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

2019.06.12 07:09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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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 …..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

[ …..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 ……. ]

[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 ….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 …….

……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 ]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

李東馥이 젊은세대와 나누고 싶은 대화(1)

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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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민족독립운동자로 돌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위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229-236쪽]

『이 때에 ´대일전선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등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同床異夢)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264쪽]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으로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266-267쪽]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 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에 좌유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279-280쪽]

혹자는 위에 인용된 대목들에 담겨진 백범의 생각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때의 일이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바뀌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에 인용하는 의 다른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된 대목은 의 ´하권´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하권´은 백범이 아직 중경에 있을 때 기술한 것이 맞다. 그러나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이 포함된 ´나의 소원´은 백범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뒤에 기술하여 1947년 11월에 발표한 글이다. 이 대목에 담겨져 있는 공산주의관을 소지한 백범이 그로부터 불과 5개월 이후인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수령´이었던 김일성에게 북한이 ´주장´하는 얘기를 과연 했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나라 젊은 세대가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의 대목들을 인용한다. 범우사판 의 ´(나의) 정치이념´ 가운데 몇 토막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읽기를 권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게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 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이거니와 이 것은 수백 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세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 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 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306-308쪽]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 http://www.dblee2000.pe.kr/

http://www.independent.co.kr/news/n_view.html?kind=main&id=4135

[ ……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 공산당이 침입 …….

……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 …….

…… 白狂雲, 鄭一雨, 金佐鎭, 金奎植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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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25일에 사망한 임시의정원 의장 宋秉祚의 이야기를 적고 있고 「自引言」이 1942년 3월22일의 중국 입법원장 손과의 연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문의 탈고시점은 1942년 2월 말에서 3월 중순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白凡逸志」 下卷을 집필

「백범일지」 하권은 金九가 1919년 4월에 상해에 도착하여 경무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광복군을 창설할 때까지의 사실을 기술했다. 따라서 서술내용도 상권의 그것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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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主義者들과의 대결로 일관해

이처럼 「백범일지」 하권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金九 자신의 활동과 함께 주변 인물들의 행적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독립운동사의 성격이 짙은 회고록이다. 金九는 평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로 일관했다.

따라서 「백범일지」 하권에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金九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초창기부터 격심하게 대립해 왔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경무국장 시절에 국무총리 李東輝가 같이 공산주의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는 것을 크게 나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인 일들도 상권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20여 년이 지나서 쓰는 하권에서 자세히 적었다. 그 뒤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해 독립운동자들의 좌우합작운동이었던 1923년의 國民代表大會나 뒤이은 한국유일당운동, 1930년대의 좌우익진영의 협동전선운동과 朝鮮民族革命黨 결성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고, 1940년대에 들어서도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합종용에도 불구하고 金元鳳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한 일 등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金九의 이러한 인식과 대응은 李承晩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분열하게 된 근본 원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산당들은 상해의 민족운동자들이 자기의 수단에 농락되지 않음을 깨닫고 남북 만주로 진출해서, 상해에서보다 십백 배 더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李相龍의 자손은 殺父會까지 조직하고 있었다. 살부회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회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아비를 죽이고 나는 네 아비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라 하였다.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正義府, 新民府, 參議府 외에 南軍政署, 北軍政署 등 각 기관에 공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하였다. 白狂雲, 鄭一雨, 金佐鎭, 金奎植 등 우리 운동계에 다시없는 건강한 장군들을 다 잃어버렸고, 그로 인하여 내외지 동포의 독립사상이 날로 미약해져 갔다.〉31)

여기서 언급한 金奎植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으로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던 만주 무장단체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金九가 말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인 살부회의 존재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金九는 만주지역의 무장단체들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동북 3성[만주]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과 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종전의 정의, 참의, 신민 3부 중 참의부는 임시정부를 시종일관 옹호 추대하였다. 그런데 3부가 통일하여 정의부로 되자 서로 짓밟아 종막을 고하게 된 데에는 공산당과 민족당의 충돌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진영이나 민족진영의 말로는 같은 운명으로 귀결되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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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64. 『나는 李承晩입니다!』― 短波방송으로 破壞공작 선동

1939

[ …… 20년래의 한인분쟁은 모두 다 공산당의 장난에서 비롯 ………

…… 가지가지 명의를 빌려 전후방으로 스며들어 술책을 …….

…… 우리의 운동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양대 주의의 분기점에 …….

