찰관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6.25전쟁을 치르면서 이 대통령은 일제하에서 고등학교, 전문학교, 사관학교 등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인사들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건국 당시 국내에 양질의 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이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과 신생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에 위협에 직면해있었다는 사실이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게 만든 근본 이유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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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필진

좌우명 단념하면 거기서 끝이다.
프로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httpwww.i-bait.comread.phpcataId=NLC005007&num=3700

再錄/ 이승만 항일(抗日)내각, 김일성 친일(親日)내각

대한민국은 그 시작부터가 위대했다!

金泌材

[再錄: 2004년 3월8일자 보도]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면면을 보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본인이 독립운동가였고, 각료들 역시 대부분 항일(抗日)운동 지도자로 채워져 있다.

다만 이승만 대통령은 실무적으로 행정능력이 있는 일제시대 관료나 친일파를 일부 등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건국 후 좌우(左右)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국내치안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군(軍)과 경찰,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일부 채용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制憲國會)에서 세웠던 반민족행위특별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불법으로 해산하고 친일파를 재판 없이 석방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반민특위는 산하에 수사권을 부여한 특경대를 두어 친일혐의가 있는 인사들을 체포하는 일을 했다.

이 특경대가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헌 등을 체포하자 자구책을 강구하려던 경찰은 1949년 병력 40여 명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특경대원, 반민특위위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같은 소동과 관계없이 활동을 계속해 1949년 9월 5일 스스로 공식 활동을 정지하기까지 4백 8건의 영장을 발부했고, 이 가운데 3백 5명을 체포했으며 23건을 기소해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유기징역 10명의 판결을 받게 했다.

소련 공산당 ‘꼭두각시’ 김일성, 권력 핵심에 친일파 대거 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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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이후 김일성은 소련군에 입대해 대위가 됐으며,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와 모든 권력을 혼자서 독식하는 스탈린식 독재체제를 이룩했다. 실제로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북한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해 10,000여명의 젊은이를 뽑아 소련 군사학교에 위탁교육 시켜 미래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병사들을 징집했다.

특히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입국환영 평양 군중대회에서 사진을 보면 그의 뒤에는 여러 명의 소련군 고위 장교들이 소련기 아래 서 있다. 이것은 김일성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공식간행물에 나오는 바로 이 동일한 사진에는 당시 소련군 장교들과 소련기를 지워 놓고 있다.

김일성은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면 친일파를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이자 현재까지 북한의 실력자인 김영주(金英柱)는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으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康良煜)도 종교-문화부문의 친일파였다.

이와 함께 과거 남로당 실력자로 6.25 전쟁기간 중 서울시 인민 위원장이었던 이승엽(李承燁)의 경우 일제시대 인천양곡조합 간부였다. 남로당 간부였던 정백(鄭栢)등도 친일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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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 기자

▲대한민국 초대 내각 독립운동가

*대통령-이승만(李承晩,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이시영(李始榮, 임정내무총장)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국회의장-신익희(申翼熙, 임정내무총장)
*대법원장-김병로(金炳魯, 항일변호사)
*무임소장관-이윤영(李允榮, 국내항일)
*무임소 장관-이청천(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장택상(張澤相, 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尹致映, 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이 인(李 仁, 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재무장관-김도연(金度演, 2.8독립사건)
*상공장관-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안호상(安浩相, 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錢鎭漢, 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尹錫龜, 국내항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민희식(閔熙植, 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기획처장-이순탁(국내항일)
*공보처장-김동성(국내항일)

▲북한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

*김영주-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강양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시대 도의원)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북한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북한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김달삼-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시대 소위)

*박팔양-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시대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시대 검찰총장)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시대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시대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월북 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시대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 2013-08-13 ]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5840&C_CC=AH

[ ……. 한민당은 親日派들의 정당이 아니라 극소수의 親日派를 내포한 온건한 민족지사들의 정당 …….

…… 親日 附逆者(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 ……..

……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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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한민국은 미국의 앞잡이와 親日派들에 의해 建國됐다 ?

親日派들의 선거권·被선거권 박탈

대한민국이 미국의 앞잡이와 親日派(친일파)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로 대한민국 建國운동의 핵심 지도자인 李承晩이 미국의 앞잡이며, 李承晩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활동한 한민당이 親日派들의 집단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李承晩이 미국의 앞잡이는커녕 미국 정부에 맞서 싸우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추진한 것은 앞에 서술했다.

한민당에 親日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親日활동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할 수는 없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하게 주장했던 左翼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은 親日派를 「일본 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라 정의했다.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親日을 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親日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 때문이거나, 日帝 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日帝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 명단에 포함되거나 親日的인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左翼의 呂運亨이 日帝 말기 상당한 親日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親日派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 경력자의 대부분도 親日派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한민당 간부진 중 親日 경력자의 비율은 日帝 치하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사의 비율보다 훨씬 적다. 즉, 한민당은 親日派들의 정당이 아니라 극소수의 親日派를 내포한 온건한 민족지사들의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민국의 建國과정에서는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됐다.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선거법을 제정할 때 親日 附逆者(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또한 李承晩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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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 청년강좌 ①]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 대한 오해와 이해 – 10問 10答

梁 東 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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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이 親日派인지 여부를 살펴보자.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두 개의 軸(축)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李承晩과 獨立促成國民會(독립촉성국민회)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다. 한민당도 李承晩을 추종하는 집단이었지만, 李承晩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右翼의 연합체 한국민주당

李承晩이 친일파였던가? 李承晩이 抗日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들 중의 1인이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反日노선을 강력하게 유지해 온 지도자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친일파들의 집단이었던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지도부는 李始榮(이시영)·吳世昌(오세창)·明濟世(명제세)·申翼熙(신익희)·李靑天(이청천)·李允榮(이윤영)·배은희 등 저명한 민족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설혹 독립촉성국민회의 하부조직에 親日경력을 가진 인사들이 참여했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 단체를 親日派 단체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 가운데 親日派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집단은 한국민주당뿐이다. 한민당이 親日派 세력인지 여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민당의 창당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

한민당은 左翼세력이 8·15 해방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政界의 기선을 장악하면서 공세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데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國內 右翼 민족지사들에 의해 창당되었다. 國內 민족지사들은 처음에는 두 갈래로 右翼정당 창당 작업을 전개했다.

