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2018.12.23 09:42

남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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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중앙일보] 1975.03.31

월남 제2의 대도시며 북부 지역 최대의 군사 기지인 「다낭」이 공산군에 함락된 최후의 날인 29일 「다낭」 시내는 약탈과 동족 살륙의 생지옥을 연출했으며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수송기 타려다 밟혀 죽고…| 바퀴 상자 속에 7명 탑승…기체에 매달려가다 추락도 | 약탈 성행…군단사령관·공군사단장 실종

28일 밤부터 29일 새벽에 걸쳐 공산군의 총 공격 전주곡으로 일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날이 새고 시 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공항에는 수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다낭」의 공항으로 밀어닥친 필사적인 난민 군중 속에선 오직 재빠르고 힘세고 가장 비겁한 수단을 지닌 자만이 최후의 난민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기상에 오르려고 아귀다툼하다가 밟혀 죽었고 7명은 바퀴 상자 속에 들어갔으며 간신히 기체에 매달렸던 사람들도 수백m의 고공에서 비행기의 기대를 움켜쥐었던 손의 힘이 빠지자 해상으로 떨어져 낙엽처럼 사라졌다.

「다낭」시 함락 최후의 날인 29일 피난민 공수 작전은 비행기의 부족과 피난민의 폭동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해상 수송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국제 개발처 (AID)는 한번에 1천7백명을 철수시킬 수 있는 「점보·제트」 수송기들을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월드·에어웨이즈」 항공 사장 전용기「보잉」 727 항공기 1대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이 항공기가 착륙하자마자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으며 일부만을 태우고 수많은 난민들을 남겨놓은 채 떠나고 말았다.

「사이공」으로 피난 온 익명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인은 피난 비행기에 몰려든 인파 속에 항공기계단위에서 밟혀 죽은 사람은 약 50명이나 되며 그 중에는 손에 어린이를 안고 임신까지 한 부인도 끼여있었다고 말했다.

피난 비행기에 채 타지 못한 군복 차림의 한 월남군 대위는 군복을 갈기갈기 찢고 적에 가담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피난민 후송 작전을 담당했던 한 미국 수송기 조종사는 월남군 병사까지 서로 비행기를 타려고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고 전했다.
또 4백명의 정부군이 민간인들을 제쳐놓고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했다.

이 수송기에 타지 못한 정부군 낙오병들은 비행기를 향해 발포했으며 수류탄 1발이 주익 밑에서 폭발했다. 조종사는 멀리서 「로키트」 포성이 다가오는 가운데 수송기를 급히 이륙시켰는데 「리엔·후옹」 UPI 사진 기자는 기체에 매달렸던 난민이 고공에서 남지나 해상으로 추락하는 참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다낭」 공항에서 한 정부군 병사가 던진 수류탄으로 한쪽 날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바퀴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조종사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우려고 민간인들이 몰린 곳으로 비행기를 끌고 가려했으나 어느 곳에나 군인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몇몇 군인들은 기관총과 권총을 쏘아댔으나 비행기에는 총알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며 일부는 무기를 내던진 채, 그리고 일부는 수류탄과 기타 무기를 가진 채 비행기로 뛰어들어 왔다.

월남 정부는 29일 「다낭」시에서 8명의 범법자를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정부의 이 같은 강경책도 무법천지화한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베트콩」 성명은 「다낭」 시내에 갇혔던 수만명의 월남 정부군은 무기를 버리고 「베트콩」에 투항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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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함락이란 비보가 전해진 30일의 「사이공」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했다.
이날이 부활절이라는 사실 외에 「사이공」 시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공포나 불안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군의 남하가 계속되는 한 이곳에도 미구에 전쟁의 공포가 밀어닥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시민들의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국민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한 약 5천명의 「사이공」시민들은 29일 「사이공」시내에서 월맹과 「베트콩」의 무력 공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월남 국기를 흔들며 월맹과 「베트콩」의 「파리」 협정 위반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이 월남에 적절한 전투수단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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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2742

난민에 무차별사격

[중앙일보] 1975.04.01

한편 월남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구 왕도 「우에」시로부터 탈주해온 한 경찰관은 31일 5명의 고위경찰관과 아직도 피 교육중인 1명의 경찰간부 후보생이 경찰서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다낭」시로 가는 어선을 타려고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해안선을 따라 수천 구의 군인 및 민간인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경찰간부 공개처형 | 「후에」시 점령한 공산군

「다낭」시에 입성한 공산군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으며 그가 탄 연락선은 「모터」가 불붙은 속에서도 무사히 소개선에 도착. 소개선 편으로 지난달 30일 「사이공」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했다. .

