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만세 대한민국 타도 민전 투사 김원봉 찬양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읍니다.

2019.06.26 00:37

백년반역타도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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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만세 대한민국 타도 민전 투사 김원봉 찬양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 김원봉 — 민전 — 민청 — 민애청 ]

1946.2. 김원봉 — 민전 공동의장

[ ……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 공동의장 ……..

……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 말 … 인민공화당으로 개칭 ….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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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행위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했다.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공동의장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고,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하는 조선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을 도와 나섰다.[16]

그래서 1946년 6월 27일에는 김규식과 좌우합작 문제로 회담하였으며, 7월 중순 인민공화당에서 ‘좌우합작에 관한 4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민전 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 부산 등 경상남북도 일원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배후로 몰려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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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民을 위한 진정한 民主主義陣營의 집결인 民主主義民族戰線과 다른 편에 非常國民會議가 대립 ……. ]

조선공산당, 민전 결성 참가를 강조하는 성명발표

서울신문 1946년 02월 14일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에서는 30일 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에 있어 民族統一의 촉진을 위하여 정확한 시비를 판정한 뒤에 중립 혹은 고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모든 民主主義要素가 이에 참가하기를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聲明書를 발표하였다.

“世間의 일부에서는 民主主義民族戰線을 가지고 左翼偏向 혹은 左翼的이라는 옳지 못한 규정을 내리고 恰似히 이 戰線이 일종 과오를 범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분들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전연 옳지 못한 견지이며 또한 출발이다.

回顧컨대 4黨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해 놓고 또다시 그것을 부정한 자 누구이며 民族統一戰線結成에 있어 罪過分子를 自己傘下에 집어 넣고 擁護政策을 실천함으로써 반동적 혼란을 일으킨 자 누구인가. 이런 구체적 사실을 지적하고 보면 是非는 명백한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人民을 위한 진정한 民主主義陣營의 집결인 民主主義民族戰線과 다른 편에 非常國民會議가 대립되고 있을 뿐이다.

이 後者는 금일의 美軍政을 무조건 절대 지지하면서도 三相會議 결정을 반대하고 나온다는 것은 대체 무슨 心思인가. 만일 우리가 이 兩個戰線을 떠나서 중립 혹은 고립하고 있어 방관 주저하고 兩者가 똑같이 옳지 않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정당하게 是是非非를 가리지 못하는 옳지 못한 경향이다. 그러므로 京鄕을 물론하고 各黨, 各派, 無所屬 等 모든 民主主義要素는 주저하지 말고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이달 15일에 결성되는 民主主義民族戰線에 참가하기를 요구한다. 옳은 일을 하는 자를 돕는 것은 또한 더 옳은 것이요, 이것이 곧 민족을 위함이요, 正義와 民主와 平和와 統一과 獨立을 위함이다.

이런 때에 있어서 中立은 孤立을 의미하고 孤立은 傍觀이요 그것은 民主主義的 진보진영의 역사적 사업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946.3.9. 민전

[ …… 南朝鮮에서 民主主義를 대표하는 것은 民戰이다. …….. ]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民主主義民族戰線 議長團은 9일 오전 11시부터 시내 仁寺町 民戰事務局에서 外國人記者團과 만나 다음과 같은 일문 일답을 하였는데 議長團側에서는 許憲, 朴憲永, 金若山, 洪南杓, 李康國, 張建相, 李如星과 外國人記者는 AP의 탈스바크, UP의 호잇트, 뉴욕타임즈의 존스톤이 출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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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와 民主議院이 합작하여 政府를 수립하는 경우에 협력하겠는가?

(答) 반대이다. 南朝鮮에서 民主主義를 대표하는 것은 民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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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민족전선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 …….

……. 삼팔선 이남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작업을 주도 …….. ]

[ …..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 …….

…..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

……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 …….

…….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 ]

민주주의민족전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은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 단체이다. 약칭은 민전이다.

결성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놓고 한민족이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대결하는 이념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946년 2월에 미군정 지역의 좌파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가 집결하여 결성되었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 등이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원봉, 장건상, 성주식, 김성숙과 중도우파에서 활동하였던 이극로, 천도교 간부 오지영 등이 가담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의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1]

우파 계열이 김구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설치되자, 이에 대응하여 좌파 정치 세력의 결집을 시도한 성격이 짙다. 주도 단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다.

이 단체 결성을 계기로 좌파 계열의 진용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신탁통치 문제를 불씨로 삼은 좌·우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강령 및 활동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강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5당연합체 탈퇴, 비상국민회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친일파 처단, 토지 개혁,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이었다. 이 단체는 친일파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산하에 친일파·민족반역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2]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확정된 뒤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직은 각 마을과 직장 단위로 비밀 투표를 받아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고, 삼팔선 이남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강령 5원칙 전문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의 속개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여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함.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과업에 매진할 것.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군정 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해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되면서 주요 참여자들이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거나 피신하거나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지하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9년 9월에 평양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46.8.3. 김원봉, 합당에 대해

[ …… 북조선의 2대정당합당 …. 가장 정당한 것으로 찬성한다. ……

…… 다른 3당과 … 원칙에 있어서는 물론 일치한다. …….. ]

1946.8.3.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서울신문 1946년 08월 04일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朝鮮民族革命黨黨首 金元鳳은 3일 오후 1시 往訪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북조선의 2대정당합당을 어떻게 보는가?

(答) 가장 정당한 것으로 찬성한다.

(問) 남조선에 있어서도 좌익3당이 합동한다는데?

(答) 그도 역시 찬성한다.

(問) 그러면 民革은 합동에 참가하지 않는가

(答) 신문지상에서 보면 인민당으로부터 발의해서 합동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당에 대해서는 아직 교섭을 받지 못하고 있다.

(問) 人民黨에서 교섭이 있을때는 참가하려는가?

(答) 합당문제란 것은 현단계에 있어서 조선이 당면하는 민족적 과업과 각당의 性格異同 내지 그의 정치적 주장 등에 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합당에 있어서 이상 말한 몇가지 점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현순간에 있어서 일치성을 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問) 그러면 귀당에 있어서는 다른 3당과 일치점을 볼 수 없는가?

(答) 원칙에 있어서는 물론 일치한다. 그러나 본당은 반일적 중소지주와 진보적 자본가를 기초로 하는 통일전선의 당이므로 이번에 합동한다는 3당과는 다소 성질상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民革은 여전히 민전산하에서 함께 투쟁할 것이며 지금에 있어서 독립적 발전을 하더라도 모순은 없을 것이다.

1946.12. 조선민주청년동맹

[ ….. 朴憲永 金元鳳 金日成 … 명예의장으로 추대…..

…… 김원봉 기타 제씨의 축사 …….

……. 사로당해체요구 경고문 발송 …….. ]

조선민주청년동맹의 임시전국대회 개최

조선일보 1946년 12월 28일

조선민주청년동맹 (民靑) 임시전국대회는 27일 오전 11시 내빈과 전국대의원 약 2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金容旭 사회로 성대히 개최되었다.

식순에 따라 개회 묵상 盟旗입장 개회사 대의원자격심사가 끝난 후 임시집행부 선거에 들어가 許憲 朴憲永 金元鳳 金日成 부왓손 등 5씨를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규약개정 임원선거를 위한 7명의 전형위원 선출 정세보고 허헌 김원봉 기타 제씨의 축사를 끝마치자 긴급동의로 사로당해체요구 경고문 발송을 의장에게 일임하고 다시 계속하여 오후 3시 현재 사업보고를 끝마치고 토의사항에 들어갔다.

1946

[ …… 마산중학, 여중의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교육하고 군정에 반대하는 내용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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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민전의 조직적 전개와 활동

1) 제1기 : 민전의 결성~제1차 미소공위

당시 전개된 민전의 활동은 조성된 정치정세에 따라 합법투쟁, 반합법투쟁, 비합법투쟁을 병행하면서 전개되었다. 주요활동으로는 각종기념행사와 집회 및 시위주도, 의식화, 조직화 선전활동 등이다. 주요 이슈로는 공위재개와 성사투쟁을 기본으로 친일파 청산과 파쇼세력 타도를 통한 민주개혁과 민중생존권쟁취투쟁이었다.