하나는 金炳魯(김병로)·李仁(이인)·趙炳玉(조병옥)·白寬洙(백관수)·元世勳(원세훈)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당이었다. 조선민족당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체로 지속적으로 國內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보다 관용적이고 親日派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인사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張德秀(장덕수)·許政(허정)·金度演(김도연)·白南薰(백남훈)·尹致暎(윤치영)·尹潽善(윤보선) 등이 주도한 한국국민당이다. 한국국민당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체로 歐美(구미)에서 유학 혹은 민족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지식인 및 그들과 친분이 깊은 인사들로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덜 관용적이고 親日派에 대해서는 보다 관용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처음부터 右翼진영의 통합정당을 지향했기 때문에 창당 작업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양측 간의 통합작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한국민주당이라는 右翼진영 통합정당의 창당을 발기하게 되었다.

한국민주당 지도부는 民族志士들

한국민주당의 창당발기대회가 개최된 후 정당 창당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還國(환국)환영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해 오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측이 한국민주당에 합류했다.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宋鎭禹(송진우)·金性洙(김성수)·金俊淵(김준연)·徐相日(서상일)·金東元(김동원) 등으로서 거의 모두가 東亞日報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親日派에 대해 다같이 관용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결국,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위원회 등이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右翼진영의 통합정당인 한민당 지도부에는 日帝치하에서 민족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民族志士들이 많았다.

민족을 위한 운동, 즉 민족주의 운동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민족운동, 민족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이다. 「민족운동」은 민족 전체나 민족 구성원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집단적 활동을 말한다. 「민족독립운동」은 異민족의 지배로부터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운동이다. 「민족해방운동」은 異민족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데 더하여 민족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운동이다. 한민당의 지도자들은 민족독립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은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지만 민족운동은 전개한 사람들이다.

한민당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사들, 즉 國內에서 「一面妥協 一面抵抗(일면타협 일면저항)」의 온건한, 그리고 신변위협이 크지 않은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고생하며 抗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인사들에게는 親日派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日帝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나, 日帝에 복종만 해온 國內의 대중들과 비교할 때는 民族志士들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 지도부에는 분명하게 親日派로 규정될 만한 인사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한민당을 창당할 때 「親日派를 배제하되 다소 융통성을 둔다」는 人選(인선)원칙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한민당은 親日派나 親日경력자들이 주도하여 창당한 정당이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 주도하여 창당된 정당임이 분명하다.

강하건 약하건 간에 親日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한민당에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설사 그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한민당 지도부의 多數를 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당하게 말한다면 누구도 한민당을 親日派 정당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5·10 總選時 親日派의 선거권·被선거권 박탈

한편,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해야 할 것인가도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할 사항이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左翼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은 親日派를 「일본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者들」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의 대부분은 親日派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사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떤 목적을 위해 「親日을 해야겠다」는 적극적 의식을 가지고 親日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 때문이거나, 日帝 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日帝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 명단에 포함되거나 親日的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左翼진영 지도자의 한 사람인 呂運亨(여운형)이 日帝 말기 상당한 親日활동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親日派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경력자들의 대부분도 親日派로 규정하기에 무리가 있는 인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건국 주도세력은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건국을 위한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親日附逆者(친일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5·10 선거법 제2조는 ① 일본 정부로부터 爵位(작위)를 받은 者, ②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者 등은 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이 선거법 제3조는 ① 일제시대 判任官(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憲兵補(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의 職에 있었던 者 및 그 密偵(밀정)행위를 한 자, ② 日帝시대 中樞院(중추원)의 부의장·顧問(고문) 또는 參議(참의)가 되었던 자, ③ 日帝시대에 府 또는 道의 자문 혹은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④ 日帝시대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者 또는 勳 7등 이상을 받은 者(단, 기술관 및 교육자는 제외함) 등은 被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이 親日派들에 의해 건국된 국가라면 건국 주도세력이 스스로의 발을 묶는 이러한 親日派 배제 노력을 전개할 리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이처럼 親日派 배제원칙을 준수하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이나 국회 간부에는 親日派로 규정될 수 있는 인사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6·25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親日派로 분류될 만한 인사들이 기용되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는 親日派는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지도부가 아닌 실무 관료조직, 특히 경찰에 親日派에 속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기능인」들로서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바람직한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기능인 수준에서도 親日派를 가능한 한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光復 직후 남한의 혼란상과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려는 左翼에 대항하여 동원할 수 있는 人的자원의 한계 등을 고려한다면, 기능적 수준에서의 親日경력자들의 채용은 양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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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4300&C_CC=BB

건국 58주년 8.15에 붙이는 글
대한민국은 親日派들이 미국의 使嗾를 받아 만든 나라인가?

