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2019.02.13 15:52

멸공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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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 ]

[ …..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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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정치부기자로 일했던 원로 언론인 조용중(74)씨는 기자의 필치로, 그러나 52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두고서 ‘1952년 여름 부산’을 복원했다. 그동안 부산 정치 파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했다. 정권 연장욕에 눈먼 노독재자 이승만의 폭거와 그에 항거했으나 무력하게 당해야 했던 야당의 대립구도가 그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이분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이승만이 국민을 등에 업었다는 말은 당시 이승만의 개헌 시도는 다름아닌 직선제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만 국회에서는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무리한 개헌 시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중심축을 이승만과 야당에서 이승만과 미국으로 바꾸는 순간 핵심 쟁점도 달라진다. 정권 연장 음모보다는 휴전 여부를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이 훨씬 본질적이다. 하긴 이승만과 야당의 대립으로 당시 사건을 풀게 되면 그 시절이 전시(戰時)였다는 엄중한 사실마저 배제된다.

조씨는 이번 작업을 위해 그동안 비밀 해제된 미국과 영국측의 방대한 자료들도 함께 조사를 했다.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한 이승만의 벼랑 끝 신경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이승만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에 의지해 권력을 잡으려는 야당 지도자들의 행태도 실증적 자료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그 동안 피해자라는 이유로 가혹한 평가를 피하려 했던 학계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이승만을 눌러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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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6.9.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출전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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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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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상가점포 및 다방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한미상호방위조약 …..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 …….. ]

조갑제 날 짜 2003년 5월 25일 일요일

독후감/이승만의 벼랑끝 전술과 韓美방위조약

오늘 오전 감동적인 논문을 읽었다.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과 6.25전쟁](연세대학교 출판부)에 실린 [李承晩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읽으면서 金大中 전 대통령과 盧武鉉 현 대통령이 꼭 보아야 할 글이란 생각을 했다. 金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자신을 자책해야 할 것이고 盧 대통령은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이 그늘 덕을 본다”는 중국 속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의 著者는 충남대학교 사학과 차상철 교수이다. 그는 李承晩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서두는 미국을 북진통일과 작전지휘권 환수란 카드로 견제하면서 자신의 말이 공갈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1953년6월18일 유엔군이 관할중이던 반공포로 25000명을, 한국 헌병들을 시켜 석방했다. 휴전협정이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휴전협상이 2년간 끈 가장 큰 이유는 반공포로를 강제송환할 것인가, 그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송환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유엔군과 공산군의 이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날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

6월19일 주한 미국 대사 브릭스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후일의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저자 차상철 교수는 이런 말로 논문을 끝내고 있다.

이 논문을 읽어보면 이승만이 미국의 멱살을 잡고 벌인 벼랑끝 전술에 아이젠하워나 덜레스나 로브트슨 특사는 진저리를 쳤지만 결국 그 뒤 한미동맹이 해낸 일들을 보면 미국의 3인방은 저승에서 이승만의 억지와 위협이 한미 양국의 국익은 물론이고 자유진영,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감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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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韓美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년 6월18일 일방적으로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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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7. 반공포로석방

[ …..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 ]

[ …..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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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통일기회의 소멸로 볼 수밖에 없는 李承晩 대통령은 온 국민들의 열화같은 휴전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빼내어 비록 집단자살이 될지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에서 李대통령은 휴전회담의 포로교환 교섭이 자유·공산 兩진영의 이데올로기의 전장인 것에 눈이 가 있었다.

회담의 양측 대표가 군사분계선에 합의하여 조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던 시점인 1953년 6월 17일, 李대통령은 全세계 앞에 카드를 제꼈다. 회담 양측간에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자유라는 상징이 갖는 전략가치를 李대통령만큼 절묘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휴전을 빨리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세계의 頂上 아이젠 하워, 처칠, 毛澤東으로 하여금 李承晩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그들의 다급한 목표인 휴전을 파기할 가능성을 가졌음을 현실로서 절감케 해버렸다.

국면전환의 열쇠가 일거에 李承晩 손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순간 한국전쟁은 한번 한국化됐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한 잡지가 反語的으로 그 정도를 일러주고 있다.

당당하게 받아낸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李承晩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李承晩은 부산의 한 모퉁이 미군 병사의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李承晩은 너무도 강대·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사령관이나 美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歷史의 證言」에서 재인용)

金日成과 중공군사령관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해 왔다. 공산측까지 나서서 李承晩 대통령의 對美협상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다.

아이젠하워 美대통령이 워싱턴으로 李承晩 대통령을 초청했으나 시간이 없다고 거부했다. 미국은 대통령 특사를 서울로 보냈다. 월터 로버트슨 美대통령 특사는 6월26일부터 이후 보름 동안 매일 경무대로 출근하다시피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그동안 미국이 소극적이던 한미 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로 시작되는 전후 복구 원조개시, 20개 사단으로 한국군 증강 등의 틀을 잡게 된다. 전쟁기간중 몇 번이나 버릴 생각을 했던 한국한테, 쫓아낼 생각을 했던 李承晩한테 미국은 한국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7·27 휴전협정 조인이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델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로 와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8월8일 변영태 외무와 더불어 한미 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李대통령은 이 만족을 성명으로 표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李承晩은 휴전의 묵인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맞바꾸어 놓았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거인 李承晩은 전화에 휩쓸려 초토와 폐허만 남은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울타리를 주문해다 쌓아 올려 번영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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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과 반공포로 석방

李대통령 비밀지령 받고 철저한 보안속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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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장군은 이대통령을 적극 보좌해 국가적 난제를 해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대통령의 용단과 원장군의 적극적인 수명(受命)으로 꽃을 피운 반공포로 석방이다. 아침에 이 뉴스를 듣고 면도하던 영국 처칠 수상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었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잠자고 있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깨울 정도로 이것은 ‘빅(big) 뉴스’였다.