46년 4월부터 전국적으로 민전계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의 검거선풍이 경남지역에도 밀어닥치게 되고56) 각종의 테러가 빈발하였다.57) 그런데다가 당시 대중의 생활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민전은 쌀 부족과 높은 물가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끊임없이 조직하였다.58) 이러는 가운데 제1차 미소공위가 파란 속에 무기휴회되었다. 이에 민전은 그들의 예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해방이후 최초로 개최되는 각종의 기념집회 등을 통하여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에 대한 요구를 쏟아 내었다. 나아가 미소공위 재개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지역의 광범위한 정당사회단체들의 결집체인 민전은 본격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지향을 대중에게 선전하기 시작했다. 동년 2월과 3월 사이에 반군정 팜플렛을 배포 및 살포하면서 반군정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들의 활동 목표는 그들의 조직을 최대한 확산시키면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방해하는 친일파의 청산과 미군정에 대한 반대, 나아가 향후 있게 될 미소공위에서의 주도권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전활동은 비단 경남지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6사단 관할의 전지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59)

민전 예하 단체에서 뿌려진 전단에는 “봉건제를 계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군정에 의해 지지받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가 미군정 하에서 발호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60) 또한 민전은 46년 3월 하순 러시아 선전영화인 ‘동방의 무지개’ 등을 각 지역의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일부 교사들은 영화관람을 위해 학생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 영화 역시 경남지역에서만 상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남한의 거의 모든 56) 도시와 읍에서 상영되었다.61)

한편 순회연극단은 러시아 연극인 ‘Hope’와 혁명극장조합에서 만든 ‘The Village With No Number’을 상영했으며, 때로는 발각, 체포되기도 하였다.62) 그들 순회선전단은 공연할 때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며 붉은 깃발을 내걸고, 취주악단의 반주 하에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면서 부산, 마산, 진해지역의 경남지방의 읍을 순회했다.

이러한 선전, 선동활동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중학, 여중의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교육하고 군정에 반대하는 내용을 가르쳤다.63) 이상과 같이 이들의 활동은 주로 전단의 살포, 그리고 연극이나 영화상영, 나아가 교단에서 직접 공산주의를 강의하는 것이었다.64)

민전의 이러한 활동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한민당 마산지부는 미군정의 허가와 보호 하에 3월 31일 마산을 필두로 정당의 세 지도자의 순회강연을 계획하였다.65) 이렇듯 당시 미군정은 대중이 왜 민전계 정당사회단체들에게 동조했는지 보다 ‘누가’, ‘무엇을’ 선전,선동하는 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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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사단 G-2, PR, No.154(46.3.21).
64) HQ, 6TH INF DIV incl #1 to G-2 PR #154(4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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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민족전선 연구 -경남민전을 중심으로-
박 철 규

1946.10.

[ …… 조선민주청년동맹원 다수를 검속 ….. 모두 똑같은 서울시내 소요계획을 …….

…… 중요한 관공서를 습격 점령 …. 정계요인 군정관공리 등을 암살할 계획 ……. ]

서울에서 청년, 학생, 노동자들이 시위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10월 23일

서울에서 청년, 학생, 노동자들이 시위

영남 소요사건이 경기도내에 파급된 20일이래 수도경찰청에서는 불온분자의 혐의로 조선민주청년동맹원 다수를 검속하여 문초한 결과 그중 18명은 모두 똑같은 서울시내 소요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22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시내의 중요한 관공서를 습격 점령하는 한편 정계요인 군정관공리 등을 암살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이 서류가 발견됨에 따라서 수도경찰청에서는 22일 시내의 경비를 한층 더 엄중히 하는 한편 일부의 부대도 새벽 5시에 출동하여 서울역 남대문 기타 요처를 경비하게 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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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46. 10. 23)

22일 정오 싸이렌을 기하여 수도 서울의 대파괴를 계획한 민청원의 일부 체포로 사건은 미연에 방지하게 되었는데 이날 정오에 민청원은 시내 관수동 관수교 부근에 모여서 테러를 시작하여 종로네거리로 약 3백여명의 남녀학생과 노동자들이 행진을 하여 종로 기독청년회관 앞에 이르렀을 즈음 경찰관의 제지로 해산하게 되자 일부 군중은 張澤相의 집을 습격할 계획으로 수표동에 이르러 개천 건너편에서 張청장댁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별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종로4가에서도 경찰관과 충돌을 하였으나 별일은 없었다. 일부 학생은 관수교에서 경관대의 추격을 받자 50여명이 하수도 구멍으로 도망을 하였다.

(동아일보, 1946. 10. 23)

1946 경남민전

[ …… 마산중학, 여중의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교육하고 군정에 반대하는 내용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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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민전의 조직적 전개와 활동

1) 제1기 : 민전의 결성~제1차 미소공위

당시 전개된 민전의 활동은 조성된 정치정세에 따라 합법투쟁, 반합법투쟁, 비합법투쟁을 병행하면서 전개되었다. 주요활동으로는 각종기념행사와 집회 및 시위주도, 의식화, 조직화 선전활동 등이다. 주요 이슈로는 공위재개와 성사투쟁을 기본으로 친일파 청산과 파쇼세력 타도를 통한 민주개혁과 민중생존권쟁취투쟁이었다.

46년 4월부터 전국적으로 민전계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의 검거선풍이 경남지역에도 밀어닥치게 되고56) 각종의 테러가 빈발하였다.57) 그런데다가 당시 대중의 생활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민전은 쌀 부족과 높은 물가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끊임없이 조직하였다.58) 이러는 가운데 제1차 미소공위가 파란 속에 무기휴회되었다. 이에 민전은 그들의 예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해방이후 최초로 개최되는 각종의 기념집회 등을 통하여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에 대한 요구를 쏟아 내었다. 나아가 미소공위 재개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지역의 광범위한 정당사회단체들의 결집체인 민전은 본격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지향을 대중에게 선전하기 시작했다. 동년 2월과 3월 사이에 반군정 팜플렛을 배포 및 살포하면서 반군정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들의 활동 목표는 그들의 조직을 최대한 확산시키면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방해하는 친일파의 청산과 미군정에 대한 반대, 나아가 향후 있게 될 미소공위에서의 주도권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전활동은 비단 경남지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6사단 관할의 전지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59)

민전 예하 단체에서 뿌려진 전단에는 “봉건제를 계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군정에 의해 지지받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가 미군정 하에서 발호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60) 또한 민전은 46년 3월 하순 러시아 선전영화인 ‘동방의 무지개’ 등을 각 지역의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일부 교사들은 영화관람을 위해 학생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 영화 역시 경남지역에서만 상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남한의 거의 모든 56) 도시와 읍에서 상영되었다.61)

한편 순회연극단은 러시아 연극인 ‘Hope’와 혁명극장조합에서 만든 ‘The Village With No Number’을 상영했으며, 때로는 발각, 체포되기도 하였다.62) 그들 순회선전단은 공연할 때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며 붉은 깃발을 내걸고, 취주악단의 반주 하에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면서 부산, 마산, 진해지역의 경남지방의 읍을 순회했다.

이러한 선전, 선동활동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중학, 여중의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교육하고 군정에 반대하는 내용을 가르쳤다.63) 이상과 같이 이들의 활동은 주로 전단의 살포, 그리고 연극이나 영화상영, 나아가 교단에서 직접 공산주의를 강의하는 것이었다.64)

민전의 이러한 활동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한민당 마산지부는 미군정의 허가와 보호 하에 3월 31일 마산을 필두로 정당의 세 지도자의 순회강연을 계획하였다.65) 이렇듯 당시 미군정은 대중이 왜 민전계 정당사회단체들에게 동조했는지 보다 ‘누가’, ‘무엇을’ 선전,선동하는 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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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사단 G-2, PR, No.154(46.3.21).
64) HQ, 6TH INF DIV incl #1 to G-2 PR #154(4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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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민족전선 연구 -경남민전을 중심으로-
박 철 규

1947.3.1. 민전주최 3·1절기념시민대회

[ …… 우리의 민주정부 수립에 일로 매진하자 …….

…… 許憲 朴憲永 金元鳳 呂運亨 …. 명예의장으로 선출 ……..

…… 기념사에는 김원봉과 민전산하 각단체를 대표하여 具在洙가 …….. ]

민전주최 3·1절기념시민대회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03월 02일

民戰주최 3·1운동 28주년기념 시민대회는 1일 오전 11시30분부터 봄빛어린 남산광장에서 수만 시민 참가리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식은 金光洙의 사회로 열리어 애국가합창 묵상에 이어 3·1운동의 정당한 의의를 계승하여 우리의 민주정부 수립에 일로 매진하자는 요지의 개회사를 李基錫이 낭독하고 임시집행부선거에 들어가 許憲 朴憲永 金元鳳 呂運亨 金昌俊 金起田 劉英俊 車愛利士등 8씨를 명예의장으로 선출하고 洪南杓외 23명을 위원으로 선출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당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김창준이 낭독하였다.