梁 東 安

1952.1.20. 정규陸士 제1기생 입교식

[ ….. 『이젠 마음 놨어!』

그리고는 떠나셨다. …….. ]

[특별기고] 영욕의 陸士 60년

『이젠 마음 놨어!』

(李承晩 대통령, 정규 陸士 1기 입교 때)

월간조선

老애국자의 평생 恨

1952년 1월20일 진해 陸士에서 열린 정규 陸士 1기(11기) 입교식.

花郞臺(화랑대) 60년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날은 1952년 1월20일이었다. 그날은 바로 4년제 정규陸士 제1기생(1955년 졸업時 「陸士 11기」로 호칭을 바꿈)의 입교식 날이었다.

입교식을 위해 참석한 美 극동군사령관 리지웨이 大將(대장)을 비롯해 16개 참전국 將星(장성) 등 內外 귀빈들의 수가 入校(입교)하는 4년제 陸士 1기생 200명보다 더 많았다. 성대하고 뜻있는 잔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오늘은 여러분이 獻身(헌신)의 式典(식전)에 몸을 바치는 날』이라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대통령 말씀, 군악대의 연주 그리고 생도대장 이승우 중령(5기)의 『부탁한다』는 심각한 당부와 발진, 『우로 봐!』를 외치면서 우리를 이끄는 구대장 신현수·이상익·홍완표 대위의 구령….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솟는 듯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식전이 끝나고, 모든 귀빈이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생도들에게 「小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귀빈들 가운데 제일 먼저 떠난 줄 알았던 李承晩 대통령께서 우리 신입생 생도들을 한번 가까이 보겠다고 부르신 것이었다. 우리들은 긴장했다.

나는 동기생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맨 앞줄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李대통령께서 바로 내 앞에 오셨다. 그분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李대통령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한참 우리들을 바라보시던 李대통령은 낮은 음성으로 우리들에게만 들리게, 마치 긴요한 당부라도 하듯이 한 말씀 하셨다.

『이젠 마음 놨어!』

그리고는 떠나셨다. 그 한마디 속에는 老애국자의 평생의 恨이 서려 있었다.

軍의 法統 세우려 교장에 安椿生 장군 임명

진해에서 4년제 陸士가 개교하기 이전, 陸士는 1946년 5월1일 入校한 제1기부터 제10기까지 5735명의 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1310명이 戰死했다. 세계적으로도 그 나라 陸士 출신이 한 전쟁에서 3년 만에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린 사례가 없었다. 특히 생도 1기(나중에 「陸士 10기」로 호칭)와 생도 2기는 6·25전쟁이 터지자 사관생도 신분으로 戰線(전선)에 투입됐다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그들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일시 休校(휴교)했던 陸士가 다시 문을 열고 4년제 정규 생도들을 모집한 것은 李承晩 대통령의 恨 맺힌 집념과 國權수호 의지의 소산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李鍾贊(이종찬) 장군이었다. 일본 陸士 출신인 李鍾贊 장군은 부산 정치파동 당시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곧은 분이었다.

戰線에서 勇名(용명)을 떨친 일본 陸士출신 장성들은 새로 문을 여는 4년제 정규 陸士의 교장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李鍾贊 장군은 李대통령에게 安椿生(안춘생) 准將(준장)을 새 교장으로 추천했다. 중국 黃浦(황포)군관학교 출신인 安장군은 安重根(안중근) 義士의 조카였다. 李承晩 대통령과 李鍾贊 장군은 한국軍의 法統(법통)을 安重根 義士 등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李대통령은 安椿生 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교훈을 「智(지)·仁(인)·勇(용)」으로 정하고, 친필 휘호를 내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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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온 서울大 교수들이 출강

1950년대의 진해 陸士 교육은 철저한 西歐式(서구식) 교육이었다. 당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교육했던 일반 대학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陸士 11기생 200명을 교육하는데, 20여 명씩 소단위 교실교육을 실천했다. 피란을 내려와 있던 서울大 교수들이 陸士에 출강했다. 최윤식(수학)·정봉협(수학)·이숭녕(국문)·차상원(국문)·강봉식(영어)·이장환(영어)·송욱(영어)·방성희(물리학)·이두겸(물리학) 교수 등 쟁쟁한 분들이었다. 황찬호·조순·문원·엄장익·오윤용·김영전·임재규·유광열 교수는 대위나 소령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후일 조순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거쳐 民選(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당시 空士 교수였던 이현재 교수는 서울大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고, 海士 교수였던 송욱 교수는 영문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3軍 사관학교는 우리나라 知性(지성)들의 집결지였고, 士官(사관)문화의 요람지였다.

당시 陸士에서는 매일, 매시간 일일시험을 치르고 채점을 했다. 생도들의 명예를 존중해서 시험감독은 없었다. 그래도 부정행위는 없다. 만일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고발되면 당장 退校(퇴교) 된다.

매일 시험을 보고 채점을 하는 데 부담을 느낀 교수들은 기말시험이나 章末 시험으로 제도를 바꾸자고 건의했다. 학교 본부의 美 고문관들의 답변이 왔다. 미국에서는 陸士와 海士가 축구시합을 응원하러 필라델피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일일시험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西歐 군사교육 제도였다.

그래서 陸士 생도들은 4년간의 재학기간에 약 1000번의 시험을 치렀다. 그 평균성적이 67점을 넘지 못하면 퇴교해야 했다. 교관은 낙제생 후보를 불러 놓고, 『자네 평균을 계산해 보라』고 해서 66.9999점이 안 되면 퇴교시켰다.

눈물도 인정도 없는 시험 또 시험

참으로 눈물도 인정도 없이 이 전통이 지켜져서 보통 한 期에 약 27%가 도태됐다. 물론 50년 동안 한 시간의 휴강도 없었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해도 모든 교과서는 진도대로 마쳐야 했다. 흔히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入學이 곧 卒業』이라고 말하지만, 陸士는 예외였다. 陸士 생도들은 졸업식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놨다.