…… 三韓半島가 장차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 ]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59. 韓國光復軍 창설하고 重慶임시정부 主席이 되다

金九와 金元鳳의 「公開信」을 실현하기 위한 「韓國革命運動統一七團體會議」가 1939년 8월27일에 江에서 열렸다. 그러나 두 共産主義者團體가 곧 탈퇴하고, 계속된 5黨會議도 土地國有化정책과 臨時政府문제로 의견이 대립되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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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자신은 정당통합운동이 실패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하여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은 광복진선 소속의 원동지역 3당이며,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단체는 민족전선연맹 소속이다. 개회 후 대다수 쟁점이 단일화되는 것을 간파한 해방, 전위 양 동맹은 자기 단체가 해소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해 버렸다. 양 동맹은 공산주의 단체이므로 민족운동을 위하여 자기 단체를 희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전부터 주장하던 터이니, 크게 놀라거나 괴이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이에 곧장 5당 통일의 순서를 밟아 순전한 민족주의적 신당을 조직하여 각 당 수석 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친필 서명하고 며칠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민족혁명당 대표 金若山[김원봉] 등이 갑자기 『통일문제 제창 이래로 순전히 민족운동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간부는 물론이고 의용대원들까지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터에 지금 8개조를 고치지 않고 단일조직을 결성하면 청년들이 전부 도주케 되니 탈퇴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통일회의는 파열되었다.〉10)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金九의 배신감은 통합회의가 결렬된 뒤에 국민당 중앙당부의 서은증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편지에서 金九는 노골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金九는 먼저 중국국민당 관계자들이 한인독립운동의 분열이 내부 갈등 때문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하고, 20년 동안 지속되어 온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분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공산당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三韓半島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20년래의 한인분쟁은 모두 다 공산당의 장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연합으로 온갖 방법을 다하여 민족운동의 역량을 삭감하였습니다.

중국이 당의 숙청을 개시한 이래로 그들은 관내 각지에서 감히 공공연하게 비법적이고 무리한 방법으로 질서를 교란하지는 못하였으나, 동북방면에서 독염을 토하여 살인 방화하며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중국이 7·7사변[노구교사건]으로 항전을 개시하고 국공합작을 한 이래로 그들은 편승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지가지 명의를 빌려 전후방으로 스며들어 술책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이 민족운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자 그들은 모든 것을 독단하여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민족운동자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극히 꺼리어 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민족운동의 대두를 파괴하려고 동분서주하면서, 마치 광복운동에 성의가 있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기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언제 조국이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7당과 5당의 통일을 파괴시킨 것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운동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양대 주의의 분기점에 서 있어서 바둑 한 알을 잘못 놓으면 대국을 잃고 말 것입니다. (국민당)중앙에서 확실하게 민족운동자를 도와주시면 일체 공작은 모두 주동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그러면 그들은 속임수를 부릴 수 없게 되며, 항일공작도 저절로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대등한 방법으로 통일을 조성하려 하거나 또는 그밖의 원조를 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고, 통일운운 하는 것은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金九는 한국독립운동이 분열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고 설명하고, 만약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치면 장차 한반도가 붉은색으로 물들게 될지 모른다면서 국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한인의 분규는 완전히 주의의 대립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어떤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중국이 항일전을 한 지가 이미 2년 반이 지났으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전혀 공헌한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만일 또다시 시일을 천연하고 앉아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는다면, 그것은 비단 역대 조상과 후세 자손에게 빚지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三韓半島가 장차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전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간곡히 기원하건대 양찰하시고 먼저 드린 말씀을 통촉하시어 조속히 구제해 주심으로써 민족운동이 중도에서 정지되어 또다시 좌절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11)

이처럼 金九는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통일만 요구하는 국민정부의 정책이 크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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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1.

[ …..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

…..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

…..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 ]

[ …..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 …. 임시정부에서 탈퇴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孫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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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13일에 각료들과 임시정부 직원들을 인견한 李承晩은 12월24일에 육군무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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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臨時政府 制度改革을 둘러싼 論爭

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32)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國務會議에서 李承晩과 李東輝가 격론 벌여

1월1일 오전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李承晩은 참석자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때의 기념사진에는 李承晩, 安昌浩, 李東輝의 세 거두와 金九를 포함하여 모두 59명의 얼굴이 보이는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통틀어 그 정도의 인원이 직접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李承晩은 1월 초부터 본격적인 집무를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재무부가 쓰던 건물에 그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먼저 국무위원을 비롯하여 내무부·외무부·재무부·군무부의 업무보고가 있었고,33) 5일부터 국무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기로 방침을 정해놓고 있던 이동휘 등 한인공산당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들고 나왔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34) 대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때의 국무회의와 관련하여 좀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李총리가 내부결속을 唱하는 동시에 反省悔悟(반성회오)를 표명하며 앞으로는 協同一致하겠다는 주지로 각료들을 면려하였고, 기왕에 퇴거를 선언한 安총판도 출석 시무하매, 國事의 원만히 商議決行됨을 切望하고 豫喜(예희: 미리 기뻐함)하였노라.