기념사에는 김원봉과 민전산하 각단체를 대표하여 具在洙가 낭독하고 병구를 무릅쓰고 참가한 허헌의 인사에 이어 각계 결의표명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 문화인 부녀 등 각 대표가 피력하였다.

계속하여 감옥에서 시민대회에 보내온 서한을 김광수가 대독하고 긴급동의가 속속 터져나와 박헌영 체포령취소 전평간부 즉시석방 테러박멸 국대안철폐 토지개혁실시 등의 주장을 채택 가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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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 민청 사무실에 가서 …. 배우기도 …….

…… 일제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단결한다. ……. 밀양중학교학생자치회 ……

….. 벽보투쟁 ……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로!” ……. ]

자치회를 준비하면서 (2)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27)

2011년 09월 21일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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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회 준비라야 별일은 아니지만 강령도 만들어야 하고 회칙도 정해야하며, 임원도 후보로 정해두어야 했다. 그리고 총회를 여는 날도 전체학생이 잘 모일 수 있는 날을 잘 잡아야 했고 회의 진행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교장이 보낼 방해꾼이 훼방할 틈을 주지 않도록 하여야 했다. 또 만일의 경우를 위해 경계를 맡을 사람들도 정해야 했다. 대강 날짜를 겨울방학 종업식 때로 정하고 종업식 직후에 그 모임을 열어 결성할 작정으로 일을 다그쳐 갔다.

나는 강령과 회칙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민청 사무실에 가서 다른 학교의 자치회 회칙을 찾아보기도 하고 거기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배우기도 했다.

강령은, 첫째 우리들은 학교에서 일제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단결한다. 둘째 우리들은 학교생활에서 자율과 참여로 공동생활을 학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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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약은, 자치회의 이름을 밀양중학교학생자치회로 정하고,……

그리고 준비회의 다섯 학생들의 회의를 열어 정식으로 성안을 결의하고 그것을 민청 사무실에 가서 등사판으로 인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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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동안에는 군정당국의 민주진영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떨었다. 지난해 10월 인민항쟁으로 토지개혁에 목매달고 있던 농민들이 조선공산당의 좌편향적인 투쟁지도로 대열에서 많이 떨어져 나갔다. 이런 시세를 타고 날뛰는 군정경찰의 폭압과 극우청년단체의 테러로 대중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투쟁대열이 살아있음을 나타내 보여야 했다. 그래서 벽보선전투쟁은 계속했지만 경찰의 감시와 극우테러단의 눈길을 피해서 하자니 자주하지 못했고 투쟁은 더욱 경각성을 가지고 해야 했다. 은밀히 품을 내어 벽보투쟁을 조직해서 벽보를 붙였지만 경찰은 그 이튿날로 일군을 대리고 와서 물로 적셔 벽보를 지웠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벽보를 만들어 붙였는데 그 이튿날로 당장 뜯기고 말게 되니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서 물로 적셔 뜯지도 못하게 아예 콜타르로 구호를 써놓기로 했다.

밀양교 서녘에 있는 제방축대의 난간은 폭이 3자쯤 되고 높이가 2자반쯤 되는 네모반듯한 콩크릿 칸으로 지어져 있는데 그곳은 벽보를 붙이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번에는 콘크리트 난간에 벽보를 붙이지 않고 거기에다 구호를 그 축대의 칸마다 콜타르로 큼직한 글자로 써서 아무도 지울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쌀쌀한 겨울밤 바람에 추위에 웅크려서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은 한밤중을 이용해서 해치우자는 것이다.

그 날은 미리 마분지 상자를 구해다가 이리저리 붙여서 가로 세로 2자반쯤 되게 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글자를 써서 오려냈다. 그놈을 난간 벽에 갖다 대고 그 위에다가 콜타르를 썩썩 칠하면 글자가 찍혀 나오는 것이다. 콜타르에 석유를 좀 섞어서 글씨가 잘 나올 수 있게 적당히 묽게 하고 콜타르를 칠할 붓으로는 아주 보드라운 방비자루를 준비했다.

그 준비작업을 하루 종일 하고 밤이 되어 일찌감치 자고나서 새벽 3시쯤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은 세 사람씩 두 패로 나누어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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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거기에는 경찰관이 보초를 서고 아무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다. 구호가 적힌 곳의 양쪽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수건거리고 경찰과 우익청년들은 눈을 날카롭게 하고 모인 사람들에게 독을 피우고 있었다.

며칠 후에 글자를 지우기는 했는데 지운 자리가 더욱 선명하게 구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구호는 아주 오래도록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로!”

마침내 겨울방학이 끝났고 개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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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5.1. 남로당 전평 메이데이 기념식

[ …… 민주건국운동 희생자에 대한 묵상 …….

…… 의장으로 許憲 朴憲永 金元鳳 … 선임 …….. ]

서울신문 1947년 05월 03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메이데이 기념식 거행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行事

남로당 민혁당 전평 공동주최의 미·소공위속개 축하 메이데이 기념대회는 남산공원 광장에서 오전11시부터 맑게 개인 창공에 각색 프랑카드를 날리며 몰려든 수많은 군중가운데 文殷鍾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어 애국가제창, 국기게양, 메이데이 기념가와 전평의 노래를 합창, 민주건국운동 희생자에 대한 묵상이 있은 다음 李仁同이 등단하여 개회사가 있고 임시집행부 선거에 들어가 의장으로 許憲 朴憲永 金元鳳 李仁同 4氏를 선임한 후 許憲의 기념사를 金桂林이 대독하였다.

이어 지난 9월 총파업의 희생자 유족에 대하여 의장으로부터 위문품과 위문장 증정이 있은 후 유가족 대표로 李英順의 답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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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5.

[ …… ‘미소공동위원회를 속개하고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자!’ ………

……. 자본의 사회를 부순 터 위에 민중의 정권을 세우자 ………

…… ‘적기가’를 부를 때는 「민청」형들이 나누어준 붉은 기를 흔들며 …….. ]

메이데이투쟁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29)

2011년 09월 28일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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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투쟁

5월이 다가들자 또 한바탕의 투쟁을 조직했다. 그것은 메이데이 축하대회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이번 메이데이 날에는 10월인민항쟁 이후 위축되었던 민주운동세력을 다시 모아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다그치는 일이었다. 그 첫째 구호가 ‘미소공동위원회를 속개하고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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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젖줄인 남천강 강변의 솔밭에서 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노래를 배우고 있다. 오월 메이데이의 노래이다. 곡은 모두 왜놈시절 군가로 배워서 잘 아는 곡조였다. 이 곡은 원래 일본군가가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기 나름대로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행진곡인데 곡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의 메이데이는 무슨 날인가
세계의 자본가가 두려워하는 날
세계의 노동자가 전투하는 날
정의의 붉은 깃발 휘날리는 날

우리들의 노동을 한번 그치면
세계는 죽음과 마찬가지다
우리 무기 단결로써 싸워나가자
정의의 새 세상을 찾을 때까지

………

그 노래는 많은 절로 이어나가는데 애석하게도 두 절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밖에「적기가」도 배웠고 백두산 항일유격대가 불렀다는「혁명가」도 배웠다. 모두 가사도 쉬웠고 곡도 쉬웠다. 그중「혁명가」는 참으로 힘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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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잡으라 억눌린 자들아 멍애를 벗어라 종된 자
우리의 앞에는 희망뿐이요 나가세 앞으로 앞으로
게걸든 소리에 목이 쉬리라 우리 피 짜내는 놈들아
맹렬한 최후의 전투에서 우리의 대오는 백배해

원수의 잔꾀에 속지 말으라 계급의 용감한 투사들
자본의 사회를 부순 터 위에 민중의 정권을 세우자
게걸든 소리에 목이 쉬리라 우리 피 짜내는 놈들아
맹렬한 최후의 전투에서 우리의 대오는 백배해

그리고 그날 민청 소년학생부에서 선배 청년이 나와서 메이데이 날의 의미를 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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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학생을 메이데이 축전에 참가시키기로 결의했다.

그해의 메이데이 날은 날씨가 참으로 화창했다. 밀양의「민전」지부와 「전평」지부가 주최하고 여러 민주정당 사회단체가 후원하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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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고요! 그러면 지난번 3.1운동 기념식 때 우익정당이 주최하는 식장에 나오라고 한 일은 무엇인가요! 그때 나간 학생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북은 공산당 천지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 이남은 그런 이북과 한 정부를 만들 수 없다, 우리들은 국부 이승만 박사를 받들어 따로 정부를 세워서 장차 이북 공산당을 몰아내고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은 정치집회가 아니던가요.”