나는 대령 때 美 프린스턴大로 교환교수로 갔었다. 그 대학의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이었다. 한국 陸士도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 비율로 생도들에게 「기초가 넓고 철저한」 교육을 했다.

이 陸士 교육의 진가를 일찍 인정한 분이 서울高와 경기高 교장을 지낸 김원규 선생이었다. 그분은 서울高 교장 재직 시절, 조회 때마다 陸士 교육의 미래를 높이 평가하고 우수한 학생을 陸士로 보냈다. 그래서 陸士 16기에는 서울高 출신이 20여 명이나 입학했다. 1등 학생이 서울法大에 가지 않고, 陸士로 진학했다.

陸士 17기, 18기에는 경기高 출신도 많았다. 吳明 前 과학기술부총리가 경기高 출신 18기이다. 전국의 유명한 고등학교 수재들이 陸士로 모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씨도 陸士에 입교했다. 이때 입교한 생도들이 후일 월남戰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李대통령, 『무엇이 무서워서 제3차 세계대전에서 꽁무니를 빼겠소?』

1953년 정월이 왔다. 아무리 陸士에 대한 기대가 높아도, 전쟁 중인 가난한 나라 형편은 어쩔 수 없었다. 배는 고팠고, 난로도 없이 겨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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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거리에서는 休戰(휴전)반대 데모가 매일같이 열렸다. 陸士도 反共北進통일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생도들의 90% 이상은 전투를 경험했던 병사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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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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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분의 3의 붉은군대 장교들이 전직 제국군 장교들 ……

…… 83%의 붉은군대 사단이나 군단의 사령관들이 전직 제국군 출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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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군대의 창설

10월 혁명이후 러시아 제국군은 해체상태였으며, 지원제의 적위대가 볼셰비키의 주된 무력이었다. 또한 이것은 볼셰비키의 공안안보기관인 체카의 무력에 의해 보강되어 있었다.

1918년 1월, 적위대가 주요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국방인민위원 레프 트로츠키는 보다 전문적인 전투병력을 보유하기 위해, 적위대의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군대”로 재조직하였다. 붉은군대는 매 부대에 당의 명령을 받는 정치장교가 배치되어 부대의 사기와 충성심을 감독하였다.

1918년 6월, 노동자만으로 조직된 혁명군의 병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빈농에 대해 강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징병제에 대한 농민의 반대는 인질이나 즉결처분으로서 억누르고 이를 실시하였다. 전직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들은 “군사 전문가”로서 이용되었다.

때로는 이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이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4분의 3의 붉은군대 장교들이 전직 제국군 장교들이었다. 전쟁이 끝날무렵에 83%의 붉은군대 사단이나 군단의 사령관들이 전직 제국군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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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세였던 임 표는 ….. 만주 군과 만주 경찰들을 전력을 묻지 않고 몽땅 받아들인 결단을 …….. ]

모택동은 어떻게 만주를 먹었나?

한 국민당 장군 아들의 역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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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일본이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군벌들을
쫓아내고 차지했던 최대의 전과물이었다.

세계가 반발했지만 일본은 자원 많은 만주를 심혈을 기울여
개발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배와 만주국 패망으로 이어지자
중국의 두 맹주 장 개석과 모 택동은 이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서 레이스를 벌였다.

모 택동은 특히 더 의욕을 보였다.

이미 일본이 잘 개발해놓은 산업시설도 욕심났지만
전략적으로 우방국 소련과 긴 국경을 대고 있어 후원을
받을 수 있고 그만큼 장 개석으로부터 공격의 위협을
안 당할 수가 있다.

이미 우군인 소련군이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욕심을 내볼만했다.

사실 모 택동은 1947년 국공 내전이 발발해지자 근거지
연안을 장 개석 군에게 내주면서도 만주 공략에 전력을 기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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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 택동은 연안의 손실보다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주 확보에 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만주에서 동북 제 4야전군을 조직하고 있던
임 표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는 첫 전투인 사평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장 개석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연이은 흑산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패배를 당였다.

그러나 패배를 당하던 임 표군이 어느 순간부터 엄청나게
강해지기 시작했다. 전세는 급전했다.

밀리던 국민당군의 60 군이 1948년 4월 부터 구 만주국
수도 장춘[신경]에서 공산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6개월동안
고통스러운 방어전을 하다가 그해 10월 국민당군의 사령관
증택생이 항복함으로서 함락되었다.

구 만주국 수도 장춘의 함략은 만주, 아니 전 중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국공내전 발발 초기 단 10만 명의 작은 병력을 보유했던
임 표의 부대는 만주를 거의 장악한 시점,즉 일년 반 뒤인
장춘 함락 직후 8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국공내전의 3대전역[三大戰役]에서 제일 중요했던 요심전역[遼瀋戰役]은 장춘 함락뒤인 다음 해 1월 북경과 천진 지역, 즉 중국의 심장부분을 공격했던 평진전역[平津戰役]으로 이어졌다.

만주 장악은 만리장성 남쪽 장 개석 군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이 평진전역 때부터 국민당 군의 집단 투항이 속출했다.
장 개석 부대는 각 전선에서 부대 와해라는 볼쌍 사나운
대패배도 연달아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의 심장을 먹어치운 모 택동군은 이어 양자강 이남을
공격하는 장강전역[長江戰役]을 개시했다.