불의에 李총리가 현 정부 제도를 폐지하고 委員制로 개정하자는 안을 돌연히 제의한 바 연석회의에서 여차한 대변경은 이해관계가 어떻든지 의정할 權利와 실행할 道理가 없으므로 의안이 성립치 못한지라.…〉35)

이동휘가 「반성회오」를 어떻게 표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 문제는 이 무렵 상해인사들 사이에서 가장 열띤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한형권으로부터 모스크바 자금을 건네 받아 가지고 온 金立이었다. 그는 날마다 큰 음식점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여론을 유도했다. 이동녕, 이시형, 신익희 등 기호파인사들은 이러한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안창호는 참석했다고 한다.36) 이동휘가 제의한 위원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민위원회 제도와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37)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委員會制와 臨政幹部들의 分散活動 주장도

또한 이동휘 그룹은 임시정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주요 간부들이 각기 적당한 지역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활동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스크바에서, 이동휘는 시베리아에서, 이동녕과 이시영은 만주에서, 안창호는 미주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신규식은 광동에서, 신채호와 남형우는 북경에서 활동하고 노백린은 사관 양성에 주력하며, 상해에는 김립을 총책으로 한 연락부만 두고, 각처에 있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38) 이와 비슷한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 방안은 안창호도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39)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이동휘는 이때의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제의했으나, 이 역시 李承晩 등의 반대에 부닥쳤다고 기술하고 있다.40)

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1)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42)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43)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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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

……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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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輝의 委員制는 러시아制度라서 反對

이날의 李承晩의 연설 내용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의 하나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퇴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에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우리의 좋을 대로 위원제를 쓰자 하였으나, 필경 결론은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밖으로 나아갔소이다』

이동휘의 위원제 주장을 국무회의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제도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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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承晩,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장으로 가다

* 김구

[ …..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 ……

…..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 ]

[ ….. 이동휘가 …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 “안 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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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 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 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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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민테른 = 제3 인터내셔날(1919∼1943)

[ ……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 ]

[ ……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 ]

[ …… 제2차 총회 ….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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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인터내셔날(1919∼1943). 1차대전이 발발하여 제2 인터내셔날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 인터내셔날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날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날-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또는 코민테른[Commintern]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앞의 책, 28권 p. 477)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날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Degras, 1권 pp. 166∼172)

코민테른은 그의 법령에 ‘백색인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 인터내셔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Degras, 1권 pp. 138∼4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날,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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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01

[인터내셔날 ] (International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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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대회는 1919년 3월에 열렸는데 21개국 35조직 5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밑에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명분이 내세워졌다.

그런데 다음해인 1920년 7, 8월의 제2차 대회에서 정체를 드러낸 레닌의 각국 공산당에 대한 ‘21개조’ 요구에 의해 러시아 공산당에 의한 지도, ‘민주집중제’라고 칭하는 공산당독재나 공산당 내의 상의하달제도, 비합법수단도 포함한 계급투쟁의 의무화 등이 강요됐다. 온건 좌파도 과격파로 변신당한 것이다.

각국 공산당은 명목상 코민테른의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공산당의 각국 지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야 했고, 중국공산당(1921년)이나 일본공산당(1921년 또는 1922년)처럼 신설되게 됐던 것이다.

1923년 정월 초하루 공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합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을 발족시켰는데 실권은 이미 병든 레닌(1924년 1월 사망)으로부터 스탈린에게 옮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얼마 동안 코민테른은 소련의 다른 관료조직과는 일단 별개 조직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첩보부문은 1934년 11월 5일의 특무기관 대개조 때 내무인민위원부(NKVD) 내에 설립된 국가보안국(GBGU)에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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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6.27.

자유시 참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레닌의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조선 독립군들을 포위, 대부분이 사상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집결하였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된 사건이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1]

[편집] 배경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이동 중에 미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으며, 독립군은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편집] 자유시의 독립군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대립했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편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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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 …… 極東人民代表大會 ….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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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쏘外交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1922年1月21日부터 2月2日까지 「모스코바」와 「레닌그라드」(당시의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極東人民代表大會의 參加였다. 同大會는 極東아시아에서의 共產主義革命을 遂行하기 위한 課題를 토의하는 大會였는데 韓國中國日本蒙古쟈바 러시아 등의 지역에서 144名의 代表가 參加하였다.

韓國은 23個團體에서 선발된 52名이 參加하였는데 이중 重要人物은 李東輝·朴鎭淳·呂運亨·金奎植·羅容均·金始顯·張建相·朴憲永·林元根·金奉淵·金元慶·權愛羅등이었다. 144名의 參加者중 52名이 韓國代表였다는 것은 이 大會가 얼마만큼 韓國問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大會에서 채택된 韓國問題의 결의안은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하고 있다.

一. 韓國에는 工業發展이 미약하여 階級意識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階級運動은 시기가 빠르다.

二. 韓國의 대다수 住民이 低水準의 農民이니 이들이 공명하는 民族獨立運動을 전개하고 階級運動者(共產主義者)는 이 운동을 지도하여야 한다.

三. 上海臨時政府는 名稱만 과대하고 實力이 이에 동반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유감이 허다함으로 改革할 필요가 있다.