“글쎄, 우리는 당국에서 지시하는 데로 했을 뿐이다. 지금 도에서 학생들은 어떤 집회에도 단체이건 개인이건 참석하는 일이 없도록 지도하라는 공문이 와 있다. 어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하고 교두는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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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가까워 오자 운동장으로 학생들이 등교할 때처럼 때지어 왔다. 선생들이 오기 전에 학생들은 거의 다 이미 집결장소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민청」의 연예반 형들이 연주하는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부르는 남녀 소년학생들의 노랫소리는 축제의 분위기를 한결 명랑하게 했다.

‘적기가’를 부를 때는「민청」형들이 나누어준 붉은 기를 흔들며 불렀고, ‘메이데이의 노래’를 부를 때는 학생모를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면서 용감하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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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대열을 짓고 본부석 확성기가 부르는 단체 순으로 질서 있게 행진하면서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대회장에 모인 일반대중들이 손을 흔들며 지르는 환성에 「민청」지도원이 나누어준 깃발을 흔들면서 대회장에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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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7.

소년선전대 일꾼으로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48)

2011년 12월 31일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소년선전대 일꾼으로

나는 집밖으로 나가자 지금 국민은행 바로 앞에 있었던 민애청 회관으로 들어갔다. 민애청 회관에는 마침 민애청 위원장이신 조우재 선생님이 계셨고 소년부와 조직부장을 맞고 계셨던 구XX 선생님이 여러 소년들 앞에서 말씀을 하고 계셨다. 미닫이 창문을 드르륵 소리 나게 열고 내가 들어서자 모두 나를 보고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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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어 일이 제법 진척이 되고 있다. 그런데 반동들이 ‘반탁한다.’면서 갖은 훼방을 놀고 있다. 이들은 서북청년회를 주동으로 해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등, 그리고 거리의 어깨(깡패)들을 동원해서 민주인사들에게 폭행을 하고 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보따리를 가지고 왔다면서 떠들고 다닌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안 받고 즉시 독립한다면서 3상회의 결정으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이는 친일파들을 끌어안고 미국 놈들의 후원을 받아 그를 중심으로 해서 친일 친미세력을 끌어 모아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만들 속셈이다. 그러면 일제 식민지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겉보기론 독립국의 허울만 입고 속내는 미제 식민지로 만들어, 친일파와 거기에다 친미파들의 세상을 만들어 낼 요량이다.

민주진영에서는 이를 폭로하고 인민을 동원해서 미ㆍ소공동위원회가 순조롭게 사업을 하고 남북이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기어이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이를 지지하는 대대적인 군중대회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이 군중대회의 지침은 민전의 중앙으로부터 하달되어 있고, 민전의 밀양지부에서 이 밀양군 군중대회를 7월 27일에 열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한다. 이 결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민전에 가입되어 있는 정당ㆍ사회단체가 각각 분공을 정하고 각 정당ㆍ사회단체의 밀양 지부는 각기 맡은 과업을 위하여 토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민애청에서도 분공을 받아 안고 토의를 붙여 실천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 중 민애청 소년학생부에서는 군중동원에서 소년선전대를 조직하려고 모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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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 선생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고 할 테니 맡겨만 주십시오.”
구 선생은 ‘허허…’ 웃으시면서 말했다.

“안 동무는 말이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래 동무는 하남면과 초동면을 맡아 주오. 초동면은 하남면에서 함께 처리할 것이고. 나중에 할 일을 따로 문건으로 만들어 줄게고. 신임장을 민전 면 지도부에 가지고 가면 거기에서 할 일을 지시해 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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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7138

[ …… 우리 소년선전대 4명은 민애청에서 지시하신 하남 초동 소년선전대의 과업을 …….. ]

여위띠고개를 넘으면서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50)

2012년 01월 14일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여위띠고개를 넘으면서

우리들 하남 초동 소년선전대는 수산 장날을 맞추어 장날 전날에 하남면 수산으로 가야 했다. 수산 장날은 3일 8일 장이다. 그 사이 이틀 동안 낮에는 밀양읍내를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민전 회관에 여운형 선생 영정을 모시고 빈소를 차려 놓은 빈청에 조문하러 오신 밀양고을의 어른들의 빈청 안내를 맡기도 하고 거기에서 잔심부름도 하며 지냈다. 저녁에는 대구 이종형으로부터 빌려온 책을 보며 지냈다.

22일 아침 일찍 민애청 회관으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들 하남 초동 소년선전대원 4명은 모였다. 회관에서 이미 구XX 지도원 동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지도원 동지가 일어섰고 우리들 하남면 초동면 소년선전대원 4명은 그 앞에 나란히 섰다. 지도원 동지는 나에게 신임장을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안 동무, 그리고 하남 초동 소년선전대원들 잘 다녀오시오. 이것은 신임장인데 수산에 가서 수산의원으로 찾아가서 원장 선생이신 강XX 선생님을 만나서 이 신임장을 드리시오. 강 선생님은 하남면 ?민전? 위원장이신데 이번 인민대회의 그 초동면과 합해서 그 지역 책임자요. 여러 분 소년선전대는 강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일하도록 하시오.”

“예, 잘 알겠습니다. 지도원 동지에게 아룁니다. 지금부터 우리 소년선전대 4명은 민애청에서 지시하신 하남 초동 소년선전대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하여 출발하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오겠습니다.”

지도원 동지는 대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고 잘 다녀오라고 거듭 말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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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7. 「공위 경축 및 임시정부수립촉진 인민대회」

[ ….. 민애청·여맹·전평·농조 등 민전의 산하단체인 당의 외곽단체가 모두 참석 …….. ]

내가 아는 박헌영 – 선전과 선동

[중앙일보] 197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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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의 이같은 조직확대공작과 병행된 필사적인 선전선동, 우익진영에 대한 고립화 공작에도 불구하고 공위는 협의 대상문제를 둘러싸고 교착 상태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남로당은 때를 놓칠세라 7월27일 민전 명의로 전국 각지에서 소위 「공위 경축 및 임시정부수립촉진 인민대회」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열고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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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회에는 민애청·여맹·전평·농조 등 민전의 산하단체인 당의 외곽단체가 모두 참석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군중 사이사이에 끼여있는 당의 「아지프로」대원은 미리 주어진 「슬로건」을 외쳤다. 미국대표에게는 욕설이 섞인 것을, 소련 대표는 환영한다는 내용이…. 공위에 대해 조작된 「아지프로」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화무대예술인의 「아지프로」대원들은 군중심리를 잘 포착하고 효과적인 선동 연설을 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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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

https://news.joins.com/article/1351715

1947.6.

[ …… 민애청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민전)의 돌격대’ 역할을 …….

……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

…… ‘반동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고, 이들 세력을 청산 …….. ]

[ ……. ‘혁명의 제2단계’ …… 모든 경찰관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여 그들을 좌익진영의 동맹세력으로 만들라 ……..

….. 1. 모든 반동분자들과 테러단체 및 그 선동자들에 관한 신상조사 ….. 장차 인민재판이 열릴 때 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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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건국노선

민애청은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가 속개되자 이를 강력하게 실천하기 위해 해산된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이하 민청)의 정치적 이상과 “민주건국의 역군이자 그 친위대”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여 ‘조직청년’의 재편성과 함께 광범한 청년층을 포괄하여 “조선의 진정한 민주국가건설”의 강력한 추진력이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모든 진보적인 청년층과 굳게 협력해서 세계 평화수립에 이바지한다는 목표 아래 동년 6월 5일 서울 시내
侍天敎堂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대의원 140명(또는 250명)과 많은 청년들이 운집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거행했다. 동 대회에서는 민애청 결성준비 위원장인 邊四憶의 개회사에 이어 임시집행부(변사억․姜衡求․이긍우) 및 임원을 선출하고, 선언서와 강령 및 규약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또한 동 대회에서는 한반도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이하:삼상결정안)을 절대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미소공위에 전달하자는 긴급동의안을 채택한 후 ‘민주건설’의 힘찬 일꾼이 되자는 결의를 했다.2)

특히 해산된 민청 본부에서는 각 지역의 지부를 민애청 단위조직으로 전환시키는 조직사업에 주력하면서 연락망을 통해 민청 간부들에게 민애청과 서로 연락하여 민애청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민전)의 돌격대’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3) 더 나아가 민애청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투쟁한다. 토지는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하라, 공출을 반대한다.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4)는 등의 슬로건을 내걸면서 각계․각층의 청년들에게 동 단체에 가입할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민애청은 민청과 마찬가지로 민전의 돌격대, 그리고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친위대 및 ‘미소공위 사수대’로 기능할 것을 천명하면서 미소공위를 통한 ‘남북통일민주독립국가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것이다.