양자강 남쪽 광활한 영토는 부드럽게 모 택동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장 개석 군은 이 년도 안 되어 대륙의 새 주인에서 문전
축출당하는 걸인과 같은 비참한 패잔병의 신세가 되어
대만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만주가 함락되고 단 일년도 안 되어 중국 전역은 공산화 되어
그 해 1949년 10월 모 택동은 중화인민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장 개석 군에게 패배를 당하던 임 표의 부대가 갑자기
막강한 부대가 되어 장 개석 군을 구축해버려서
중국 적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는데 중국은 이를 모두
동북 지방 인민들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모양 좋은 말로 이 부분 역사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한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일본의 대륙진출 삼 십 년 만에 손에 넣은 만주에
막대한 투자를 했었다. 만주 철도니 소화 제철[안산 제철]이 그런 대형 투자의 표본이다.

그런 투자와 일본의 행정경험이 접목된 통치가 만주국을
군벌들이 난립하고 다스릴 때보다 만주를 훨씬 살기 좋게 만들었다.

결과 만주의 GNP는 만리장성 이남의 전 중국의 GNP보다도
더 높았었다.

공산주의의 창궐은 항상 경제와 상관관계가 있었는데
만주는 경제 사정이 모 택동 사상을 창궐시킨 중국보다
비교적 나았었다.

여기에 더해서 치밀한 공산주의 탄압정책도 있어서 공산주의
활동이 힘을 쓰지를 못했었다.

즉 일본의 독한 감시망에 있었던 만주는 모 택동의 공산주의
활동이 활개 치는 환경이 마련되는 혼란과 부패의 중국이 아니었다.

물론 만주의 원야에 공산 게릴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일본군 노조에[野副]소장이 지휘하는
대대적인 공산 유격대 토벌은 이들 태반이 섬멸당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소련으로 도주해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김 일성도 이 중의 하나이다.
이 토벌 뒤에 만주의 공산 무장 세력은 종식되었다고 보아야 했다.

그랬던 만주의 인민이 한꺼번에 장 개석 군을 내모는
무장 세력이 된 것은 믿기가 힘들 일이다

즉 종합적으로 보아서 만주의 사상 토양은 마치 임 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느닷없이 일제히 총을 들고
일어나는 그런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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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사장은 진 성의 실수를 지적했다.

“그 때 국민당 군이 갈 곳없던 만주국의 군경(軍警)조직을
받아들여 임 표 군 섬멸에 동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성이 만주군의 편입을 거절했답니다.

아버지는 늘 이 한 맺힌 말씀을 하시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당시 비록 괴뢰국이지만 만주라는 큰 국가체계에 20여만의
만주 군이 있었고 그보다 더 큰 경찰 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여러 민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조선인등이 있었지만
역시 중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이 패배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도 도망가다가 붙잡혀서
소련으로 끌려간 판에 직업을 잃은 만주 군과 만주 경찰 간부들의 입장은 무척 곤란했었다. 이들 대부분 부대는 곧 소련군에게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군인이자 생활인인 이들은 생계도 유지케 해주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을 보장 해주는 어떤 직업을 원했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이나 만주인 간부들은 조선인이나 일본인
처럼 귀국할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부 말단 군부대는 무기를 들고 부대 이탈을 해서 지역에
뿌리를 밖고 주민들을 갈취해먹는 범죄 조직이 되었다. 만주에서 청말(淸末)부터 만주 사변 전까지 만주에 만연했던 마적(馬賊)들이 된 것이다. 토비[土匪]라고 불리던 이들은 나중에 공산군에게 모두 토벌을 당해 없어졌다.

일본으로부터 반공사상을 주입받았었고 공산 게릴라들과
싸웠던 이들은 당연히 진주해온 국민당 군에게 아쉬운 손을 벌렸다. 국민당 군에 편입해서 공산군과 싸우게 해달라는
교섭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제의는 진성에게 거절당했다.

이 결정을 내릴 때는 장 개석은 아직 상황이 다급하지도 않았었고 일본에 승리했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자만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 옛 군벌 군을 받아들여서 안 좋은 경험을 했던 이유도 있을 수가 있다.

또는 이런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장 개석이
이 결정의 뒤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체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 개석의 숙적인 모 택동의 공산군이라는
변수를 깊이 계산하지 않은 실책이었다.

올데 갈데가 없어진 만주 군과 만주 경찰은 할 수없이
임 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력이 국민당 군보다 훨씬 열세였던 임 표는 극히 실리적인
결단을 했다.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의 주구 노릇을 했던 만주 군과 만주 경찰들을 전력을 묻지 않고 몽땅 받아들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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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만식을 비롯한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 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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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문제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남북한의 정치정세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파가 하루아침에 찬탁(친소)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반탁(반소) 입장의 우파와 격렬히 대립하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좌우합작 노선이 우익타도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소련군정은 모스크바의 신탁통치 결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조만식을 비롯한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 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1946년 1월부터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반역반동분자로 탄압받거나 숙청되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지도부가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것은 1946년 2월 8일 중앙권력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위)가 수립된 직후였다. 북임위는 스스로의 사명을 “친미친일파, 민족반역자, 지주, 예속자본가들에게 독재를 실시하고 인민대중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시하면서 북반부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여 혁명적 ‘민주기지’를 창설하여 점차 사회주의혁명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천명한 사실상의 북한 정부이다.