以上의 對쏘外交活動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韓·쏘關係는 共產革命을 전제로 한 특수한 접촉이었으며 그 중간에 共產主義者들이 개재되어 많은 물의를 자아냈다. 따라서 共產主義團體의 분열 뿐만 아니라 臨時政府의 운영도 크게 위태롭게 하였다. 쏘련은 1922年共產黨의 再建과 1924年國民代表大會를 통한 共產勢力挽回에 어느 정도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따라서 以後의 對쏘外交關係는 거의 단절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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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臨時政府와 歐美와의 關係

申載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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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민족대회의 소집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해 한인사회에서 3·1 운동 이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온 新韓靑年黨의 분열과 해체였다. 신한청년당에는 경무국장 金九를 포함하여 교통총장 孫貞道, 학무총장 대리 金仁全, 재무차장 李裕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趙尙燮, 상해민단장을 지냈고 李承晩의 상해 통신원인 임시의정원 의원 張鵬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태평양회의 후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워싱턴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21년 11월7일에는 美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의 참가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5월호, 「李承晩,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대표단장으로 가다」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핵심인물인 김규식과 여운형이 신한청년당과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규식이 코민테른이 소집한 공산주의자들의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해 정국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활동에서 느낀 실망이 그로 하여금 러시아행을 결심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13) 그의 이러한 결심은 미국과 서유럽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독립론에 실망한 독립운동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모스크바행에 반대하여 이유필·조상섭·김병조·손정도는 신한청년당을 탈당했다.14) 金九도 극동민족대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이었다. 일찍이 李東輝의 공산당 입당 권유를 거부하며 그를 질책했던 金九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자 金仁全·張鵬·都寅權·安定根·崔明植 등과 함께 탈당했고, 뒤이어 李奎瑞·金偉宅·申昌熙 등도 탈당했다.15)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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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와 임시정부의 衰退

1922.2.13.

[ …. 공산당의 세력과 재력을 빌어서 정부제도를 변경하려는 운동이 …….

…. 우리 국민이 이것을 옳다고 따라 갈 것인가. …….

….. 열국이 우리 독립을 더 속히 승인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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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은 민국 원년에 본 통령이 미주에 있을 때에 상해에서 당국한 이들의 주동으로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입법기관으로 인정하여 오던 바라. 어찌하여 자기들이 정부에 있을 때에는 남들이 그 의정원을 복종치 않는다고 시비하더니 자기들이 나가서는 그 기관을 무시하고 국민대표회를 소집한다 하느뇨. 이는 계통을 문란케 하며 전후를 모순케 함이니, 자기들이 만든 헌법을 이처럼 멸시하고 어찌 공화사회의 질서가 서기를 바라리오.

만일 그 의정원의 대표자 수효가 부족하든지 혹 대표원의 자격이 불안정하면 헌법을 의지하여 대표를 뽑아 그 의정원을 상당히 만들어서 이를 원만히 조처할 수 있겠거늘, 될 수 없는 딴 단체를 만들어 전체를 문란케 하느뇨.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자기들의 마음대로 일이 잘 된다 하기로 다른 분자도 일어나서 따로 국민대표회라든지 혹 다른 단체를 모아서 이것을 번복하려 하면 무엇으로 방비하겠느뇨. 이는 난국의 길만 열어 놓아 정돈할 도리가 없게 함이니, 조그마한 민회나 민단의 인도자들도 이렇듯 아니하는 바이어늘 어찌 민국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이와같이 하느뇨.〉

이러한 공박은 안창호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이어 공산당의 세력과 자금력을 빌어 국민대표회에서 정부제도를 바꾸려하는 기도가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한편에서는 공산당의 세력과 재력을 빌어서 정부제도를 변경하려는 운동이 기왕에도 심하였거니와 지금에 더욱 창궐하니, 이는 대세를 헤아리지 못함이 심하도다. 오늘 우리 정부가 어떠한 처지에 있으며 세계 형편이 어떠하건데 이러한 운동으로 현국을 유지할 수 있으리오.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세력을 빌어 정부제도를 변경하자 하면 우리 국민이 이것을 옳다고 따라 갈 것인가.

이와 같이 정부를 변경하면 열국이 우리 독립을 더 속히 승인하겠는가.

이런 위태한 것을 다 알지 못하고 대사를 방해하려 하니 우리 국민은 더욱 주의할 바로다.〉69)

이러한 주장은 국민대표회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그룹의 내심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동휘의 사위 吳永善이 4월10일의 의정원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의정원이 있는데 또 다른 대표회를 모임은 불가하다 하나, 양원제의 예에 의하여서라도 다시 대표회를 모이지 못할 리가 없고, 또 다른 나라의 예로 보더라도 프랑스는 기성한 국가로 의회가 있는데도 1789년에 다시 국민대표회가 모였었고, 러시아도 케렌스키 내각시대에 모스크바에 국민대표회가 모였으니, 설혹 다른 나라에 이런 예가 없더라도 우리가 독창적으로 새로운 예를 못 낼 것이 없으며…』70)

오영선은 국민대표회의가 프랑스혁명 때의 헌법제정 국민의회나 볼셰비키 혁명 때의 모스크바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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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와 임시정부의 衰退

[ …… 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추진 ……..

…… 金九는, 탄핵정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 장악 공작으로 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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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에 대한 金九의 비판적 인식은 자신이 내무총장직에서 물러난 데 따른 반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 쟁탈전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양파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혹은 창조, 혹은 개조를 주장하여 전체가 요란하게 되었다〉3)고 했던 金九는, 탄핵정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 장악 공작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의 상해 정국에 대하여 〈통일이란 미명하에 공산당운동이 끊이지 않고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4)라고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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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4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1923

[ ….. 새 국호와 연호와 헌법 등을 작정하고 새 기관을 조직하야 …….