한편 민애청은 그 조직목적 아래 민청의 노선을 계승하면서 미소공위를 강력하게 추진
하여 자주적인 민주주의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했다.5)

1. 본 동맹은 전 민주주의 애국청년을 단결하여 민주독립국가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2. 본 동맹은 조선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와 封建遺制의 숙청을 기한다. 3. 본 동맹은 청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이익을 위하여 헌신한다. 4. 본 동맹은 모스크바 3상결정의 정확한 실천에 의하여 조선을 부흥시키는 모든 사업에 전 면적으로 적극 참가한다. 5. 본 동맹은 전 세계청년과 긴밀히 연결하고 항구적 평화수립을 위하여 노력한다. 6. 본 동맹은 심신을 연마하고, 진리를 탐구하여 민족문화의 부흥과 과학지식의 보급 향상, 특히 문맹퇴치사업에 적극 노력한다.

이같은 민애청의 강령에서 나타난 역사적 임무와 사명은 민청의 노선과 같은 것이었다.6) 이러한 사실은 민전이 “신규회원들이 가입하면 민청의 노선을 민애청의 노선으로 하여 설명하라”고 지시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7)

민전에서는 미소공위가 속개되기 전 ‘극우반탁진영’에 의한 ‘미소공위속개반대운동’에 대항하여 보다 강력한 ‘미소공위속개추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전 산하 정당․사회단체에게 당면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 당면과제란 우선 삼상결정안의 충실한 실천을 위해 좀 더 과감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음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는 것을 관철하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일제잔존세력인 친일파․민족반역자․파쇼세력에 의한 ‘반동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고, 이들 세력을 청산하여 한반도의 민주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민전에서는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정권의 장악에 있다”고 하면서 한반도를 외래의 독점자본 앞에 상품시장으로 예속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동세력 및 정책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자주독립과 민주개혁이 실천될 수 있는 ‘인민정권’을 수립하려는 데 최대의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표명했다. 그리고 민전은 바로 이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민전 산하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그 투쟁을 민전의 목표인 ‘인민민주주의적 정권’수립에 집중시켜야 하며 그저 막연하게 미소공위의 속개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소공위가 친일파․민족반역자, 반동지주와 대자본가, 매판계급 등이 수립하려는 ‘반동정부’를 탄생시키지 않도록 하여 민주주의적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방책을 수립할 수 있는 ‘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면서 속개되도록 촉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8)

이러한 민전의 건국노선은 민전의 산하단체로서 그 노선을 지지하는 민애청의 강령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애청을 비롯한 민전에서는 삼상결정안을 지지하면서 그 실천단계로서의 미소공위 속개와 그 성공을 통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반동지주와 대자본가, 매판계급을 제외하고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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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좌익진영에서도 미소공위 협의대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자파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남로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미소공위에서 협의대상 문제가 구체화되자 당세를 급속히 확장시킬 목적으로 남로당 노선의 승리 라는 팜플렛을 각 기관에 배포함과 동시에 ‘당원 백만 돌파’를 목표로 각급 지방당과 기관세포에 ‘당원획득책임제’를 지시하고, 우선적으로 ‘당원 5배가 운동’을 전개했다.38) 민애청 역시 1947년 7월 8일 동회관에서 ‘중앙확대위원회’를 개최하여 향후 활동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한 후 청년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의 확대강화 방안으로 동년 8월 15일까지 ‘맹원 2백만 돌파’를 결의하고 각 道로 조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39)

또한 전평 역시 100만 회원을 목표로 조직의 확대강화투쟁을 전개하던 중 1947년 6월 한달 동안 조합원 중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을 탈퇴하고 복귀한 자와 신입회원을 합하여 8만 명 이상의 회원이 급증하기도 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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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재개된 미소공위는 서울회의에 뒤이어 1947년 7월 1일 평양에서 브라운소장, 스티코프(Shtykov, T.F)중장 이하 미․소 양 대표위원을 맞이하여 미소공위 참가를 청원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와의 합동회의를 개최했다. 미소공위 합동회의의 2단계인 평양회담은 남한의 복잡한 상황과는 달리 북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개최되었다.

특히 평양회담에는 1946년 3월부터 급속한 시일 내에 삼상결정안의 기본정신을 실천하여 토지개혁 및 민주주의적 노동법, 남녀평등권 법령 등을 과감하게 수행한 혁명전사들이 협의대상의 대표에서 주동부대로 참석했으며, 서울회담과는 달리 우익진영의 유령단체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또한 평양회담이 개최됨과 동시에 1947년 6월 30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는 ‘미소공위축하평양시민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동 대회에서 결의된 선언서는 앞서 언급한 남한에서 좌익진영이 주장하는 민족통일전선론과 비슷하다. 다만 북로당 대표로부터 임시정부 수반으로 김일성을 추대할 것을 미소공위에 요구하자 대중들은 이를 지지했으며, 북조선 민청에서도 “조선인민의 반역자이며, 국제공약인 삼상결정을 파괴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는 김구․이승만․김성수․장덕수․曺晩植 등을 미소공위 사업에서 절대로 배제해야 된다”고 하면서, 임시정부 수반에는 북한의 전 청년의 이름으로 김일성을 추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43)

그러나 1947년 7월 2일 평양에서 5, 60만 명이 참가한 반탁시위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반탁시위 군중들은 누군가의 명령이나 지도 없이 “공산주의자를 박멸하라”,“인민위원회를 해산하라”, “반탁과 즉시 독립”, “김일성과 박헌영을 죽이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여 북한 경찰들은 소련군대와 협조하여 이를 진압했다. 그 결과 472명이 즉석에서 사망했고, 2,000명이 중상을 입었다.44)

이상과 같이 좌우익 양 진영은 미소공위가 재개된 이후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권력의 문제에 현실적으로 당면하자 더욱 치열한 대립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소공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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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15 2주년 기념시민대회 추진과 혁명운동

제2차 미소공위가 다시 정돈되자 당시 좌익진영의 전반적인 비밀명령의 이슈는 이 시기를 ‘혁명의 제2단계’로 명명하고, 다가올 혁명을 위해 돌격대로 하여금 이에 준비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애청의 각 지부는 모든 경찰관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여 그들을 좌익진영의 동맹세력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같은 전략은 바로 좌익진영을 탄압하는 전위대인 경찰을 좌익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혁명운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77)

특히 청주 민전에서는 1947년 8월 충청북도에 소재한 민애청을 비롯한 모든 산하단체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78)

1. 모든 반동분자들과 테러단체 및 그 선동자들에 관한 신상조사를 한다. 이러한 신상조사 는 장차 인민재판이 열릴 때 제시될 것이다.

2. 모든 회원들에게 다가올 혁명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것임을 상세히 설명한다.

3. 현재의 기간은 혁명을 준비하는 제2단계이다. 혁명을 위한 계획은 신중히 세워져야 하며 모든 선전문건은 혁명이 발생할 때 살포용으로 보관되어야 한다.

4. 트럭운전수와 경찰로부터 강력한 좌익세력을 조직화해내는 사업에 전력해야 한다.