1946년 3월 7일 북임위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채택하였다(부록 1 참조). 이 규정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민주기지론’ 방침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채택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친일파의 범주에는 일제에 복무한 고급관리는 물론이고 경찰 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의 관리와 밀정 등이 포함된다. 또한 하위관리라 하더라도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인사들이나 민간인 역시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규정에 의한 북한의 친일청산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원칙과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의 ‘반동행위’도 친일과 같은 민족반역으로 규정하고 있고, 나아가서 청산을 위한 법적 절차 특히 처벌을 위한 사법적 절차를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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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장의 치안유지와 자유민주체제의 수호를 위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과 행정요원이더라도 활용 …….

…… 일제하 많은 수의 공무원들은 친일 또는 반일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없이 일했다. …….. ]

2013년 봄호

[일반논문]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류석춘․김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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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공산화에 협조하면 친일이 용납된 친일청산

북한은 친일파 처벌문제를 단지 공산혁명 투쟁의 도구로 삼았기에 친일파라도 공산 소비에트화에 동참하면 잘못을 덮고 책임을 묻지 않았다. 친일청산의 기준은 공산화와 소련 식민체제의 구축에 협조하느냐의 여부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 기술 간부나 교사요원을 비롯한 엘리트들의 경우는 일제시기의 행위나 복무 문제를 삼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재임용했다. 일제에 복무한 사실이 있더라도 필요한 능력이 있거나 정권에 적극 협력할 경우 등용했던 것이다. 김광운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각 방면에서 정치기구 확대는 간부 충원을 필수적으로 동반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문직과 기술직의 경우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구체제 인물의 잔류를 허용하였다. 몇 번의 당원 검열을 통한 출당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7월 현재 황해도 내 당 간부의 70 %가 일제의 기관이나 기업소에 복무한 경력자였다. 당 조직이 이러했다면 기타 정치기구에서는 그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들을 간부로 충원하지 않고서는 광범한 대중의 정치활동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임시인위는 정치선전과 관계없이 전문성을 갖춘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해서 관대한 규정을 내렸고, 그들을 계속 간부로 충원하였다.”

해방 후 북한이 당면했던 심각한 전문기술인력의 부족상황은 1946년 8월부터 10월까지 북한을 방문했던 소련인 저널리스트 기토비치와 부르소프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사업국 국장인 이문환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에 의하면, “조선의 산업체에 총 20,800명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인 전문가들이었다. (…) 북한의 산업체에서만 16,000명의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으나 현재 북한에는 547명만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외에 950명의 일본인 기사와 기술자들이 북한에 남아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친일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은 거대한 공장을 자체적으로 가동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마저 중지시키고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로 하여금 기술 이전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김일성)이 4,000원, 동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 일반 사무원이 800~1,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해 주었는지 (…) 흥남공장에서는 일본인 기술자 콘키치(昆吉朗)를 ‘노력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최초의 인민위원 선거와 관련하여 김일성은 ‘전 당원들에게 ‘진정으로 능력 있는 인물이 당선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다할 것’을 주문하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에 있어서 일체 기계적이며 공식적으로 되는 해석을 피해야 할 것이며, 8․15이후 건국사업에 적극 노력하며 개과천선하고 나온 자들에 대하여 관대한 처리를 할 것’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라고 강조하였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 (23편) 「민주건설사 1」은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공산화에 적극 동조하면 친일전력이 문제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보도에서는 “북한이 친일파 척결에 나서서 거대한 성과를 세웠지만, 남한은 이들을 고관으로 등용하여 이들과 야합하고 있다”고 사실과 달리 선전하였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북한의 이중성은 물론, 선전선동에 의한 체제 건설 및 유지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친일파에 대한 관용과 활용은 정권초기부터 시행되었다. 김일성과 소련군 지도부는 권력 기관 내에 친일 혐의가 있는 인사들을 등용하는데 별다른 주저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북한의 초기 내각 명단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부록 3 참조). 대표적 경우가 일제시대 도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는 강량욱이 1946년 2월 출범한 북임위의 서기장을 역임한 사실이다. 또한 1943년 4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광산을 경영하며 일제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정준택이 전문성을 인정받아 해방 후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10국에서 산업국장으로 임명된 사실이다. 그는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북한 경제의 총사령탑에 앉았다. 그가 1973년 1월 부총리 재직 중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장례식은 김일성의 눈물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에게는 최고 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나아가서,

“일제 말 함흥 철도국장을 지낸 바 있는 한희진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통국장에 임명되었다. 친일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의학박사 출신의 윤기녕이 보건국장에, 치과의사 출신의 한동찬은 상업국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또한 지주 출신으로 산업경제가이자 전기산업 원가 이론가로 명성이 있는 리문환도 행정10국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산업국장을 맡았다. 비록 한희진은 문책성 인사로 1946년 8월에 해임되었고, 9월에는 한동찬이 불만을 품고 진남포항을 통해 북한을 이탈하였지만, 전문 인력에 대한 우대 정책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문인 우대 정책은 교육기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제시기에 복무한 교원들은 일정한 재교육을 거쳐 다시금 교육 현장에 복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북한에서는 특히 친일경력을 가지고 공산화와 소비에트화에 적극 앞장서 정권의 핵심부까지 진출한 인물이 많다. 김일성 자신부터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미국과 협조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립우호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군으로 숨어들어간 사실이 있으니 친일은 물론이고 소비에트화에 협조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배경으로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를 들 수 있다.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그는 1960년대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 왔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하던 한낙규는 검찰총장을 했고, 일본 제국군대의 파일럿 출신인 이활은 1961년 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오르기도 했다.

Ⅴ. 한국(남한)에서의 친일청산

북한과 비교해 볼 때, 대한민국에서는 합법적인 기준과 절차를 가지고 제도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친일청산을 시도했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건국 주도세력은 친일파를 배제하여야 한다는 당위를 다양한 조치에 따라 전개하였다.