….. 두 개의 국가를 형성하야 영구히 피흘려 싸울 단서를 열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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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 동안이나 논란을 거듭하면서 상해 동포사회를 들썽거리게 했던 국민대표회의가 끝내 결렬되자 독립운동자들은 격분했다. 「獨立新聞」의 「일대 화근」이라는 논설이 그러한 분위기를 말해 준다.

國民代表會議의 決裂에 격분

〈 우리는 통일을 위하야 대표를 환영하고 축복하였으며, 일반은 대표 그들이 통일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고, 대표 그들도 통일을 이룩한다고 揚言(양언)하였도다. 대개 오늘 우리에게 통일이 있으면 삶이 있고 통일이 없으면 죽음이 있음이라. 통일을 이루기 위하야 모였던 국민대표회의는 열린 지 다섯 달이 넘도록 통일을 흑암 중에 매장하고 우리 민족 장래에 한 가지 가공할 큰 화근을 심었도다.

그것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를 부르짖던 대표들이 … 새 국호와 연호와 헌법 등을 작정하고 새 기관을 조직하야 한 민족 ―― 더구나 국토를 못 찾고 표류하는 민족으로서 두 개의 국가를 형성하야 영구히 피흘려 싸울 단서를 열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이를 감행한 자의 죄인가, 이를 좌시한 자의 죄인가 ..… 〉1)

그러면서 이 논설은 북경정부와 광동정부가 내전을 벌이는 중국의 상황을 보기로 들면서 민족분열의 위험을 경고했다.

또 같은 날짜 「獨立新聞」에는 국민대표회의의 의장과 부의장을 맡았다가 창조파들의 일방적인 회의진행에 반대하고 사퇴한 金東三과 安昌浩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모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마침내 파열된 데 대하야는 痛哀(통애)함이 어떻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회가 파열된 이후에 일부의 집회로 결의한 모든 일에 대하야 일절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따라서 그 집회에서 산출된 소위 국민위원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모임이 실패됨에 대하야 우리 자신의 不善無能(불선무능)함을 책하고,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오. 다른 쪽에 대하야는 시비를 말하고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또 尹海와 申肅 등 창조파들을 격렬하게 매도한 6월3일자 성명서에 자신들의 이름이 있는 것도 본의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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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과 하와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기사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태평양잡지」는 먼저 「獨立新聞」의 논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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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를 신랄하게 비꼬아

그러나 「태평양잡지」의 공격의 표적은 「獨立新聞」이나 창조파들이 아니었다. 표적은 안창호였다. 「태평양잡지」는 안창호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獨立新聞」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를 통석하다고 말한 것은 진정이겠으나, 회의가 결렬된 뒤에 일부의 집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일절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은 오늘날의 공화주의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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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잡지」는 또 안창호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한 말을 들어 그의 「실수」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에 복종하라고 권고했다.

〈안창호씨는 지금에 와서 국민대표회의 실패를 인연하야 국민에게 사과한다 한지라. 세상에 실수 없는 사람이 없나니, 안씨를 용서하기는 심히 용이하거니와 국사에 모든 손해 끼친 것은 일반국민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는 모든 인도자들이 국사에 대하야 모든 농락권변(籠絡權變)의 수단을 버리고 현 정부 명의하에서 진심으로 광복대업에 종사할진대, 이번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이익이 되리라 하노라.〉5)

이러한 「태평양잡지」의 주장은 창조파들과는 말할 것도 없고, 안창호 그룹과의 타협이나 협력도 단념한 李承晩의 단호한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 이후에 재외동포들 사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분열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태평양잡지」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강조하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 모든 파괴자들은 정부가 없는 줄로 인증하거나 둘 셋이나 혹 열 스물로 인증하고 싶거던 다 원대로 해도 말릴 사람이 없을지며, 다만 나라를 사랑하는 일반국민은 저 야심자들의 선전으로 인연하야 조금도 흔들릴 이치가 없으며, 대한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나밖에 다른 것은 없나니, 이 문제에 대하야 저 파괴자들과 어디까지든지 다투어 가면서라도 그 결국을 보고 말기를 작정이로다.〉6)

그것은 안창호 그룹과 그들에 동조하여 하와이에서 李承晩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朴容萬 추종자들에 대한 반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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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4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1923.8