따라서 민애청의 지부들은 미소공위가 정돈된 상태에서 제2의 혁명운동을 위해 민전의 지시에 따라 모든 우익진영의 지도자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했으며, 모든 학교나 경찰서, 공장, 관공서, 그리고 민청이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던 모든 지역에 비밀서클이나 소조직을 만들어 가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79)

특히 1947년 10월 13일 수도관구 경찰청에서 특별 발표한 남로당 계열의 ‘8․15폭동음모사건’의 진상에 따르면 대략 동년 8월 15일을 기하여 좌익진영에서는 기념대회를 가장하여 혁명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 당시 북한 주재 소련군 사령부 정치위원 샤브신(Anatoli I. Shabshin)의 직접 지도하에 해주로 도피 중에 있는 남로당 중앙정치위원
회 대표 박헌영과 서울에 있는 동 위원인 허헌․이기석․이주하․이승엽․金三龍․구재수․金龍岩 등이 주동이 되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첫째, 집회허가 여부를 막론하고 일대 군중 지배 시위를 감행한다는 전제하에 사전에 경찰과 우익세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어 소기의 목적을 감행 실시할 것. 둘째, 비합법적 폭동시위를 은폐하
고 군중에게 합법적 대회를 가장하여 사기적인 동원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합법面에 민전이 중심이 되어 8․15기념행사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당국에 표면상 교섭하는 형식을 취할 것. 셋째, 합법적인 8․15기념행사준비위원회는 교묘히 잠복하여 남로당의 조직체계를 따라 극비밀리에 ‘폭동비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폭동을 준비한 다음 8월 15
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일제히 봉기를 야기하고 방화, 살해, 파괴, 시위를 전개할 것. 이러한 3대 방침의 기본원칙에 따라 남로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폭동준비지령 8항목을 결정하고 8월 1일에서 8월 5일까지 서울시 및 각 도에 이를 집행하도록 지시하고, 각 도에 ‘폭동비밀투쟁위원회’를 조직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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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노선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추진운동

김행선

[ …… 민전과 남로당의 노선이 반민족적인 동시에 매국적인 점을 지적 반성하여 우리 평택군 유지 일동은 탈당 …….. ]

경기도 평택군 좌익단체 간부 집단 탈당

동아일보 1948년 01월 13일

적화의 지하공작으로 유명하던 경기도 平澤郡 좌익단체 간부들은 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집단 탈당성명서를 수도청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민전과 남로당의 노선이 반민족적인 동시에 매국적인 점을 지적 반성하여 우리 평택군 유지 일동은 탈당하는 동시에 지하에서 준동하는 비양심적 분자에 대하여 용감히 투쟁하여 분쇄할 것을 맹서한다.

平澤郡民組織議長 金XX

同 民戰組織部長 方XX

同 남로당노동부장 李XX

농민조합위원장 兪XX

노동조합위원장 權XX

同 남로당청년간부 金XX

同 松炭面民愛靑委員長 李XX

同 여성동맹위원장 洪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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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愛靑總務部長 黃XX

남로당위원장 柳XX

[ ….. 張澤相총감을 수류탄으로 저격 ……

……. 民愛靑원인 것과 그리고 현장에서 이 자의 지휘로 ……. ]

장택상 저격범 취조 진행

동아일보 1948년 01월 28일

24일 아침 노상에서 등청 도중의 수도청 張澤相총감을 수류탄으로 저격한 범인에 대하여서는 방금 일체 극비밀에 부치고 엄중한 문초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방면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범인은 3명으로 25일 체포된 文모(23)라는 자는 전남 화순 출생으로 좌익계통 民愛靑원인 것과 그리고 현장에서 이 자의 지휘로 범행이 수행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하며 기보한 바 24일 아침 현장에서 체포한 범인과 25일 체포한 범인 이외에 또 한 명의 공범이 있다 하는데 그 자는 시내 모 관청에 근무하는 자라 하며 방금 배후를 추궁중인데 금명간 사건 전모가 발표될 것이다.

서울시내 선거사무소 습격범 14명 송청

조선일보 1948년 04월 15일

시내 선거등록사무소 습격범 14명이 12일 검찰청에 송청되었다.

황학동사무소 습격범 南勞黨員 郭XX 외 3명

노고산동사무소 습격범 民愛靑員 金XX 외 6명

명륜동사무소 습격범 南勞黨員 裵XX 외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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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에 대한 당시 사회단체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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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애국애국청년총동맹 : “지난 3일 제주도에서는 단선 등록을 강요하려는 폭압에 반대하여 궐기한 애국 인민에 대하여 각하의 경찰을 대량 파견하여, 이 애국인민을 모조리 닥치는 대로 탄압하고 있다. 이는 단선을 거부하는 애국인민들을 멸족하려는 가공할 사실이다. 또한 이는 5월 10일 강행되려는 매국단선 투표의 서곡이라고도 할 것이다.

우리 민애청은 참을 수 없는 격분으로 항의하는 동시에 이 원한의 피로 물들인 애국인민의 뜻을 받들고 어떠한 폭압이라도 이를 박차고 단선 투표를 분쇄하고 통일 조국의 민주독립을 완수하려는 결의를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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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 : “지금 제주도에서는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살상당하여 넘어지고 있다. UN조위 감시하의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4월 3일 일제히 일어난 애국인민들에 대하여 총과 탄환은 어느 나라에서 누가 가져온 것인가. 죽어도 잊을 수 없다. 제주도인민은 일찍이 일제시대에도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워왔으며 거년 3월 13일 투쟁에서도 용감하였었다. 우리 전 인민들은 멀리 고도에서 무수한 희생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제주도 동포들을 구호하자. 제주도 인민의 싸움은 곧 우리 인민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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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민족전선 : “제주도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우리 민전에서는 전 인민의 의사와 절실한 요청을 대표하여 사건의 진상을 구명하고자 각계를 망라한 강력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군정 당국과 누차의 교섭을 전개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노력에 대하여 정의있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 민전대표 최태용(崔兌龍)씨는 27일부터 연일 교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일에 이르기까지 언(言)을 좌우하여 책임자와의 면담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당국의 무성의한 처사는 조선인민의 중한 투쟁을 묵살하여 버리려는 배짱 이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당국의 무성의에 대하여 항의하는 동시에 고립무원의 제주도 인민의 염원을 승리로 달성하기 위하여 전 조선인민은 조국의 주권을 방위하고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한 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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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49816

‘산군의 부탁으로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인쇄’
김관후 2014년 07월 25일

1948.11. 여순 폭동

[ …… 폭도는 民愛靑과 그밖에 반정부적 단체와 유기적 연락을 …….

…… 반란에 청년과 학생이 다수 참가 ……

…… 반란군 수백 명과 이에 가담한 청년학생과 더불어 蠶動 ……. ]

국회 여순사건조사단 崔允東의원 귀환 보고

서울신문 1948년 11월 03일

국회휴회중 금반 여수사건이 돌발되자 원내 외무국방·내무치안 양위원회는 연석회의를 열고 우선 최윤동의원 외 수명을 조사차 현지로 파견하였는데 동 조사단 일행은 1일 귀경, 2일 본회의에서 최윤동의원은 요지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금반 사건은 조직적이며 장구한 기획 하에 실천된 폭동이다. 즉 불과 40명의 폭도는 民愛靑과 그밖에 반정부적 단체와 유기적 연락을 취하고 한편 국군 내의 불평 장병을 선동 포섭하여 대반란을 야기한 것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관심사는 반란에 청년과 학생이 다수 참가하였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가장 신뢰할 만한 기관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다.

반란은 진압된 셈이나 현지 반란군 수백 명과 이에 가담한 청년학생과 더불어 蠶動하고 있으며, 약 200명 정도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그러나 이들 소수 반도는 얼마 안되어 완전히 소탕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번 제14연대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엠원 총구 100정, 카빈 총구 100정, 박격포 數門, 트럭 20여 대가 없어졌는데 이들 병기의 회수가 초미의 급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경찰측의 추산에 의하면 군관민의 사상 수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다. 여수방면 경찰 사망 220명·부상 150명, 국군 사망 150명·부상 300명, 양민 사망 530명·부상 250명”

1948 여순

[ …… 학생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활동을 했는데, 옮길 때는 여학생들이 쭉 앞에 가면서 살피고 ……

…… 여수에서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영웅적으로 싸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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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당시 순천군당 조직은 어떠했습니까?

윤기남:그때 지윤섭 씬가 하는 사람이 군당위원장이었어요. 30대 후반이나 되었을 건데 아마 순천읍 사람일거요. …. 선전부장으로는 광양 옥곡인가 어디 출신인 김XX으로 당시 순천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었을 겁니다. …….

당시 농맹도 군단위 조직, 면단위 조직이 있었어요. 여맹도 있었고요. 1948년 8 25선거를 끝내고 내가 조직부 부부장으로 올라갔는데 당시 조직상황은 환하지요. 그때 순천군 당세가 전체 얼마인고 하니 5,700에서 6,000 가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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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 경찰서가 우리한테 포위되어 있는 셈이었어요. 포위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매일매일 경찰서 동향보고가 다 들어옵니다. 이쪽은 5,000명 조직세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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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우리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 무지무지하니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야간에는 어떻게 한다, 오늘은 어디로 아지트를 옮긴다 등등요. 금곡동, 매곡동 동외리 요쪽에 우리 아지트가 많았어요. 저전리 그쪽에도 조금 있었고요. 생목 그쪽에는 철도노조들이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잠복근무를 해도 우리가 미리미리 아지트를 이쪽 저쪽으로 옮겨버리니까 잡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학생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활동을 했는데, 옮길 때는 여학생들이 쭉 앞에 가면서 살피고 이상하고 위험한 것이 있다 싶으면 근방에 사는 합법 당원들이 나와서 포위하고 보초 다 보고해서 저쪽 미리 장만해놓은 아지트로 무사하게 빠져나가지요. 그때 조직배가운동이란 것을 남로당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박헌영이가 말하듯 100만 당원이라고 했습니다. 100만 당원 중에서도 당시 전남이 전국의 최고였어요. 1948년 8월경 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에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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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여수군당에서 오판을 할 수도 있었겠네요. 이걸로 해서 전국적인 봉기로 일으켜 보자는 그런 생각요.