이는 자유우방국뿐만 아니라 적대국 공산 측에도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공들여 온 휴전이 파산될까 봐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도 대책 마련에 부심할 정도로 그 파장은 넓고 깊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 못 한 휴전협상 막바지에 몰아닥친 ‘이승만의 해일(海溢)’이었다.

이렇게 대담하고 엄청난 일을 이대통령과 원장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냈다. 이대통령은 국군지휘관에게 혹여 해가 될까 봐 백선엽 육참총장을 비롯해 군 수뇌부에게 비밀로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비밀지령을 받은 원장군이 철저한 보안속에 이 일을 처리했다.

이대통령은 이를 위해 이미 3개월 전인 53년 3월 24일 대통령령 제153호에 의거 국군헌병총사령부를 국방부 내에 설치했고, 원용덕 육군소장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헌병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휴전협상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문제가 타결되기 2일 전인 53년 6월 6일 원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포로석방 문제를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원장군은 포로문제가 타결된 6월 8일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의 명령이니 반공한인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가만(可晩)”이라는 친필명령서를 전수했다.

원장군은 대통령의 밀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이 일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에게도 비밀로 했다. 모든 일은 육군헌병사령부와 포로경비부대를 통해 진행됐다. 작전은 6월 18일 0시에 개시돼 반공포로 2만7000명이 석방됐다. 6월 19일 새벽 6시 원장군은 중앙방송국에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목숨을 건 대명(大命)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를 들은 애국학생들은 헌병총사령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원용덕 장군 만세 !”를 외쳤다. 대통령은 원장군에게 ‘의로운 용기(義勇)’라는 휘호를 하사하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그 후 그는 풀려난 반공포로들로부터 ‘포로의 아버지’ 대우를 받으며 196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기대해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2008.08.11

停戰 60주년 특집

휴전 반대한 李承晩의 목숨 건 도박, 韓美상호방위조약

安保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보다 중요하다는 신념 관철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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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 토끼’를 잡은 이승만의 승리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오른쪽)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수에 미국은 두 손을 들고 휴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이승만과 로버트슨은 1953년 7월 11일까지 모든 문제에 합의했다. 첫째, 휴전성립 후 한미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이를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상원의원들을 설득한다. 둘째, 미국은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우선 2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한다. 별도로 유엔군사령관은 95만 달러어치의 식료품을 한국민에게 공급한다. 셋째,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이에 합당한 해·공군력을 지원한다. 넷째, 정치회담에서 90일을 경과해도 구체적 성과를 얻지 못하면 한미 양국은 철수한다. 다섯째, 정치회담 이전에 공동 목표를 토의하기 위해 한미 간 고위급회담을 개최한다.

이승만의 승리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뿐만 아니라 경제원조와 한국군 증강까지 얻어냈다. 그것도 전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냈다. 대한민국의 희망이자 생존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이제 시간문제가 됐다. 2년간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국제적 외톨이를 감내하며 미국을 압박해 승리했다. 로버트슨 특사 일행은 7월 12일 한국을 떠났다. 이때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이승만-로버트슨 회담 결과를 발표했다. 이승만이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과의 ‘동맹’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4일, 조약체결을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8명의 고위사절들을 대동하고 방한해 한국 대표와 방위조약에 대한 내용을 검토했다. 그때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한국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한 진정한 휴전이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이 도움을 요청할 유일한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또 “한국의 운명은 세계적 문제이며, 한국이 공산화되면 다른 나라들도 곧 공산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약내용에 대한 검토가 끝나자,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중앙청에서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고, 그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정식으로 서명했다.

10개 사단 추가신설 등 한국군 증강도 얻어내

한미동맹이 시작됐으나 발효까지에는 아직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양국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먼저 한국 국회가 1954년 1월 15일에, 그리고 미 상원외교위원회가 1954년 1월 19일에 “대외적인 무력공격이 있을 때에만 상호 원조할 책무를 갖는다는 조항을 첨가한다”는 조건부로 가결했다. 이로부터 1주일 뒤인 1월 26일, 미 상원이 비준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인 비준서 교환이 양국의 입장차이로 연기됐다. 원래 비준서 교환은 1954년 3월 28일 하려 했으나, 이승만이 즉각적인 군사력 증강을 요구함에 따라 미국이 연기했다. 비준서 교환은 그해 11월 17일 이뤄졌다. 이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됐다.

이날 양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도 조인했다. 합의의사록에는 미국이 한국에 1955 회계연도에 4억2000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800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10개 예비사단의 추가 신설과 79척의 군함, 그리고 약 100대의 제트 전투기를 제공한다고 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원조건에 “유엔군사령부가 한국 방위에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고 합의했다.

합의의사록의 조인으로 한국은 육군 66만1000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하게 됐다. 이로써 이승만은 1949년 주한미군 철수를 전후해 미국에 끈질기게 요구했던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의 실현을 보게 됐다. 이승만의 오랜 꿈이 실현됐다.

이로써 한미동맹이 그 ‘거보(巨步)’를 내딛게 됐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한국은 놀랄 만큼 발전했고, 미국은 그런 한국을 “안보적·경제적 우등생”이라며 치켜세웠다. 한미동맹을 있게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한미 양국 모두의 승리였다. 한미동맹 60년의 쾌거였다.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안보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발전보다도 우선돼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대한 지도자’의 ‘위대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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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때는 족청계도 완전히 거세된 시점인데, 그러면서 수십년 동안 대부분 거수기 역할을 하는 국회가 출현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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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감금된 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총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조봉암과 진보당,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201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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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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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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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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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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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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