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시위를 자제해달라

2018.12.06 09:43

1980

조회 수28

1980

[ ….. 『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호소문을 ……. ]

[ …… 경제발전에 의해 巨大한 세력으로 성장한 중산층이 국론분열이나 정치투쟁의 최종 심판자 …….. ]

………………………………………………………………..

양金의 분열, 계엄령 하 학내시위 격화, 노사분규, 사북사태, 학생들의 가두 진출로 이어진 대혼란을 기다린 것은 신군부였고, 불안해진 것은 중산·서민층이었다. 부마사태 때 도심으로 몰려나온 학생들에게 콜라 사주고 담배 던져 주었던 부산 광복동·남포동의 상인들은 1980년 봄에 와서는 『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호소문을 내기에 이른다. 金泳三-金大中씨의 분열은 행정부 뿐 아니라 민주화를 바라던 중산층까지도 등을 돌리게 했다. 광주를 제외하고는, 1980년 5월의 학생시위에 시민들의 응원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야당세력과 학생들은 군부-행정부-중산층이란 우리 사회의 主流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었다. 중산층이 학생편을 든 부마사태, 2·12총선, 6월사태는 정치적 변화를 몰고 왔지만 중산층이 외면한 1980년 봄, 그리고 1991년 봄(姜慶大 치사사건)의 시위는 좌절되었다. 경제발전에 의해 巨大한 세력으로 성장한 중산층이 국론분열이나 정치투쟁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한국정치의 제1원리인 것이다.

……………………………………………………………..

全斗煥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나? – 조갑제의 15년 취재기

釜馬사태 10·26 12·12 5·17 광주사태 5共비리 사건 全斗煥 구속의 全과정 속에서 正義를 찾아 헤맨 月刊朝鮮의 記錄

『「데모」가 계속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

어젯밤 세종로에서 2천여명 야간시위 10개 대학생

[중앙일보] 1980.05.14

학교 안에서만 시위·철야농성·성토대회등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던 대학생들이 13일밤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처음으로 야간시위를 벌였다.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연대·이대·홍익대·외대·고대·경희대·숙대·명지대·서울대·서강대등 서울시내 10개 대학 2천여명. 학생들은 13일 하오9시쯤 광화문·세종문화회관·화신앞·무교동·신문로 등에서 산발적으로 「계엄해제」등의 구로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30여분간 숨바꼭질식 시위를 벌이다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제지당한 뒤 해산됐다.

…………………………………………………..

갑작스런 학생들의 시내가두시위로 광화문일대에서 귀가하려던 4천여명의 시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광화문지하도 근처에서 학생시위를 지켜보던 박혜경씨(29·여)는 『평화적인 교내시위로도 학생들의 뜻은 충분히 알릴 수 있을텐데 한밤중에 가두까지 진출해 경찰과 충돌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됐다』며 『「데모」가 계속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

https://news.joins.com/article/1536697

[ ….. 시민들은 … 학생들을 지켜보았으나 가담하지는 않았다. ……..

….. 시민반응이 좋지않으니 일단 여의도광장으로 가자 …… ]

1980.5.16. 동아일보

대학생 3일째 야간가두데모

35개대 7만명집결 서울역
경찰에 투석 가스차 태워

대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가 연3일째 계속되면서 더욱 과격해져 15일 데모를 저지하던 전경대원 1명이 숨지고 데모저지차가 불길에 휩싸이는 등 과열상을 보였다. 이날 데모행렬의 주결집지인 서울역에는 한때 35개 대학에서 최고 7만여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몰려 ‘계엄철폐’ 등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 거리로 나서면서부터 제1집결지인 서울역에 이르기까지는 경찰과 큰 충돌 없이 가두시위를 계속했으나 오후 5시 일제히 광화문쪽으로 진입을 시도하면서부터 진입로 곳곳에서 경찰과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집결 성토시위

서울대를 비롯,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역앞 광장과 차도에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5시에는 7만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좌데모가 시작됐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등 10여 가지의 구호를 끊임 없이 외쳐댔다.

이날 시위학생들의 대열은 남대문에서 서울역광장 남단까지 1km를 넘었으며 퇴계로 입구에서 신세계백화점쪽으로 3백여m나 뻗었다.

학생들의 시위열기가 고조되자 시민들은 부근 10여개 빌딩옥상이나 고가차도위 등에서 여러겹으로 줄지어 학생들을 지켜보았으나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날 학생들의 연좌데모 및 가두시위가 계속된 오후 3시반경부터 밤 10시경까지 이곳을 지나는 차량통행이 완전히 막혔고 교통경찰관들은 학생들에게 ‘차는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학생수가 계속 늘어나 속수 무책이었다.

또 많은 학부모들이 나와 자녀들을 찾느라 대학별 대열을 돌아다녔고 곳곳에서는 대학생들간의 시국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1 경찰과의 충돌을 불사, 중앙청쪽으로 들어가자 2 시민반응이 좋지않으니 일단 여의도광장으로 가자 3 서울역앞에 계속 남아 시위하자는 등 몇갈래 의견이 맞서기도 했다.
……………………………………………….