「사이공」의 명운

[중앙일보] 1975.04.02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바로 같은 날 「사이공」의 주 방어선인 「나트랑」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2일 전에는 「다낭」이 함락되었다. 「사이공」은 완전히 풍전의 등화처럼 시각을 다툴 만큼 명운이 급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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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티우」대통령에게는 꿈결같기만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된 것은 73년 1월 27일.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월남군의 전력이 그토록이나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가 완전히 「스탬피드」현상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월남의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 난중으로 변했고, 지휘관들은 탈출에만 능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군중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나보다.

이를 또 공산 측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도 같다. 공산 측에서는 점령지구 주민들을 자기네 편에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부측에 피난시켰다.

이리하여 생긴 1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은 정부의 행정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산 측은 「크메르」에서도 이런 전술을 썼다. 그리고 일견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도인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은 2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식량보급에 실패한 것이 「론·놀」정부를 자멸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월남 수도는 미군의 출동만이 유일한 구제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대 출동권을 크게 제한 받고 있는 「포드」 대통령으로서는 월남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협상의 마지막 기회도 이제는 잃은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 「사이공」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공산 측은 「티우」정권의 내부 붕괴를 기다리는 재미(?)만이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https://news.joins.com/article/1402895

1975.4.30. 사이공 함락, 베트남 공산화

사이공 최후의 목격자 | 한국인 74명 「괌」 도착

[중앙일보] 1975.05.06

월남 최후의 날 「사이공」을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74명(확인된 사람) 은 기아와 폭서 속에서 남지나해의 거센 풍랑을 뚫고 6일만의 긴 항해 끝에 「필리핀」의 「수빅」만에 도착했다가 비행기편으로 5일 「괌」도에 도착, 급조된 수용소에 입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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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주월 대사 등 공관 직원들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날인 29일 상오 10시 미 대사관으로부터 즉시 철수할 것을 연락 받고 집결지 미군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아파트」 경비병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김 대사를 비롯한 이들은 할 수 없이 다시 제2집결지인 미 대사관 「게이트」 25로 뛰어야 했다. 미 대사관 주변은 탈출하려는 인파로 들끓어 철수 난민이 들어설 틈도 없을 만큼 탈출자들이 숲을 이루었다.

김 대사와 이상훈 참사관은 대사관 본관으로 들어가 보니 해군 연락 장교 이문학 해군 중령(38) 등이 이곳에서 철수 「헬」기를 기다렸다.
미 해병대 경비병들은 개미떼처럼 밀려 닥친 월남인과 외국인들에게 질서를 잡기 위해 공포를 쏘아 댔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이 중령 일행은 침착히 「헬」기를 기다렸고 「게이트」 25에 들어서지 못한 한국인 40여 명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탈출의 길을 찾으려고 아우성쳤다.

이들이 김 대사의 주선으로 미 대사관 안으로 들어온 후 30일 상오4시쯤 미 「치누크」 「헬」기가 닿아 미 대사관에서 철수가 시작됐다.

질서 있는 철수가 있을 수 없다. 저마다 먼저 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이따금 미 해병대 경비병들이 공포를 쏘며 질서 유지에 안간힘을 썼으나 막무가내며 미 대사관 뒤뜰은 혼란 그것이었다.

이 중령은 자신이 어떻게 「헬」기 안에 들어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필사의 탈출에 몸부림치는 인파에 저절로 밀려 「헬」기를 탄 자신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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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5775

[ ….. 남베트남의 정권을 부패한 독재정권으로 몰아붙였고,

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는 반미감정을 고양시켰다.

….. 미군은 철수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 베트남은 결국 공산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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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호치민의 주도로 북베트남 공산정권이 사용한 전략도 다름 아닌 민족통일전선 전략이었다.

호치민은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남베트남에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구축하여, 베트콩으로 하여금 베트남정권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게 하고,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에게 민족주의 정서를 호소하며 남베트남의 정권을 부패한 독재정권으로 몰아붙였고, 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는 반미감정을 고양시켰다. 1973년 전쟁에 지친 미군은 철수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 베트남은 결국 공산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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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

…..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

…..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 ]

우리는 월남과 똑같은 방법으로 패망하고 있다.

이대용 (전 주 월남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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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있다. 월맹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했으며 속옷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발에다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군을 붕괴시킨 것이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무기를 고철로 만든 것이다.