먼저, 대한민국은 건국을 위한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친일부역자들의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법 제2조는 ①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②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등은 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또한 선거법 제3조는 ① 일제시대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및 그 밀정행위를 한 자, ② 일제시대 중추원의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가 되었던 자, ③ 일제시대에 부 또는 도의 자문 혹은 의결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④ 일제시대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 또는 훈 7등 이상을 받은 자 등은 피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단 기술관 및 교육자는 제외).

대한민국이 이처럼 친일파 배제원칙을 준수하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이나 국회 간부에는 친일파로 규정될 수 있는 인사가 단 한 명도 참여할 수 없었다 (부록 3 참조). 따라서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친일청산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했으며 또한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친일청산에 대한 합법적 기준과 절차를 세우고자 했던 의지는 이후 이어진 현대사의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의 인준 거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1947년 7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채택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나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채택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반민법)이 바로 그것들이다 (부록 2 참조). 그리고 실제 남한에서는 1948년 반민법에 의거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1949년 8월 말까지 약 1년 동안 682건의 반민족 행위 사건을 사법적 절차에 따라 소추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영장발부 408건, 기소 221건, 재판종결 38건, 처벌 12건의 사법적 소추가 있었다.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정리 작업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남한)의 친일청산이 한계를 보여 준 것을 사실이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시의 정치와 안보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시 스탈린과 슈티코프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해서 대구 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등 폭력노선으로 정부수립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당장의 치안유지와 자유민주체제의 수호를 위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과 행정요원이더라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미군정 보고서가 “모든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더라도 일제하 많은 수의 공무원들은 친일 또는 반일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없이 일했다. (…) 그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하는 총괄적인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들 대부분에게 공정치 못하다”라고 쓰고 있듯이, 일제기관 복무자를 모두 친일파로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하급관리보다는 정치적 비중이 높은 자리에 친일인사가 중용되는 문제를 배제하는 일이 정치 지도자의 바람직한 선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적화를 막고 남한을 기반으로 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과 갈등하면서까지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위층에서는 친일파를 철저히 배제했다.

다만 일선의 하급 관료나 경찰에 대해서는 나라의 존립을 위해 일제 기관에서의 복무 여부를 따지지 않고 등용했다. 국가의 안보 위협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더라도 한국(남한)은 친일청산을 했던 명확한 근거와 자료가 있다. 그럼에도 친일청산에 대한 근거와 사실이 없는 공산 혁명을 한 북한이 철저한 친일청산을 했다고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한국(남한)은 그렇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될 뿐이다.

Ⅵ. 맺는말

일제 식민체제가 종결되면서 해방 직후 남한과 북한은 모두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형사적 처벌을 민족적 요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 군정과 김일성 정권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공산화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공산혁명과 소비에트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에 따라 친일청산을 명분으로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재산권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소련 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체제를 건설할 수 있었다. 결국 공산 전체주의체제의 구축에 친일문제를 수단으로 활용하였을 뿐, 엄밀한 의미의 친일 행위자에 대한 처벌이나 청산작업은 없었던 것이다.

북한이 했다고 선전하는 ‘친일청산’이란 친일청산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공 혹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청산이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적이었던 유산계급의 재산을 대상으로 한 ‘재산 빼앗기’ 과정이었고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만드는데 반대한 세력에 대한,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을 했더라도 공산혁명에 협력한 자들은 동참할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친일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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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301&num=657

이승만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

北 초대내각, 스탈린과 소련군이 짰다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

2011.07.20

북한 초대내각은 스탈린과 소련군이 짠 것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할 때 트루먼한테 보고하고 했나?

김학준(金學俊 前 동아일보 회장 /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북한에서 처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상(相)과 부상(副相), 즉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잖습니까? 그 임명하는 과정도 소련 문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평양에 있는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명단을 만들었어요.

상(相), 부상(副相) 다 만들어서 김일성이를 불러서 맞춰봅니다. 이렇게 하자, 그래도 김일성이 한 두 사람 더 추천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모스크바에 보고해요. 그것을 스탈린이 봅니다. 봐서, 그래? 이렇게 했어? 아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래서 발표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 초대 내각을 구성해서 발표할 때, 트루만이 그 명단을 봤다든가, 美 국무장관이 봤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國內에서 일부 세력은 “대한민국은 무슨 美帝가 만들어 낸 나라고 자주성이 없는 나라인데, 북한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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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상식/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독립투사 정부, 김일성(金日成) 정부는 비명횡사(非命橫死) 정부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김일성(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박헌영(朴憲永), 부수상(산업상 겸임) 김책(金策), 부수상 홍명희(洪命熹), 내무상 박일우(朴一禹), 민족보위상 최용건(崔庸健), 재정상 최창익(崔昌益), 사법상 이승엽(李承燁), 상업상 장시우(張時雨), 교통상 주영하(朱寧夏), 노동상 허성택(許成澤), 국가검열상 김원봉(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백남운(白南雲), 문화선전상 허정숙(許貞淑), 농림상 박문규(朴文圭), 보건상 이병남(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 최고회의 의장 허헌(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金枓奉).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비명횡사(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내무장관 윤치영(尹致暎),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법부장관 이인(李仁), 국방장관 이범석(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무임소 장관 이청천(李靑天), 무임소 장관 이윤영(李允榮),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반공반일(反共反日)을 국시(國是)로 삼다시피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친일(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친일(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이승만(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자명(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법치(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 전체의 행복을 어느 체제가 발전시켰느냐로 판가름 낸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복지, 안전, 자유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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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 …….