해산

오후 7시경 시위현장에 있던 서울대 스쿨버스안에서 20여명의 각대학총학생회장연석회의가 열려 ‘연좌데모는 밤 8시반에 모두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군은 마이크로버스 지붕위로 올라가 ‘지금 이시각에서 우리 회장단은 각대학의 특수한 상황보다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전제한 후 ‘지금부터 각대학은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힘차게 학교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심군은 이어 귀교할 때 신변안전에 관한 보장을 받았다고 말하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밤 8시 20분경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과 김종환 내무부장관의 전화통화 결과 석방과 시위대보호가 확약되었었다.

1980.5.16.

[ …… 버스를 마구 몰아 경찰에게 달려 드는 것을 보고 저럴수가 있나 ……..

…… 학생들이 그 청년을 다투어 숨겨 주는 것을 보고 또 한번 경악 ……… ]

1980.5.17. 동아일보

시위대열 청년 버스탈취돌진에 저럴 수 있나

학생들의 가두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신문사에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16일 오전에도 같은 시간 한꺼번에 4,5통의 시민전화가 걸려 오는 등 학생들의 가두시위 이후 하루 평균 1천여통위 시민 학생 상인들의 ‘소리’가 연이어 신문사내 수십개의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

‘대학생 아들을 둔 주부입니다. 어제 우연히 남대문엘 갔다 데모대들이 시내버스를 뺏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길에 내렸읍니다. 우선 무서웠고 학생들이 다치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했읍니다. 그런데 버스를 마구 몰아 경찰에게 달려 드는 것을 보고 저럴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는 데 나중에 보니 학생들이 그 청년을 다투어 숨겨 주는 것을 보고 또 한번 경악했읍니다.’

한 40대 주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죽은 전경도 대학에 다니던 우리 국민 아닙니까. 이런 짓은 학생도 깡패도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며 자제를 간절히 호소.

또 어떤 시민은 ‘신문이 그래서야 되느냐. 온통 데모 기사만 싣고 사진을 마구 찍어대니 젊은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 나오는 것 아니냐’ ‘언론기관이 왜 학생들을 자제 시키지 못하느냐’고 매스컴에 대해 핀잔과 질책을 퍼붓기도 했다.학생들은 학생들대로 ‘ …… ‘고 말하기도 했다.

이밖에 ‘통금 시간이 밤 9시로 당겨젔다는데 사실이냐’는 문의는 13일의 첫 가두시위때부터 있달았고 데모학생들이

…………………………………………….

한편 상인들은 ‘도심의 상가는 더욱 피해가 크다. 통행통제와 대낮부터 철시하고 있다’ ‘불경기에 세금도 못낼 판’이라고 불평이고 차량홍수에 파묻힌 택시운전사들은 ‘일당도 못채웠다’고 한숨 섞인 전화를 걸어오기도.

그러나 많은 전화는 학생들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 들이고 학생들도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지금의 사정을 잘 이해해서 현명한 자제를 당부.

“경찰력 이토록 무력하냐”

사북사태때 시위광부들의 폭력에 의해 경찰관이 사망한데 이어 15일 서울 시내에서 데모진압에 나섰던 전경대원이 또 목숨을 잃자 일선 경찰은 물론 치안본부등의 분위기도 극도로 착잡해진 상태.

학생데모가 과열되면서 치안본부 등에
‘왜 경찰력이 이토록 무력하냐’는 등의 항의전화까지 잇달고 있는 판에 15일 오후 데모대가 탈취한 버스에 경찰관 5명이 중상을 입은 충격적인 불상사가 또 일어나자 지금까지 일선 진압경찰관들의 ‘질서 있고 인내심 있는’ 데모 대처 자세에 다소나마 안도감을 가져온 치안 수뇌부들도 ‘이러다간 일선 경찰관조차 자칫 자제력을 잃지 않을지 불안하다’고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실정.

…………………………………………………………….

[ ……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 ]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07월 10일 출간

…………………………………………………………….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 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19091709&barcode=9788971996096

[ …… 시민들이 무표정했다. ……..

…… ‘무반응이었다. 아주 냉정했다’ …….. ]

…………………………………………………………………

서중석 : 시민들의 반응 부분이다. 5월 14일과 15일에 서울에서 시위가 있었을 때 광주와는 또 다르게 시민들이 무표정했다. 이 점을 중시해야 한다. 예컨대 서울대에서 시청까지는 상당히 멀지 않나. 그런데 학생들을 더 힘들게 한 건 시민들을 설득하려고 도처에서 대화를 시도했는데 시민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였을 때 더 피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 잘 분석해놓은 글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나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데, 다만 짐작컨대 경제가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시장 사람들이 시위에 대해 우려하는 점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하나 든다. 유신 말기에 경제가 매우 좋지 않았고 그게 1980년에도 이어진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모두들 당연히 민주화는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지지를 유보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보인다.

당시 나도 학생들한테 많이 물어봤다. 서울역까지 올 때 어떤 길로 왔느냐, 오면서 어떠어떠한 활동을 했느냐, 경찰이 어느 정도 막았느냐, 이런 걸 물었다. 경찰이 조금 막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게 세게 막지는 않았다고들 말하더라. 시민들 반응에 대해서도 ‘무반응이었다. 아주 냉정했다’, 이렇게 답하더라.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다시 살펴본 몇 권의 책에서도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해놨더라. 거듭 말하지만, 당시 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는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1552

그해 5월, 전두환 세력은 왜 거리 진출을 방치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일곱 번째 마당

댓글 쓰기

비회원 프로필 이미지
댓글 0