[ …… 8월 한정부는 노령으로 옮겨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 ]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지만 이 회의는 예비회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월 3일까지도 각지의 대표가 모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2월 2일에 이르러 본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장인 김동삼이 개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의 주장과,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와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어려움을 거듭하였다. 3월 13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정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결국 3월 20일부터 휴회로 들어가 정식회의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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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중도파계 사람들이 창조파로 넘어갔고, 5월 15일 ‘불통일’의 이유로 서로군정서와 한족회가 대표소환을 명함으로써, 만주대표로서 많은 활동을 한 김동삼·김형식·배천택·이진산 등은 국민대표회에서 탈퇴했다. 그후 윤해가 의장, 신숙이 부의장, 오창환이 비서장에 각각 보선되었으나, 5월 16일 개조파의 조상섭(趙尙燮)·조상벽(趙尙壁) 등 42명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의는 창조파만의 대회가 되었다.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국호를 ‘한'(韓)으로 결정하고 6월 7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임정은 6월 6일 국무령 포고 제3호로 이에 반대했다. 특히 임정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해 8월 한정부는 노령으로 옮겨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결과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했다.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역사적 의의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 나아가서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심도있게 토의를 가졌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파벌과 이념 간의 대립으로 폐회되고 말았다. 그후 임정은 임정대로 다시 재건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계도 일정 기간 진통을 겪다가 1920년대 중반에 3부(三府:신민부, 정의부, 참의부)로 정리, 재통일되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3부통합운동

1923.8.

[ …..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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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70여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모여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존속했던 임시정부를 완전 부정하고 노령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안창호 등 초기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과 상해교민회의 인사들,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일부(김동삼 등)가 개조파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 창조파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부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채호 박용만 등 북경 군사통일회와 김규식 등 상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한 창조파는 이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파의 임시정부는 활동이 중지될 수 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신채호 노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21년에 대한독립군단이 겪은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을 알고 있는 신채호는 이때 창조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더욱 실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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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

[….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 …….

…. 조국 조선을 버리고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 ]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 聲明이 論難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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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이 결렬된 데에는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발표한 이른바 「12월테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의 영향도 컸다.

「12월테제」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결정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면서,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대중적 기반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지시한 것인데,23) 이 「12월테제」에 입각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원칙이 민족주의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1928년 7월에 이르러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을 결렬시키는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中東鐵道사건이 그것이었다.

중동철도란 만주지역의 옛 東淸鐵道 가운데에서 일본에 양여한 남만주철도를 제외한 부분을 말하는데, 이 철도노선은 1924년의 중·소협정에 따라서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가 1929년 7월10일에 일방적으로 그 회수를 선언하고 만주의 張學良으로 하여금 이를 강제로 집행하게 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중국대표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8월에는 극동군을 편성하여 중·소국경에 집결시키고, 11월 들어서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24)

재중한청 제1지구 상해지부에서는 7월23일에 「檄함. 전조선 피압박대중 제군에게」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소련을 지원할 것을 촉구했는데,25) 성명서 가운데 있는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이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장 「청년동맹원 賣母換祖[어미를 팔고 조상을 바꿈]사건비판회」를 열고 이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赤鬼忠奴 청년동맹원의 매모환조사건 公布狀」을 발표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의 조국 조선을 버리고 그들이 귀화한 赤露를 그들의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있다.

당신들과 같이 살려고만 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餓鬼國(아귀국)에라도 가서 공산주의를 실행하라.

며칠 전 동지 여운형이 검거된 밤에 이른바 공산동지들이 위문한다는 구실로 呂의 집에 들어가서 집기를 절도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공산운동이냐?

또는 하숙비를 잘라 먹고서 그 주인 여자를 구타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계급투쟁의 하나이냐?〉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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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 …….

…..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 ….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 ]

[ …..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

….. 백광운·김좌진·김규식 등 ….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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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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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여름 젊은 엠엘파 ‘몽치단’이라는 테러조직을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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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선생의 사상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몽치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29년 여름 중국 길림성 반석현에서 젊은 엠엘파 공산주의자들이 ‘몽치단’이라는 테러조직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들은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서 중국 현지 경찰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허위 신고를 하여 정의부 및 국민부 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이 큰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를 목도한 선생은 점차 사회주의 사상과 그 운동계열의 폐해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확고한 민족주의 사상과 이론을 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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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상파는 을, 화요파는 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 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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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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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 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을, 화요파는 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 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금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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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 [ …..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 ]

[…..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뀐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縣立) 학교로 강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북만주 산지(山之) 역전에서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었다. 암살자는 공산당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문익환도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그때의 분위기를 한준명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점점 살벌해져갔습니다.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그 애들이 헌 찝차 같은 걸 타고-그때 벌써 그런 게 있었어요-지나간 뒤엔 일껏 추수해 서 쌓아놓은 곡식 낟가리에서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는 거예요. 지 나가면서 낟가리에다 불씨를 던져놓은 거지요. 경찰력이 그걸 막지 못했어요. 그걸 잡으려고 중국수비대가 뒤늦게 쫓아가며 또 한바탕 북새를 쳤지요.

나는 결국 1930년 12월 30일에 명동 마을을 아주 떴습니다. 이미 공산당 사형선고 명단에 올라 있었고, 더 이상 있다가는 정말 일을 당하겠다고 부모님이 성화를 하셨지요.(…)그 후 다신 간도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치안이 유지되는 곳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임시로 거처들을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집을 팔고 나중에는 송두리째 마을을 떴다. 문익환네는 1931년 초에 용정 으로 이사했고, 윤동주네는 같은 해 늦가을에 용정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교회도 주인을 잃었다. 돈도 명망도 없는, 아무것도 갖지 못해서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만이 예배당을 지켰다.