좌익이 시민, 종교단체를 장악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팀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정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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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미군철수 후 공산화……..필리핀, 미국에 재주둔 요청

미래한국 승인 2004.04.13

베트남은 힘이 아닌 간첩과 부패로 패망

공산 프락치, 시민*종교단체 위장 미군철수*반전데모 주도

자유베트남은 시종일관 반미*반전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철수 후 공산화 됐다. 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맹을 훨씬 앞질렀지만 부패했고,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종교단체들은 부패척결과 반미*반전평화를 명분으로 베트남의 신경망을 장악해갔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反戰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 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 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반전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필리핀 미국에 재 주둔 요구

실제 주한 미군의 철수가 현실화된다면 우리사회에 닥칠 경제 및 정치 외교적 후유증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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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주한미군 전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매년 최소 50억~100억 달러 이상의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총생산의 2.7%인 국방예산을 최소한 5~6%까지 올려야한다. 군 복무 기간의 연장도 불가피하다. 그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철수로 한반도의 심리적 안보효과가 사라지면 국내에 투자하고 있는 해외기업 상당수가 철수하는 등 수십억 달러 이상의 국부유출 사태가 초래 될 수 있고 대외신용도도 하락할 수 있다. 외교적 입지도 좁아진다. 필리핀의 경우가 참고가 된다. 거센 반미시위로 91년 미군이 철수한 뒤 필리핀은 51억 달러 규모의 군 현대화 계획을 세웠으나 경제난으로 포기했다. 또 반군의 테러와 정국 불안으로 상당수의 해외 투자 기업들이 빠져나가 경기 침체가 계속 됐고 결국 2001년 말 미국 측에 재 주둔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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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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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은 베트콩과 월맹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었다.

이에 비해 월남군은 115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 공군은 1,800대나 되는 공군기를 가진 세계 제 4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도 보급도 모두 공산군보다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월남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후퇴만 했다.
후퇴마저 제대로 못 해 수백대의 전투기를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었다. 월남군이 공산군에게 넘겨준 무기는 무려 50억달러어치나 된다.

다낭에서는 공산군이 공격해 온다는 풍문만 듣고 군대가 배를 타고 후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도 공산군이 왔다는 소식이 없어 다시 상륙해 시내에 들어가보니 아직 공산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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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4.17. 캄보디아 공산화

1975.4.30.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퇴로 종결.

1975.8. 라오스 공산화

1976.2.2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임헌영 = [….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 ] 경향신문 1979.11.13.

1976.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5.4.30.

[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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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6.6.25.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2003

[….동무들! 이제 우리들 세상이 왔습니다…….]

[…..수북히 먼지 쌓인 책장 속 앨범을 끄내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듯 개인의 과거사를 들쳐본건 얼마전 황당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동무들! 이제 우리들 세상이 왔습니다. 힘을 합합시다. 연대해 새세상을 만듭시다” 이런 e메일이 나돌았다. 발신자는 현직 청와대 고위 공무원이다. 이른바 386 핵심이다.

이 메일을 접하곤 우선은 부끄러웠다. 중학생 초등생 두애를 둔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젊을적 꿈을 잊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보너스에 웃고 과외비에 벌벌 떠는 소시민으로 전락한 내가 미웠다. 더구나 언론인은 공인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부끄러움은 잠깐이고 동무라니, 우리들 세상이라니.우리는 누구이고 새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들끼리만 어떻게 새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혹시 그들은 기존의 것들, 재벌과 관료와 언론, 그리고 이 체제를 앙시앵레짐으로 보고 허물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나.

그건 혁명이기 전에 일종의 왕자병인데. 정치권력을 쥐었다고 어찌 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청와대 복도에서 마주치는 정부 부처 관료들을 우습게 보고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08&article_id=0000305115

[광화문]청와대386 “동무들! 이젠 우리세상”
[머니투데이 2003-07-28 12:57]

2006.12.