…… 확고한 ‘반공(反共)’으로 남쪽의 자유와 번영을 지킨 것 ……… ]

[황호택 칼럼] 흑백논리 史觀의 친일 명단

2009-11-15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총독부 전직 관료들을 싫어하면서도 등용했다. 총독부 판사를 지낸 사람을 법무부 장관으로 쓰면서 “일제 앞잡이를 20년이나 했구먼”이라고 마뜩잖아 했다. 이 대통령은 해방 후 정국에서 ‘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이 대통령이 공산당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친일파 관료와 경찰을 동원하고, 확고한 ‘반공(反共)’으로 남쪽의 자유와 번영을 지킨 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최근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보도자료에서 ‘용공(容共) 좌익세력들의 국가정통성 훼손’이라는 비판에 대해 ‘친일 친미 친독재로 기회주의적인 변절을 거듭한 자들과 그 후예들이 치부를 감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반공이었다’고 응수했다. 반공을 곧바로 ‘친일 친미 친독재’와 연결짓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오늘의 북한 현실이나 냉전 후 국제질서를 보더라도 이 대통령의 ‘현실적 반공’은 사후에 정당성을 얻었다.

임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반공법 위반 등으로 두 번 옥살이(문인간첩단 사건, 남민전 사건)를 했지만 다 민주화유공자로 확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민전은 도시게릴라 투쟁을 벌이려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다.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오류’가 바로잡힌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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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친일파’에 관한 명상

제356호

2001-04-24

일제 잔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이해, 그 과정에서의 몇 가지 편향에 관하여

최근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두 가지 이유에서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언론개혁운동 과정에서 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재조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심화되면서 이 문제를 우리 사회 내의 친일잔재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앞으로 박정희 기념사업회쪽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면 이에 맞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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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한반도가 동서냉전의 각축장이 되면서 남쪽에 반공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의 기본적인 대치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 또는 애국 대 매국의 구도였다. 다시 말해서 민족해방운동 진영 대 일본제국주의 및 그 앞잡이들간의 대립이 주된 전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좌우대립의 정치지형이 수립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친일세력들은 살아남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좌우대립의 대치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과 계급적 입장이지, 민족적 입장이 아니었다. 좌우대립의 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와는 전혀 다른 논리와 기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좌우대립의 지형은 친일파들에 어떤 점이 유리하였을까? 한 예로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을 보기로 하자. 이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하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살해한 민족반역자들이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서, 이승만으로부터 “자네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발뻗고 잘 수 있다”는 칭찬을 듣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친일파 연구, 폭로수준을 뛰어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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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다. 친일파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기여한 분의 글을 잠시 보자.

“친일파 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도 없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그런 난제이다. 민족분단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경제종속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군사독재가 친일파의 사생아이고 사회혼란이 그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건 친일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 실로 오늘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모두가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친일파 기준 지나치게 엄격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할 것인데, 하나는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아온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과 다른 하나는 해방 당시의 역사적 분위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예로는 얼마 전 건국대 이사장 선임 당시 학생들의 반대를 받았던 현승종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노태우 정권 아래서 총리를 지낸 현승종씨의 경우, 학생들이 그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반대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현승종씨가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나간 친일파이기 때문에 민족 건대의 이사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분에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였다는 위치를 겸하여 일제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학병동맹의 위세는 대단했다. 학병동맹은 학병거부자동맹 앞에서야 한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정치단체 앞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일제 잔재의 청산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편향은 나치 점령을 벗어난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단죄와 친일파 청산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을 벗어난 뒤 괴뢰 비시 정권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 7천여명을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은 불과 4년여의 점령을 당한 프랑스가 수천명을 처형한 데 반해 36년이나 강제 점령을 당한 우리의 경우는 단 한명의 민족반역자도 처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분해 한다. 친일파 청산이 좌절된 것에 통분해 하는 심정이야 필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친일파 청산이 꼭 가혹한 처벌을 의미하느냐는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자치파가 집권한 인도는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200년간 받았지만 친영파 청산은 독립 뒤의 핵심 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실 제국주의의 통치 기간이 오래될수록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에 대한 처벌문제는 어려운 법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인적 청산의 폭이 결코 프랑스에서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북의 청산방식, 탄백(坦白)

이북의 경우도 대단히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산했지만, 민족반역자로 직접 처형한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민족반역자로 처형된 사람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 학살한 고등계 형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는 밀정질을 한 자들에 국한되었다. 우두머리급 친일파들이 대개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북은 인적청산의 면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일제의 강점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조선인들이 마땅히 취업할 만한 곳이 없던 사정 아래서 일제 기관에 복무한 사람들을 다 가혹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만주의 산골에서 빨치산 생활을 한 사람들만으로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하고는 일제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이들을 모두 엄격하게 처벌하거나 새 나라 건설에서 배제한다면 공장 하나 제대로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坦白)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뒤에 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이렇게 탄백을 한 사람들은 당의 요직에 임명될 수는 없었지만, 정권기관과 기업소에는 등용되었다. 비록 나중에 해직시키기는 했지만, 초기 인민군의 건설과정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군에 받아들이기도 했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와 의 친일문제도 해방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볼 수 있다. 가 서로 민족지 경쟁을 벌인 두 신문의 친일 기사를 원래 지면 그대로 게재한 것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일제 말에 폐간당했던 두 신문이 해방 직후 복간할 때 두 신문의 친일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전 국민의 80%가량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일제 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현재 우리의 감각에 비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범주에 대해 좀더 관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백범도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의 방응모 사장이 백범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이 환국한 뒤 이 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범 선생 스스로 남북협상에 임하면서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맡을 정도로 인적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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