“명동은 그때 혼 빠진 시체와 같았어.”(문동환)

낙원을 잃은 명동의 어린 지사들은 허탈했다. 송몽규는 자신의 연설 이 결과적으로 명동학교를 세운 분들의 입지에 누를 입히고 한준명 선생을 축출하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했다 (그 후 송몽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사회주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 았다).

아이들끼리 모이면 떠들곤 하던 독립운동 이야기도 절반의 영 역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등에도 붙고 배에도 붙는다는 김일성 장군 이야기도 시들해졌다. 문익환은 그에 대해 어떤 추억담도 남기지 않다가 훗날 방북 재판 ‘상고이유서’에서 털어 놓는다. ……… ]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 12
[문익환 평전] 원산에서 객사한 삼촌 문병린

1928년부터

[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 ]

[ …. 피살자가 없는 밤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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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념, 모든 믿음은 자신을 위해 쓰이는 폭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신성시한다. 양극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경향들이 맞부딪치자 명동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분쟁은 특히 명동학교의 소유권을 둘러 싸고 심화되었다.

1928년부터 이듬해까지 용정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명동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인민학교’로 만들려고 공작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다가 선전선동이 통하지 않자 점점 거칠어졌다. 학예회 때 독창만 하려 해도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그들은 하는 일마다 이렇게 나왔다. 학교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고 주민들의 발밑에도 이념의 지도가 그려졌다. 학교에서 조선어와 양잠 을 가르치는 송창희 선생(송몽규 아버지)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고, 면학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준명 선생은 교회 편에 섰다. 각 가정에서도 양상은 비슷해서 윤동주의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윤동주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사상의 가열이 부른 폭력인데, 공산당이 밤마다 복면을 하고 들어와 흉기를 들고 위협을 했다. 나중에는 적색 테러 때문에 중국 관헌들이 경비를 섰지만 피살자가 없는 밤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문익환은 그러한 현실에 참담하게 좌절했다.

교회측은 갈수록 열세인데 윤동주랑 셋이서 삼총사처럼 어울리던 소꼽동무마저 사회주의의 편에 서버렸다. 겨우 12세에 소학교 5학년생인 송몽규가 서슴없이 어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한때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권위를 떨쳤던 김약연 교장도 그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떻게든 마을을 단합시키려 애썼지만 수습은커녕 세월 유수만 통렬하게 깨달았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 중국인의 땅에 와서 마을을 일궈낸 망명자들은 모두 죽거나 늙어 있었다. 그들의 뜻을 이어줄 지혜와 열정을 갖춘 젊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간절한 시기에 문재린이 하필 캐나다에 있었다. 김약연 선생은 뼈아프게 무너졌다.

“문재린만 있어도 한 번 싸워보겠는데, 이겨보았자 학교를 맡길 젊은이가 없어서….”

일제가 그토록 개명시키려 했던 이름 명동(조선을 밝힌다는 뜻)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학교 경영권을 넘겨줬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 노구의 몸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멀리 평양까지 가서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버렸다.

이윽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었다. 아침마다 예배를 보던 시간도 없어졌다. 사회주의 청년들에게 미움을 받던 한준명 선생님도 쫓겨났다. 단순한 자연부락이 아니라 하나의 ‘항일애국단체’라고 칭송되던 명동공동체도 해체의 길을 밟아갔다. 이것이 문익환이 체험한 최초의 분단이었다.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 12

[문익환 평전] 원산에서 객사한 삼촌 문병린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뀐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縣立) 학교로 강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북만주 산지(山之) 역전에서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었다. 암살자는 공산당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문익환도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그때의 분위기를 한준명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점점 살벌해져갔습니다.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그 애들이 헌 찝차 같은 걸 타고-그때 벌써 그런 게 있었어요-지나간 뒤엔 일껏 추수해 서 쌓아놓은 곡식 낟가리에서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는 거예요. 지 나가면서 낟가리에다 불씨를 던져놓은 거지요. 경찰력이 그걸 막지 못했어요. 그걸 잡으려고 중국수비대가 뒤늦게 쫓아가며 또 한바탕 북새를 쳤지요. 나는 결국 1930년 12월 30일에 명동 마을을 아주 떴습니다. 이미 공산당 사형선고 명단에 올라 있었고, 더 이상 있다가는 정말 일을 당하겠다고 부모님이 성화를 하셨지요.(…)그 후 다신 간도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치안이 유지되는 곳으로 빠져 나갔다. 처음에는 임시로 거처들을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집을 팔고 나중에는 송두리째 마을을 떴다. 문익환네는 1931년 초에 용정으로 이사했고, 윤동주네는 같은 해 늦가을에 용정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교회도 주인을 잃었다. 돈도 명망도 없는, 아무것도 갖지 못해서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만이 예배당을 지켰다.