[… 21세기 양키 극복의 새로운 태양이 극동 한반도에서 떠올으고 있습니다…… ]

[… 우리 7천만 민족도 제2의 베트남이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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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김 위원장께서는 80%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아집니다. 6자 회담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21세기 양키 극복의 새로운 태양이 극동 한반도에서 떠올으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김 위원장께서 강성대국의 자세를 견지하신다면 그것이 이란, 시리아 등 나라의 핵 보유에로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래야 양키들의 제국주의 오만의 코때를 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7천만 민족도 제2의 베트남이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전국 시대와는 정반대로 연횡은 무너지고 합종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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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님께서는 80% 승리를”

“위원장께서 강성대국의 자세를 견지하신다면…”

프리덤뉴스 http://www.freedomnews.co.kr

맥아더동상 철거를 주도한 인물중 한 사람인 강희남(사진) 씨가 북한 김정일에게 ‘핵을 포기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서한이 김정일에게 실제로 전해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강 씨는 이 서한에서 “우리 민족도 제2의 베트남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말해 사실상 적화(赤化)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같은 글을 소개한 곳은 INTERNATIONAL(대표 정형기)이라는 이름의 인터넷매체로, 이 회사는 자신들을 “국제뉴스 전문 사이트”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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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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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13. [ 통일연대 상임고문 강희남 ]

2006년 [ 실천연대 상임고문 강희남 ]

2007.5. 전국연합 홈 = [ 고문 강희남 ]

* 2007.3.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2기 고문 강희남 ]

**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공동대표 겸 한국민권연구소 소장 김승교 ]

* 2002.5. 강희남 출발기념회

[ ….. 초청인 : … 강만길,…권영길,…권락기, 이덕우, 강정구, 박해전, … 윤기진,… 이부영,…. 이재정, 김희선, 장영달, 정동영, 김원웅 …… ]

이름

민족통일회의

제목

흰돌 강희남(前범민련 의장) 출판기념회에 초청합니다.

민족지도자 희돌 강희남 선생의 출발기념회가 개최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목사님 저서 : 『민중주의』와 『소중한 우리글』

● 일 시 : 2002년 5월 27일(월) 18시
● 장 소 : 홍익대학교 소극장

● 주 관 : 민족통일회의 …….

● 후 원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범민족청년학생연합 남측본부, 도서출판 푸른돌…..

● 초청인 : 박형규 …조문기… 변정수, 강만길, 한승헌,… 한상범, …서경원… 홍근수,… 권영길, 권오헌, 윤한탁 …장기표, …권락기, 이덕우, 강정구, 박해전, … 윤기진,… 이부영,…. 이재정, 김희선, 장영달, 정동영, 김원웅

이상무순 일동

2012.3.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 ……“베트남 인민들이 ….. 구정 대공세(1968년)로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켜 승기를 잡았다.

우리는 3월 대투쟁으로 2012년 그리고 그 다음해에 이뤄질 언론해방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겠다 ………. ]

“3월 대공세, 언론해방 기틀 만든다”

언론노조, 2월29일 중앙위와 대의원회 열고 3월 투쟁 결의

[0호] 2012년 03월 07일 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베트남 인민들이 미국에 맞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구정 대공세(1968년)로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켜 승기를 잡았다. 우리는 3월 대투쟁으로 2012년 그리고 그 다음해에 이뤄질 언론해방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겠다”(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산별 총파업이라는 큰 전선을 만들어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을 분쇄하는 3월 투쟁에 착수했다. 언론노조는 2월2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대의원회를 하고 비상대책위 전환과 함께 언론자유를 위한 3월 총력 투쟁을 결의했다.

언론노조는 방송3사 투쟁을 방송의 공공성 회복 및 언론의 자유를 위한 중요 투쟁으로 규정하고, 김재철, 김인규, 배석규 등 낙하산 사장 퇴진과 해직언론인 복직을 당면 목표로 끝장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또 부산일보와 국민일보의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보도 투쟁 및 전 사회적 연대 투쟁으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이날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은“2012년 대반격의 제2국면을 시작하며, 이제는 크고 굵은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3월 대공세로 저들을 패퇴 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언론노조는 3월 대공세를 펼치고, 4월 총선 이후 언론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법개정과 언론장악 심판을 위한 청문회 개최등 언론자유 회복 운동을 펼친다. 또 11~12월에는 미디어생태계 복원 및 언론개혁 세부실행 계획을 완성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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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nodong.org/news/articleView.html?idxno=7891

1968 통혁당 신영복 = 민족해방전선

[ …..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

……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 ]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민족주의자 교사 아들로 태어나 4·19의 충격을 맛보고 무기수가 되기까지…올해 교수 정년을 맞는 그에게 한국 현대사와 통혁당사건의 내막을 듣는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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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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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5/021075000200605110609056.html

2006년05월11일 제609호

* [ 20년 복역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 선고, 20년 복역

“…. 나는 군법회의 1·2심에서 사형선고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20년간 복역.