윤기남:그럴 수도 있죠. 또 부대 내에서도 오판이 있었지요. 확대되면 모두 함께 들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요. 실제 당시 군산이나 마산, 대구 같은 연대들에 조직세력이 강했으니까요. 자기들처럼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까 같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겠지요.

실제 당시 선동하고 봉기시키기 위해서 지창수 연설에서 그것을 오히려 조장시켰지요.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전국적인 상황이다. 해방은 곧 눈앞에 다가왔다. 북에서도 내려오고 있다. 이런 유언비어가 실제 유행되었습니다. 봉기시킬라고 하니까 그런 전술상 데마고그(선동 정치가)가 나타났고, 나중에 여수군당도 산에 올라가서 자기비판을 했지요
.

그렇게 해서 한번 일어나니까 모두 들고 나섰지요. 여수에서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영웅적으로 싸웠습니다. 진압군들이 들어올 때 건물 하나하나를 두고 시가전을 했는데 학생들이 많이 죽었지요. 순천에서는 철도노동자들이 무장하고 진격할 때 희생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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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순천에서 겪은 여순사건*
* 제3절은 이학영(李學永) 집필임.

1. 내가 겪은 여순사건①

증언:윤기남
대담:이학영
증언시기:1994년 11월 18일

이 기록은 여순사건 당시 남로당 순천군당 조직부 간부로 일하고 있었고 여순사건 이후에는 순천군당위원장까지 했던 윤기남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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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0.20. 여순

[ …… 전평, 민청, 여맹, 등 …. 선동 연설이 있었고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 ……..

1.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 ]

[ …… 민애청 … ‘교원노조’ ‘철도노조’ 등 ….. 각 단체 별로 반동자의 수색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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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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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날이 밝자 반란군들은 지방의 좌익분자들과 손을 잡고 숨어 있는 경찰관, 기관장, 우익 단체원, 지방유지 등 소위 반동 분자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을 수색하였다. 9시30분 통근열차로 반란군 3개대대중 1개대대만 여수에 남겨 두고 2개대대는 순천으로 향했다. 그 동안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2개중대의 책임자 홍순석 중위도 반란군과 상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10시경에는 시내 몇군데에다 제주파견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승만, 이범석 등 반동분자들이 자기들을 민족상잔을 벌리려고 제주도로 파견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여 궐기했고 남북통일을 위해 매진하겠다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붙였었다.

그리고 반란군 3개대대중 1개대대만 여수에 남겨 두고 2개대대는 12시경에는 중앙동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열었었는데 당시 적산가옥이었던 小山商會(현 해바라기 슈퍼)의 베란다에 만들어진 연단에서 좌익분자들의 연설에 이어 지창수에 대한 소개와 인사말이 있었다. 시내 도처에는 ” 인민군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 점령을 목표로 남진중이다. 여수에 상륙한 인민해방군은 여수 순천을 해방시키고 북상중이며 대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도 해방을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식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다행히도 여수일보와 합동통신에서 보내는 통신무전을 계속 받고 있었기에 날조된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하오에 여수일보는 반란군에 점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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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3시30분 중앙동 광장에서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가,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인민대회가 시작되었다. 여수 남노당 위원장 이용기가 인사를 한 후 유XX이 연설을 했는데 ” 지난 밤부터 여수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 와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천으로 북상하여 이를 점령하고 북으로 북상중에 있다. 또한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중에 있으며, 남조선의 전체 해방은 목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도망 쳤다. 따라서 우리인민은 총 궐기하여 남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데 앞장을 서야한다.”고 선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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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군을 대표해서 지상사가 인사를 하고, 좌익을 대표해서는 박기암이 축사를 했다. 다음으로 전평, 민청, 여맹, 등 좌익대표들의 짤막한 선동 연설이 있었고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1.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계획을 실시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하고 “최후의 결전가”를 부르고 대회를 끝냈다.

이 시각 이후 지하에 있던 좌익단체들이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학통’ ‘민주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 등 일제히 간판을 내걸고서 각 단체 별로 반동자의 수색에 나섰다. 반란 1주일동안 여수읍사무소(구 여수시청)는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되었고 중앙동에 있던 백두회관과 화신(구 신탁은행)은 반란군 본부가 되었다. 잡아들인 경찰관이나 지방우익 인사들은 중앙동 原商店건물에다가 가뒀다가 나중에 읍사무소 2층으로 옮겨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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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계열에서는 49년 봄부터 「3월 공세」니「4월 공세」니 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민심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공산당은 남한을 공격,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들의 수도를 서울로 옮겨온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와 함께 곳곳에서 유격전파파괴공작을 펴고 이 공세에 가담하는 사람은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상당한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허위선전을 일삼았다.

8월이 되자 좌익에서는 소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이란 이름아래 잔당을 정리, 8월 공세야말로 반드시 성공한다고 불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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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당은 단념치 않고 다시 9월 공세를 내걸고 9월20일까지는 남한을 접수,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엉뚱한 소문을 퍼뜨렸다.

공산당은 이 같은 공세를 위해 그 해 7월에는 이른바「전농」·민애청·여맹·민학·교육자협회 등 산하단체를 동원, 폭동계획을 세우고 요인암살 등을 지령했다.

공산당은 행동대로 「K대」와 「ST대」(특별행동대)라는 유격대까지 조직했었다.

항간에는 미군이 철수하면 인민군이 밀고 내려온다느니, 서울시내에는 벌써 비밀히 월남한 인민군 다수가 잠복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민심이 뒤숭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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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던 중 시경에서는 그 해 9월21일 서울시내 중구오장동 등 7개소에서 남로당의 무기제조공장을 적발, 수류탄껍질 6천 개와 화약 17상자 등을 압수했다.

공산당은 행동대를 중앙청을 위시한 서울시내 관공서·요인저택·주요건물 등에 배치, 이 수류탄을 같은 시간에 일제히 폭파시켜 일대혼란을 야기 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퍼뜨렸던 3월 공세니, 9월 공세니 하는 소문은 모두가 6·25남침을 앞두고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헛소문으로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계획적인 작전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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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박완서

[ …… 민청학습 등에 시달리면서 ‘황폐의 극치’를 ……..

…….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었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 ]

[조우석 칼럼 책에 길을 묻다] 박완서와 유종호

[중앙일보] 2009.02.28

사무치게 아름다운 공간 ‘박적골’

성장소설만한 읽을거리도 흔치 않다. 보통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세의 『데미안』을 꼽는 모양이지만 내 마음의 성장소설은 따로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거기 정말 있었을까』 2부작이다. 유종호 선생의 신간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을 읽다가 박완서의 그 유명한 소설까지 생각났는데, 물론 둘은 다르다.

장르부터 회상록(유종호)·성장소설(박완서)로 갈린다. 하지만 지난 시대 삶의 세목에 대한 증언이자, 사회사·풍속사로 유감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먼저 읽어볼 『싱아』, 『산』의 경우 박완서 문학의 원형을 엿보는 재미가 짭짤하다. 그 하나가 미군 PX의 초상화가 박수근. 한국전쟁 당시 그곳에 취직했던 여대생 박완서가 당시 불운했던 ‘환쟁이’, 그러나 훗날 국민화가로 뜬 그를 만난 것인데, 포인트는 PX 풍경에 대한 묘사다. 리얼했다.

“그 일대에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꼬여들어 사고팔고 속고 속이고 훔치고 구걸하느라 마음껏 흥청대고 있었다.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국적 활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천박의 근원지가 바로 PX였다.”

훗날 신세계백화점으로 변신했던 그곳은 이웃 남대문시장과 함께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자궁이 아니던가?

인공(人共) 치하 서울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피난을 못 갔던 그녀는 수령 교시 따위를 읽는 민청학습 등에 시달리면서 ‘황폐의 극치’를 체험했다. 어느 정도였을까?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었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는…. 반세기 전 서울을 무대로 만들어졌던 사회주의 지옥에 대한 증언으로 이만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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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510972&ctg=

[ ……. “죽여야 합니다.” 민애청단원이 외치자 여기저기서 “죽여”, “죽여라” …….. ]

[ ….. “죽여”, “죽여라” ………

….. 총알이 아깝습니다. 때려잡아 죽여야 합니다.”……….