“명동은 그때 혼 빠진 시체와 같았어.”(문동환)

낙원을 잃은 명동의 어린 지사들은 허탈했다. 송몽규는 자신의 연설이 결과적으로 명동학교를 세운 분들의 입지에 누를 입히고 한준명 선생을 축출하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했다 (그 후 송몽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사회주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모이면 떠들곤 하던 독립운동 이야기도 절반의 영역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등에도 붙고 배에도 붙는다는 김일성 장군 이야기도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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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일성 1912년 4월15일 출생. 별개 인물

1933 모스크바

[ …..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 …….

……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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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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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1931 만보산 사건 — 滿洲事變

[ ……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 …….

…..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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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條溝에서 鐵道 폭파하여 滿洲事變 일으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인 9월18일 밤에 관동군의 奉天(瀋陽)수비대는 柳條溝에서 일본의 滿鐵(남만주철도회사) 선로를 폭파했다. 유조구는 蔣介石(장개석)과 제휴하고 있던 張學良의 근거지인 北大營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관동군의 모략에 따른 것이었다. 관동군은 그 폭파가 현지 중국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전쟁을 도발했다. 이른바 滿洲事變〔9·18戰爭〕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9월21일에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고, 이튿날에는 상해에서 反日대회를 열어 抗日구국회를 결성했다. 미국 정부는 11월29일에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12월에 영국의 리튼(Victor Robert Lytton)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관동군은 이미 만주의 중앙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전쟁을 도발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서 만주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즉, 군사공작을 못 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이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萬寶山事件을 날조하여 조선과 중국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천·평양·경성·원산 등 각지에서 조선인 무뢰배들이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가지고 중국인을 닥치는 대로 타살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1931년에 9·18전쟁[만주사변]이 일어나 중국이 굴욕적으로 강화했다. 이 전쟁 중에 한인 부랑자들이 왜의 권세를 빌려 중국인에게 극단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중국인의 무식계급은 물론이고 유식계급 인사들까지도 이따금 민족감정을 말하는 자를 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니 우리 정부에서는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27)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상해 동포사회는 아연 긴장했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흥사단장 安昌浩 등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국민정부에 대해 국내 사태가 오로지 일본의 사주와 선동에 의한 것임을 이해시키고, 외무장 趙素昻(조소앙)의 이름으로 중국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7월9일자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명의로 국민정부와 중국의 중요단체 앞으로 「通電」을 발송하여 만주의 한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하여 일본인들이 농간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 것을 촉구했다.28)

國民政府와 中國 중요기관에 「通電」 보내

뒤이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9월20일에 긴급회의를 열고 우선 중국의 각 기관과 신문사에 한인단체연합회 명의로 일본을 비판하는 「통전」을 보내고 다음날 상해에 있는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열린 대표회의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僑民團, 丙寅義勇隊, 韓國勞兵會, 興士團, 愛國婦人會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金九는 교민단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교민단과 연합회의 공동명의로 上海韓僑전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또한 회의 결의에 따라 연합회는 국민정부, 국민당 중앙당부, 중국의 각 신문사에 대하여 국제연맹에 의존하지만 말고 對日전쟁을 결행할 것을 촉구하는 「통전」을 발송했다.29)

병인의용대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극비리에 대원들을 소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총영사관 등 일본 관계 중요기관을 폭파하여 中·日 간의 분규를 확대시킬 것과 각 요소에 비밀 수사반을 잠복시켜 일본탐정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30)

9월25일에 열린 상해한교전체대회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金九의 개회사에 이어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일본 만주침략의 배경에 대한 외무장 조소앙의 자세한 보고에 이어 安昌浩, 車利錫, 趙琬九 등의 비분강개한 연설이 있은 다음 6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1) 중국 동삼성을 침략하는 일본을 대항할 일, 2) 국내외 동포는 당연히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체적으로 실현케 할 일, 3) 동삼성에 있는 2백만 교포로 하여금 중국 민중과 생사영욕을 같이하여 걸음을 일치케 할 일, 4) 적의 세력하에 있어서 그 침략의 도구와 사냥개가 되는 무리를 소탕할 일, 5) 중국이 일본에 대하여 속히 무력행동을 취하는데 노력할 일, 6) 한·중 양 민족의 국토 광복과 주권 회복에 공동분투하기 위하여 급히 동맹군 조직을 도모할 일.31)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일본의 대륙침략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한인들의 척결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韓人共産主義者들의 金九 비판

임시정부도 10월1일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노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최단기에 집중하여 중원의 호걸과 세계우방의 혁명동지로 더불어 완실한 연합전선을 체결하여 적의 심장을 직도할진저〉라고 호소했다.32)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해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인공산주의운동 단체들은 별도로 행동했다. 그들은 등사한 인쇄물을 시내 각처에 살포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혁명의 총본영인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을 개시했다고 말하고,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고 주장했다.33)

金九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上海大韓僑民團稅不納同盟을 결성하고 교민단세 납부거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2월28일에는 교민단세 불납동맹 명의로 「재상해 소위 대한교민단의 민단세 강제징수에 대하여 전 상해 한인동포 제군에 檄함」이라는 성명서와 함께,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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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5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왜 日本天皇을 안 죽이오』

붉은 무리 백년반역이 우리 민족 다 죽이며 대한민국을 작살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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