1996년 [ 신영복은 ”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고 말합니다. ]

월간‘말’1996년 8월호(글/김경환 기자, 사진/박진희 기자)
*1995 월간말지 기획위원 이광재

2000년 [ 송두율교수 귀국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읍니다. ]

2001-03-28 [ 신영복은 자본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151

1979 남민전 임헌영

[ ….. 남민전 ….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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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가명 한민성 상황 출판사 대표)과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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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의 성격은?

답=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인사들로 조직된 단체로 알제리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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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기 땅에 묻고 꽃불 작전

경향신문 1979.11.13.

2006.3.15.

[…… 남민전 동지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 ]

[…… 남민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 ]

[…… 이재문, 신향식 열사의 경우 민족민주 운동 진영에서 이미 열사로 인정되어 추모되고 있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지하기 바란다 …….. ]

[……/민주노동당/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언론운동연합…./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대협동우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참여연대/…/통일광장/학술단체협의회/…/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남민전’ 사건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을 환영하며

[연합뉴스 보도자료 2006-03-15 13:50]

‘남민전’ 사건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을 환영하며, 정부는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젊음을 바친 수 많은 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하고자 2000년 8월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보상심의위에서 2006년 3월 13일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29명에 대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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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1970년대 폭압적인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기 위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하여 활동하여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은 말기에 다가가면서 사회적 민주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민주주의 행위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등 폭압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이수일 등 많은 활동가들이 조직을 구성하여, 박정희 독재 정권을 파탄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은 모든 공안기구를 동원하여 가담자들을 투옥·구금하였으며, 모든 고문기구들을 동원하여 반인권적 고문행위를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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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남민전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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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여야 한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 사과와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고, 미흡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를 위하여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명예회복법 2차 개정안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세워 조속히 개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상심의위원회는 이번 심의에서 보류된 이재문, 신향식, 이해경 포함 남민전 사건 관련 21건에 대하여도 조속히 심의에 들어가 올바른 결정을 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이재문, 신향식 열사의 경우 민족민주 운동 진영에서 이미 열사로 인정되어 추모되고 있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지하기 바란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하여 투쟁해 온 남민전 동지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2006년 3월 15일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상임대표: 강민조, 권오헌, 문영희, 박중기, 오종렬, 조준호, 정종열

민주화운동정신계승부산연대/민주화운동정신계승인천연대/대전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70민주노동자회/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강제징집피해자모임/관악민주포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

의/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주노동당/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언론운동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불교인권위/사월혁명회/사노맹동우회/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사회진보연대/새사회연대/장애인의꿈너머/전국장애인연맹/실천불교전국승가회/양심선언자모임/여성단체연합/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인권목회자동지회/인권실천시민연대/인권운동사랑방/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혁당대책위원회/남민전대책위원회/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전국공무원노

동조합/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전대협동우회/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회/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전국빈민연합/참여연대/천주교인권위원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통일광장/학술단체협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

원회/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남민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월남민족해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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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은 조직의 명칭을『월남민족해방전선』을 그대로 따『남조선민족해방전선』으로 하고『해방전선기』를 베트콩기와 똑같은 모양에 색채만 북괴기와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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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민전은 월남 베트공의 한국판으로서 남한에서의 혁명을 수행하려고 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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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을 맡은 안보검사 출신 고영주 변호사(전 서울남부지검장)는 격려사에서 “친북규명위의 발족은 시의적절하고 훌륭한 용단”이라며 “현 정부 소속의 과거사위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등은 남파간첩들까지 민주화 유공자로 둔갑시켰고 얼마전에는 남민전 관련자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다. 누구 말대로 이제는 막가자는 것 아닌가 싶다”고 개탄했다.

발족식에 이어 열린 ´국가 정체성과 좌익공안사건 재조명´ 세미나에서는 ´남민전의 실체(발제: 김영학 친북규명위 자문위원, 전 공안문제연구소장)´, ´좌익 공안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발제: 이동호 친북규명위 위원,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등의 주제문이 발표됐다.

김영학 자문위원은 ´남민전의 실체´라는 발제를 통해 “남민전은 월남 베트공의 한국판으로서 남한에서의 혁명을 수행하려고 한 사건”이라고 간단히 정리했다.

그는 “남민전 사건은 관련자 84명 가운데 그 핵심인물 2명에게 사형, 그리고 4명에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대규모 좌익사건이었다”며 “남민전의 기본 성격이 대북 추종적이고 베트공 모방적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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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연세대 전대협 사무국장을 지내다 전향한 이동호 위원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과 80년대 학생운동´이라는 발제를 통해 학생운동 이면에 서 있는 친북 좌파 세력들의 활동 내용을 소개했다.