….. “때려죽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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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 9명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두개골이 깨져 피가 넘쳐흐른 사람, 얼굴이 일그러진채 鮮血선혈이 낭자한 사람, 뒷골이 터져 엎드려진채로 죽은 사람, 머리에서 터진 피가 아직도 빨간 것을 보면 죽은지 얼마 안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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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씨 할아버지는 아직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광경을 그대로 우리(국군)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소리소리 지르는 놈은 한 30쯤 돼 보이는 대장 이었던가 봐. 이놈이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 ‘지금부터 인민재판이다. 여기 와서 반동들 처단에 참가하지 않는 놈은 미 제국주의 앞잡이로 똑같이 처단할 것이다. 여기 통행증이 있다. 이걸 안 가진 놈은 죽을 줄 알라.’

그러면서 쇠줄로 묶어서 엮어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 반동들은 우리 인민의 피를 빨아 배때기가 불러온 놈들이다. 김일성 동지를 배반하고 인민공화국을 반대한 악질반동—여기 있는 검둥개새끼(경찰제복 입은 사람)는 거창 농민들을 개같이 부려먹던 놈들이다. 뒷다리가 부러진 누렁이 개새끼(상이군인)는 이승만 괴뢰정권 앞잡이로 우리 영용한 인민군을 죽인 놈이다.”

대장은 잠시 무서운 눈초리로 지주인 한씨를 쏘아보고 말했어.

“이놈은 여러분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살찐 돼지 같은 놈이다—옆에 있는 이자(청년단원)는 우리 빨치산을 괴롭혀온 악질 반동분자다─”

또 잠시 이들을 쏘아보다가 목청을 가다듬어, “이자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오?”하며 동네사람들을 둘러보는 거야.

그러자 한 청년이 손을 들었어요. 좌익 민애청 단원이었지. “죽여야 합니다.” 민애청단원이 외치자 여기저기서 “죽여”, “죽여라” 아우성 치는 게 모두들 살기가 등등해. 짜고 하는 짓들이야.

대장은 다시 되물었어.

“어떻게 죽이면 좋겠오?” 똑같은 청년이 대답했어요.

“반동들을 총살 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총알이 아깝습니다. 때려잡아 죽여야 합니다.”

여기저기 서 “때려죽여라”가 공허하게 메아리쳤지. 동네사람들은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할뿐, 아무도 아무 소리도 못했어요.

대장은 동네사람들 앞으로 다가왔어요. 그중에 만삭인 임산부가 있었지. 임산부를 보고 묻는거야.

“반동들을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오?”

임산부는 얼떨결에,
“네, 때려 죽여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죽여라”의 합창이 울려 퍼졌오.

조씨 노인의 설명은 계속 됐다.

“다들 짜고 하는 짓이었소. 공비 40여 명이 끌고 온 경찰관과 청년 10명을 쭉 둘러싸고 ‘때려죽이라’는 고함에 호응하듯 따콩 총 개머리판으로 먼저 경찰관 한 명의 머리를 힘껏 내려 치더구만. 검은 제복의 경찰관은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져 목을 비튼 닭 모양으로 푸드득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더만.

그런 식으로 열 명을 다 때려눕히자 보초 서던 놈이 달려왔어. 대장 쪽을 보고 소릴 지르는거야. 국방군 놈들이 온다고. 그러자 10명을 때려죽인 빨치산 공비 40여 명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덕유산 골짜기로 사라졌어요. 지금도 그 골짜기 안에 어딘가에 숨어 있을거요. 한 시간도 안 됩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중대장이 우리 분대에게 즉각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노인들이 공비들이 잠적한 길목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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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2009.1.
◆덕유산 빨치산 토벌이야기①

李贊植 / 예비역 육군준장

1950

[ …… 민청원들은 …. 마을조무래기들 …「미제를 때려잡기 위한 곤봉훈련」을 …….

…… 밤에는 죽창을 내주며 「반동분자」를 색출하도록 했다. …….. ]

사선을 넘어서 | 청진서 서울까지 동토탈출기 (김만철) | “나는 골수공산주의자였다”

[중앙일보] 198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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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가슴아픈 총소리의 기억을 갖고있었다. 그것은 6·25당시 나와 내친구들의 밀고로 처형당한 우리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박히던 총소리였다.

전쟁중이던 50년 가을, 내가 살았던 산골마을(함경북도 종성군 남산면 산성리)은 텅 비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모두 끌려갔고 노약자와 부녀자만 남아 있었다. 마을은 민청원들이 경계했다.당시 내나이 10살, 동광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민청원들은 아침이면 마을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미제를 때려잡기 위한 곤봉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밤에는 죽창을 내주며 「반동분자」를 색출하도록 했다.

밤이 되면 조무래기들은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는 우쭐한 기분으로 이마을 저마을을 설치고 다녔다. 그리고 남의 집 토방밑에 몸을 숨기고 호롱불이 켜진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증골(절이 있는 산골)로 가는 길목 숲속에 숨어 불공드리러 가는 사람들을 알아내 그 이름을 일일이 고해바쳤다.

그러던 어느날 밤, 무장한 내무서원과 인민군등 20여명이 민청원들을 앞세우고 우리마을에 들이닥쳤다.
내무서원들은 마을인민들을 전원 집합시켰다. 그리고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어른들 틈에서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사람 한사람씩 불려나가 포승에 묶이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반동분자」라고 밀고했던 동네어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무서원들은 부녀자를 제외한 남자 20명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갔다.잠시후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그날밤 나는 죄책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총소리의 기억은 일생동안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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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95090&ctg=

1950 박현채

[ ….. 현채는 광주서중생 …. 광주서중은 ‘광주의 모스크바’ …..

….. 현채가 열다섯에 입산 …. 그 나이에 정치지도원 하믄서 대원들허고 당간부들거꺼정 정신교육, 사상교육 시켰어. …….. ]

“나헌티 현채는 구세주였제”

[박현채 회고록] 태백산맥 ‘선요원’ 장기형 인터뷰

이문영 기자 , 20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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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채는 당에서 하산시킨 거여. 현채가 하도 영리하고 아까우니께 간부들이 너는 산에서 죽으믄 안 되겄다, 너는 학원침투 하라 혀서 내려 보낸 거여. 나하고 가깝다는 걸 아니께, 날 따라 내려가라는 거였제. 근디 잽혀 부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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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

난 화순에 있었고, 현채는 광주서중서 공부혔어. 1950년 9월28일 인민군 전면 철수 때 광주서중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원들이 이북으로 후퇴허다가 쫓겨 내려와 부렀어. 그러고 현채는 입산헌 거야.

사실 그때 나는 산에 올라갈 ‘의식’꺼정은 없었어. 친구들 안 따라가믄 왕따 당혀부리니께 그냥 따라간 거여. 화순 탄광마을 근처에 있었는디, 경찰 기습으로 부대가 깨지믄서 백아산에 배치받었제. 그렇게 ‘540부대’에 갔더니 현채가 있는 거여.

난 폭탄중대였는데, 현채는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을 하고 있더라고. 소년 돌격중대라고 혀서 어린 애들 부대였어. 현채보다 더 어린 애들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어.

나헌티는 현채가 구세주였제. 나는 농업학교 출신에다가 화순 민청을 통혀서 올라갔응께 인맥이 없었어. 근데 현채는 광주서중생이었으니께 달렀어. 그때 광주서중은 ‘광주의 모스크바’ 아니더라고.

처음에 난 부대 내 요시찰 인물이었어. 내가 밥 다 안 묵고 중간에 숟가락을 놔 불믄, 저 놈이 지주 아들이라 잘 묵고 잘 살다가 보리밥 묵기 싫으니께 안 묵는다고 핀잔 주고 그렸어.

현채가 열다섯에 입산혔어. 나이가 어렸어도 워낙 영리하고 이론이 정연하니께, 그 나이에 정치지도원 하믄서 대원들허고 당간부들거꺼정 정신교육, 사상교육 시켰어. 현채가 나보고도 소양교육 받으라고 혀서, 난 “이 놈아, 여기꺼정 와서 뭘 배우라고 허냐”믄서 교육 안 받고 도망가불고 그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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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oreafocus.com/news/service/article/mess_news.asp?P_Index=4408&flag=

노동당 만세 대한민국 타도 민전 투사 김원봉 찬양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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