이 위원은 “과거 전대협은 북한의 주체 사상과 그의 이론을 추종했으며 매 시기 한민전의 투쟁 방침을 철저히 따랐다”며 “하지만 그동안 전대협을 이끌어왔던 NL 주사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80년대 운동에 대해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강변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전대협은 전문과 강령을 통해 ´자주민주통일´이 이 시대의 보편적 이념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며 “여기서 말하는 자주민주통일의 이념이란 북한의 주체 사상이 밝히고 있는 3대 투쟁 임무(반미자주, 반파쇼 민주화, 연방제 통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오늘날 반미 의식의 확대와 성장의 배후에는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핵심지도부의 미국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며 “현재 반미운동권들의 태도는 과거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의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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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권 민보위는 남민전관련자들을‘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읍니다. ]

http://www.independent.co.kr/news_01/n_view.html?id=15672&kind=menu_code&keys=3&search=&listpage=n_list.html

“경애하는 수령 金日成 원수님…” 남민전의 충성서신 中

金日成주의 내건 ‘남민전’민주화 인정 파문
主體思想 최초 도입, 80년대 좌익확산 뿌리
공범 임헌영 氏, 출소 후 친일청산 전개

노무현 정권이 1979년 말 검거된 共産혁명조직인‘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관련자들을‘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 물의를 빚고 있다.

대통령 직속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심의회, 위원장 하경철)는 3월13일 제162차 심의를 개최, 남민전 사건 관련 신청자 중 29명에 대해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 받은 것으로 인정했다.

심의회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 남민전 활동에 대해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민주정부를 세우자는 행위”로 각각 판단했다.

심의위는 특히 △자금마련을 위해 고위공직자 집에 들어가 금품을 훔친‘봉화산작전’(1978.12.5) △동아그룹 최원석 전회장 집에 들어가 경비원을 칼로 찌른 ‘땅벌사건’(1979.4.27) △금은방을 털려다 미수에 그친 ‘지에스작전’(1979.3.5) △1978년 7, 8월경 예비군 훈련장에서 카빈 소총 1정을 군부대 밖으로 빼돌린 총기 밀반출 사건 역시 “궁극적 목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남민전이 金日成 주체사상(主體思想)을 내걸고 공산(共産)혁명을 기도했던 단체였다는 점에서, 盧 정권의 이 같은 조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조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남민전 사건이 종료된 후인 81년 10월 대검찰청은 2200여 면에 달하는 공소장과 판결문 등을 기초로 ‘좌익사건실록’제12권을 발간했다.

실록에 따르면, 남민전은“주체사상(主體思想)을 확립하자”를 첫 번째로 하는 전사(戰士)생활 규범10조를 마련하는 등 金日成 주체사상을 표방한 남한 내 최초의 지하조직이었다. 조직원들의 소위 ‘교양’ 역시 평양방송을 종합한 주체사상 자료 등이 사용됐다.
…………………………

이 깃발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등 소위 ‘8열사’가 입었던 내의를 염색한 천으로 만들어졌다.

좌익사건실록은 남민전이 金日成에게 바치는 서신을 수록하고 있다.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서신은“경애하는 수령 金日成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는 등 金日成에 대한 찬양과 숭배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계급적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교육

남민전은 79년 대부분의 조직원이 검거됐지만 남민전이 운동권에 미친 영향은 지대(至大)했다.

우선 남민전 잔당들은 80년대 좌익세력에게 주체사상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반미(反美)’라는 反제국주의 투쟁이 중요하다는 남민전의 투쟁노선 역시 그대로 수용됐다.

386주사파에서 전향해 북한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간사(연세대 82학번)는 “80년대 연세대에 주사파가 확산되는 데도 노동계로 간 학생들이 남민전 잔당들과 접촉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며 “주체사상은 서울대 일부에서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연계된 남민전 조직이 학생운동권에 의도적으로 주입시킨 것이라는 분석이 옳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동권 전향자는 “남민전이 퍼뜨린 주체사상의 씨앗은 80년 광주사태라는 촉매와 함께 대학가에 급속히 확산됐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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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씨는 남민전 연루자인 시인 故 김남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김남주가 반복해 교육했던 내용 중 한 가지는 아래와 같다.

“계급적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히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00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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